지방 상인 입장에서는 상가가 일찍 문을 열면 일찍 물건을 매입하고 돌아갈 수 있다는 점이 큰 장점이었다. 사진은 지방으로 내려갈 물품들이 쌓여 있는 2015년 2월 2일 밤 동대문시장 풍경. 사진 조선일보 DB
지방 상인 입장에서는 상가가 일찍 문을 열면 일찍 물건을 매입하고 돌아갈 수 있다는 점이 큰 장점이었다. 사진은 지방으로 내려갈 물품들이 쌓여 있는 2015년 2월 2일 밤 동대문시장 풍경. 사진 조선일보 DB

1980년대 한국 패션 산업은 외형적으로 크게 성장했다. 여기엔 다양한 경제·사회·문화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당시 세계 의류 수요가 급증하면서 한국산 의류에 대한 수요도 함께 증가했다. 한국의 의류 수출 규모는 1980년 300억달러에서 1989년 900억달러로 세 배 증가했다.

국내 의류 시장만 놓고 보면, 기성복 시장이 확대됐다. 1981년 전체 의류 시장에서 기성복이 차지하는 비율은 14%였는데, 이 비율은 1990년 초 50%, 1995년 80%까지 수직 상승했다.

옷에 대한 일반인의 관심이 커진 것이 기성복 시장 성장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여기엔 1980년 컬러TV 방영 시작, 1982년 교복 자율화, 1984년 패션 잡지 월간 ‘멋’ 창간 등이 계기가 됐다.

특히 컬러TV 등장 이후 소비자는 색상에 대한 인식을 갖기 시작했고, 동시에 보다 화려한 디자인에 대한 수요가 많아졌다. 교복 자율화는 신세대를 겨냥한 새로운 시장 창출로 이어졌다. 실제로 교복 자율화로 섬유 업계의 원단 수요가 증가했고, 기존 성인 기성복 제조 업체들이 10대 타깃 의류 시장에 뛰어들었다.

이렇게 의류 수출 증가와 내수 시장 확대로 의류 제작 수요가 급증했지만, 봉제 공장은 이 수요를 따라잡기 버거웠다. 당시에는 의류 제조 업체가 하청 공장을 구하기 힘들다는 뉴스가 자주 나왔다. 국민소득수준 향상으로 봉제 노동 인력 수급이 원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 다른 1980년대 의류 업계 특징은 수출 업체가 패션브랜드를 만든 것이다. 이 영향으로 내수 시장은 동대문 패션 시장과 내셔널 브랜드(전국에서 판매되는 의류 업체 브랜드), 두 갈래로 나뉘게 됐다.

동대문 패션 클러스터 내부를 보면, 새로운 상가 개발이 지속적으로 이뤄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는 지하철역 개통이 큰 영향을 미쳤다. 기존 1호선 동대문역 말고도 1983년 동대문운동장역(2호선), 1985년 동대문역(4호선)이 개통됐는데, 1980년대 서울 시내에 지하철 3개 노선이 교차하는 상권은 동대문역이 유일했다. 1990년대 들어서는 여기에 5호선까지 개통됐다. 이렇게 동대문 상권 접근성이 지속적으로 좋아지면서 상가 규모가 빠르게 커졌다.

1990년대부터는 또 다른 유형으로 동대문 상권이 진화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기존 ‘평화’ 상가군과 차별화하는 새로운 유형의 현대식 상가가 개발됐다. 물론 이 상가는 한 회사가 전체 건물을 소유하고 상인에게 임대하는 ‘미국식 쇼핑몰’이 아니라 ‘분양형 상가’에 가깝다. 이 시기 상가는 과거와 비교해 ‘더 수직적으로’ ‘더 압축적으로’ ‘더 현대적으로’ 개발됐다.

1990년 동평화시장 남쪽에 개발된 ‘아트프라자’를 시작으로 1990년대 중반 (주)디자이너클럽, 혜양엘리시움쇼핑몰, 스튜디오W, 한섬204, 거평프레야 등이 생겼다. 특히 국가 부도로 경제가 얼어붙었던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 때도 동대문에 새로운 유형의 상가가 지속적으로 개발됐는데, 1998년 밀리오레와 1999년 두타(두산타워)가 대표적이다.

실제로 1990년대 현대화한 신(新)상권은 ‘평화’ 상가군으로 대표되는 구(舊)상권을 점포 수에서 완전히 추월했다. 그 결과 동대문 내부에서도 구상권보다는 신상권이 경쟁 우위를 차지하게 됐다.


1998년 생긴 밀리오레와 1999년 생긴 두산타워는 동대문 상권에서 새로운 유형의 상가로 주목받았다. 사진 조선일보 DB
1998년 생긴 밀리오레와 1999년 생긴 두산타워는 동대문 상권에서 새로운 유형의 상가로 주목받았다. 사진 조선일보 DB

‘평화’ 상권에 현대식 상가 들어서며 진화

사실 199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동대문=저가 상품, 남대문=고급 의류 생산 판매’라는 인식이 강했다. 하지만 이 인식은 아트프라자가 들어서면서 깨졌다. 남대문 출신 30대 상인이 주축이 돼 만든 아트프라자는 당시 패션 시장에 등장한 캐주얼 상품 판매에 주력하면서 가격 경쟁력을 무기로 삼았다.

아트프라자 상가의 무기는 또 있었다. 바로 ‘개점 시간’이었다. 당시 남대문과 동대문 의류 도매 상가 매출의 60~70% 정도는 지방과 서울 외곽 지역 판매상들로부터 나왔다. 두 시장 개점 시간은 새벽 3시였다. 그런데 아트프라자는 이 개점 시간을 자정으로 앞당겼다. 고객 쟁탈전에 돌입한 것이다. 상경한 지방 상인 입장에서는 아트프라자에서 일찍 물건을 매입하고 돌아갈 수 있다는 점이 큰 장점이었다. 아트플라자의 자정 개점 전략은 남대문과 동대문의 다른 상가군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시장 잠식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다른 시장들도 개점 시간을 앞당길 수밖에 없었다.

1990년대 후반 IMF 외환위기라는 국가적 재난 상황이 닥쳤다. 하지만 동대문은 이 위기를 기회로 활용했다. 원화 가치 폭락으로 한국에서 파는 상품 가격이 떨어졌다. 외국에서 옷을 구입하러 동대문에 온 상인 입장에서는 같은 제품을 더 싸게 매입할 수 있는 기회였다. 이 시기 일본뿐 아니라 중국, 러시아, 홍콩 보따리상들이 동대문으로 몰려들었다. 이때 동대문 시장에 수출지원센터가 설립됐다.

또 IMF 외환위기는 동대문 시장에 새로운 인적 자원이 투입되는 계기가 됐다. 기업에서 제대로 된 트레이닝을 받은 디자이너들이 동대문 시장으로 유입된 것이다. 이들은 IMF 직격탄을 맞은 패션 기업이 단행한 구조조정으로 회사를 떠난 인력이었다. 이들은 도매 업체에 고용되거나 직접 소규모 패션 업체를 창업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동대문 시장에는 새로운 디자인 의류가 출시되기 시작했다.

※ 이번 칼럼은 한구영 서울대 도시계획학 박사의 학위 논문 ‘클러스터의 진화: 동대문시장 패션클러스터를 중심으로’를 참조했다.


▒ 김경민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부원장, 공유도시랩 디렉터, 금융위원회 금융발전심의회 위원

김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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