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 에이켈봄의 ‘21세기 사람들’에 담긴 평범한 옷을 입은 사람들. 사진 김진영
한스 에이켈봄의 ‘21세기 사람들’에 담긴 평범한 옷을 입은 사람들. 사진 김진영

스트리트 포토그래프(street photograph·거리 사진)는 공적 공간, 특히 거리에서 발생하는 우연한 사건을 생생하게 포착한 사진을 일컫는다. 이와 비슷한 스트리트 패션 포토그래프(street fashion photograph·거리 패션 사진)는 패션쇼장의 런웨이나 스튜디오가 아닌 거리에서 만난 사람을 찍은 사진을 가리킨다. 스트리트 패션 전문 사진가인 스콧 슈만(Scott Schuman)은 패션쇼장에서 볼 수 있는 옷과 실제로 사람들이 입는 옷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느낀 뒤, 스트리트 패션 포토그래프를 찍게 됐다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스트리트 패션 포토그래프 속에 담긴 사람들이 입은 대부분의 옷은 여전히 패셔너블하다. 특히 패션쇼장을 찾는 유명 잡지 디렉터나 모델, 스타일리스트를 주인공으로 한 스트리트 패션 포토그래프는 일반인이 입는 옷이 담겨있다고 보기 힘들다.

거리에서 만난 사람들의 옷을 찍되 패셔너블한 옷이 아닌, 보다 더 일상에 가까운 옷에 관심을 둔 작업이 있다. 네덜란드 사진가 한스 에이켈봄(Hans Eijkelboom)이 1992년부터 2013년까지 20여 년간 한 작업을 모은 책 ‘21세기 사람들(People of the Twenty-First Century)’이 그렇다. 이 책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미국 뉴욕, 프랑스 파리, 일본 도쿄, 중국 상하이 거리에서 사람을 찍고 외관상 공통분모를 기준으로 분류한 사진집이다.

한스 에이켈봄은 사람들이 붐비는 쇼핑센터 근처에서 짧게는 20분, 길게는 두 시간 동안 머물며 사진을 찍었다. 카메라를 목에 걸고 주머니 속 무선 셔터 릴리즈를 누르는 방식으로 거리의 사람들을 촬영했다. 그는 사람들이 입은 옷이나 행동 등 겉보기에 공통점을 가진 이들을 찍었다. 사진집에는 프린팅 티셔츠를 입은 사람들, 베이지색 트렌치코트를 입은 사람들, 청재킷과 청바지를 입은 사람들 등 같은 종류의 옷을 입은 사람들을 모아뒀다. 또는 팔짱을 끼고 걷는 커플, 쇼핑카트를 미는 사람들 등 같은 행동을 하는 이들이 묶여있기도 하다. 에이켈봄은 이 작업이 “나 자신이 내가 아닌 소비 사회의 산물이 아닐까” 하는 질문에서 시작됐다고 말한다.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기 위해 옷을 사지만, 전 세계에서 1만 명에 가까운 사람이 같은 선택을 하고 있다는 현실을 꼬집는다.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옷을 통해 표현하는 것은 허구에 가깝다는 것을 사진을 통해 보여준다.

에이켈봄은 사진 작업의 핵심 요소로 옷을 다루지만, 패셔너블함을 찾는 여타 스트리트 패션 전문 사진가와 다른 관점을 취한다. 그는 스콧 슈만 등 스트리트 패션 전문 사진가에게 유대감을 느끼냐는 질문을 받자 “그들은 예외적인 것에 관심을 갖지만, 나는 길에서 언제나 볼 법한 것을 찾는다”고 말했다.


사진집 ‘21세기 사람들’ 표지. 사진 김진영
사진집 ‘21세기 사람들’ 표지. 사진 김진영

일상적인 옷과 예외적인 옷은 어떻게 다를까? 패션 칼럼니스트 박세진은 저서 ‘일상복 탐구: 새로운 패션’에서 일상복과 패션을 구분한다. 그는 사람들이 매일매일 평범하게 입는 옷이 일상복이라면, 패션은 원래 모습을 바꾸거나 특별한 목적이 있는 경우 ‘평범하지 않기 위해’ 입는 옷이다. 박 칼럼니스트는 “일상복과 패셔너블한 옷은 목적이 서로 다르다”고 말한다.

한스 에이켈봄이 주목한 옷은 일상복에 해당한다. 그의 관심을 끈 것은 거리에서 마주치는 100명 가운데 1명이 예외적으로 입을 법한 옷이 아니라, 짧게는 20분 길게는 2시간만 지켜보면 반복해서 찾을 수 있는 평범한 옷이다. 물론 개개인이 고심 끝에 선택해 입은 옷이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왜 하필 21세기일까. 20세기와 무엇이 다른 걸까. 사실 에이켈봄의 ‘21세기 사람들’은 독일 사진가 아우구스트 잔더의 ‘20세기 사람들(People of the 20th Century)’에서 영감을 받은 작업이다. 잔더는 20세기 초 독일 사회를 인물 사진으로 보여주고자 했다. 그는 농부, 은행원, 교사, 기업가, 화가 등 직업을 기준으로 인물 사진을 찍어 독일 사회를 드러내고자 했다. 이를 위해 잔더는 각자의 일터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사회 특권층의 경우에는 그들의 집을 사진 촬영지로 택했다. 잔더의 사진에서 농부는 농부다운 옷을 입고 들판에 서 있고, 기업가는 슈트를 입고 고풍스러운 의자에 앉아 있다. 옷은 곧 인물의 직업이나 위치를 드러낸다.

20세기만 하더라도 옷은 취향보다 필요에 맞춰 소량 생산됐다. 하지만 인구가 증가하고 과학과 산업이 발전하면서 옷은 대량 생산됐다. 이러한 변화는 사람들이 옷을 취향에 따라 선택하는 행위로 이어지게 했다. 광부나 어부가 작업을 위해 입었던 오버롤이 오늘날에는 자유분방함을 표현하는 수단이 된 것처럼 말이다. 21세기 초상을 담기 위해서는 20세기를 걸었던 잔더와는 다른 접근이 필요한 이유다.

에이켈봄은 시대의 초상을 보여주는 곳이 개인의 생활공간이 아니라 도심 속 거리라고 생각했다. 거리는 사람들이 선택한 옷을 입고 자유롭게 오가는 곳이자, 우연에 의해 수많은 타인과 무심히 접촉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에이켈봄은 거리에서 우리가 늘 맞닥뜨리지만,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는 일상복을 특징에 따라 분류하고 일정한 형식 안에 가둔다.

그는 이처럼 일상을 가시화하는 것에 예술적 가치를 부여한다고 봤다. 에이켈봄은 “예술은 가까이 있는 일상적 현실을 분명하게 볼 수 있는 기준을 드러내야 한다”는 예술관을 가졌다. 이 때문에 그는 20년간 주머니 속의 무선 셔터 릴리즈를 누르며 현실의 파편을 수집했다고 볼 수 있다.


▒ 김진영
사진책방 ‘이라선’ 대표, 서울대 미학과 박사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