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을 좋아하던 아버지는 틈만 나면 산에 올랐다. 가족 여행을 가게 되면 아버지 뜻에 따라 전국 곳곳의 산을 찾았다. 언니와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자 아버지는 기다렸다는 듯 매주 일요일 우리를 산에 데려갔다. 아버지는 암벽이 보이면 돌아가는 법 없이 언니와 나를 기어오르게 했다. 일부러 난이도를 고려해서 여정을 잡아놓는 것 같았다. 아무런 안전장치도 없이 두 딸을 암벽 위로 안내하며 산을 오르던 그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한 번은 입산 금지 구역 철조망 밑으로 기어들어가서 그곳의 암벽을 우리에게 오르게 했다. “이러다 죽더라도 아빠를 너무 원망 말아라”라고 농담을 던지며 우리를 이끌었다. 후들거리는 팔다리로 잡고 디딜 곳을 찾던 나는 떨어져 죽는 것보다 아버지를 실망시키는 것이 더 싫었다. 실망을 주느니 죽어서 원망하리라. 위인전에 나올 만큼 이름을 남기지는 못해도 입산 금지 지역에서 암벽 타다 떨어져 죽은 애로 생을 마감하지 않으리라는 다짐도 있었다.

정상에 오르면 아버지는 달콤한 과일 통조림을 따서 줬다. 귤, 복숭아, 과일 칵테일 등 몇몇 종류가 번갈아 등장했다. 먹을 것을 파는 행상들이 산 곳곳에 있어 음식을 사서 잠시 휴식을 취하거나 풍광이 좋은 적당한 자리를 찾으면 점심을 만들어 먹기도 했다.

그는 종종 ‘논어’의 ‘지자요수 인자요산(智者樂水 仁者樂山·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는 뜻)’을 인용했는데, 그 말미에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여서 내게 씁쓸한 뒷맛을 남겼다. “서영이는 나처럼 산을 좋아할 것이고, 서희는 바다를 좋아하겠지(서영은 언니의 이름이다).”

우리 집에서 최고로 치는 가치는 현명함과 어진 품성이었다. 나는 약삭빠르고 눈치 좋고 입만 산, 경망스러운 아이로 통했다. 아무리 애를 써 봐도 아버지의 나에 대한 평가는 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럴수록 산을 좋아하면 묘수가 생기지 않을까 싶어 끈질기게 그의 등산길을 따랐다.

중학교에 올라가면서 우리의 등산은 점점 횟수를 줄여갔다. 아버지와 함께 보내는 시간은 고통에 더 가까웠다는 사실을 언니와 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의사 소통에 있어 일방적이었고,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것이 고통스러울 만큼 숨 막히는 존재였다.

철이 들기까지는 무작정 아버지를 사랑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짓눌려서 힘들었는데(그렇게 배우고 그렇게 읽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폭력이 극에 달하자 아버지라는 존재는 멀리할수록 안전한 무언가가 돼버렸다. 물론 산에 오를 때의 그는 폭력을 사용한 적이 없었지만, 우리에게 그의 ‘인자함’을 믿는다는 것은 요원한 꿈과 다를 바 없었다.

등산을 포기하며 인자함에 대한 열망을 함께 버렸음에도 나는 누구보다도 잘 걷고 잘 오르는 아이로 자라났다. 하교 후 집에 돌아오면 대문은 항상 잠겨 있었다. 열쇠 따위는 필요치 않았다. 나는 손쉽게 담을 넘었다. 주변을 휙 둘러보고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고 교복 치마를 끌어올렸다.

오래된 주택가의 담 정도는 두 걸음이면 끝이었다. 팔을 뻗어 담장을 잡고 다리를 쭉 찢어서 담 중간의 틈을 공략하고 영차, 몸을 끌어올려 다른 발을 담장 위에 올려놓은 뒤 훌쩍 뛰어내렸다. 조금 과감한 기분이 드는 날은 그대로, 어쩐지 운세가 신통치 않은 듯한 날에는 시멘트로 만들어진 쓰레기통의 도움을 받아 착지했다. 탁탁 손을 털고 마당을 지나 계단을 올랐다. 현관문을 열었다. 아무도 없는 집은 나를 반기는 가장 아늑한 존재였다.

집에 혼자 있을 수 있다는 건 안전과 평온의 상징이었다. 가족이 모이면 누군가에 의해서든 아버지의 신경을 거슬리는 사태가 발생했고, 그의 폭력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과도 같았다. 아버지는 누구보다도 집안의 평화와 안정을 바란다고 했지만, 그가 일컫는 안정이란 ‘아버지 마음대로 누릴 수 있는 상태’에 가까워 보였다. 또 ‘자신이 주고 싶은 만큼 주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기대해도 되는 권리’를 의미했다.

성장 과정에서 내가 목격했던 ‘사랑’의 형태는 사랑을 명목으로 한 억압이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사랑하고 화목한 가정을 이루기 위해 폭력을 행사했다. 좋은 남편과 아버지가 되기를 원했는데, 번번이 자신의 기대를 저버리고 독립된 욕망을 전시하던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폭력의 대상이 됐다. 어머니에게는 정당화할 명목 같은 건 주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가정을 지키기보다는 세상으로 나아가길 원했기에 비난받았다. 아무도 묻지 않았다. 누구를 위한 가정인지를. 그리고 세상으로 나아가고 싶은 어머니의 욕망과 가정을 지키고자 하는 아버지의 욕망은 왜 대치돼야 하는지를. 아버지의 폭력은 선택을 가늠할 수 없는 그녀의 행보에 대한 방어 혹은 징벌이라는 호칭을 달았다.

아이들이 자라는 과정에서 아버지는 내내 자신의 논리를 정당화하고 싶어 했다. 그에 동의하지 않는 우리를 비난했고 폭력을 휘둘렀다. 어린 시절의 나는 한동안, 어머니만 조금 맞춰주면 우리 가정에 평화가 오리라고 믿기도 했다. 어머니가 아버지의 심기를 거스르는 행동을 하면 그걸 덮기 위해서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의 눈치를 봤고 미리 알아서 그의 뜻 안에서 살고자 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뚜렷하게 설명할 수 없었지만 느낄 수 있었다. 사춘기와 함께 저항이 시작됐고 결과는 참담했다. 그럼에도 나는 그의 남용도, 나의 저항도, 모든 실패도, ‘사랑’의 작용과 반작용인 양 믿었다.


‘사랑’ 만으로 다른 것 묵과될 수 없어

나는 아버지를 미워하지 않았다. 한때는 분노조차 하지 않았고 무작정 연민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분노하지 않았음이 잘못됐음을 깨달았다. 용서는 분노 이후에야 올 수 있는 것인데, 나는 살아남기 위해, 혹은 당장의 평화를 위해, 분노를 건너뛰고 성급히 연민하고 용서하고 상황을 받아들이고자 했다. 이것이 바로 딸이었던 내가 실천하고자 했던 ‘사랑’이었다.

폭력은 자주 친절과 안정과 다정함과 따뜻함과 함께 온다. 한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혼재하는 많은 것을 우리는 그럴듯한 단 한 가지로 풀어내고 싶어 하지만, 사랑은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두 극단의 무엇이 아니라 끊임없이 성찰되고 재발명돼야 하는 것일 뿐이다.

우리가 지금 사랑이라고 믿는 것은 거칠고 투박한 현재를 덮는 환상에 불과할 수도 있다. 고통을 희석하고 감당해도 괜찮은 것인 양, 묵과해도 되는 일처럼 정당화하기도 한다. 희미하고 경계가 불분명한 사랑의 명목으로 행해지는 것들에 대한 저항은 그리하여 아주 사소해져야 한다.

일방적 서사를 풍부하게 다시 쓰고 간과된 이야기를 드러내야 한다.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문제란 없다. 우리는 어쩌면 더 중요한 가정의 안정과 당장의 평화를 위해 갖은 혐오와 폭력과 남용을 묵인해 왔고 허용하는 중이다. 우리는 사소한 저항들로 더 세심해지는 삶과 사랑을 끊임없이 재발견하고 재발명해 나가야 하는 것은 아닐까.


▒ 이서희
서울대 법대를 마치고 프랑스로 건너가 영화학교 ESEC 졸업, 파리3대학 영화과 석사 수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