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음식 준비 중인 신승환 셰프, 엘초코 데 떼레노의 간판 메뉴인 ‘로다바요(가자미 구이)’와 ‘출레톤(소 갈비등심 스테이크).’ 사진 채승우 객원기자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음식 준비 중인 신승환 셰프, 엘초코 데 떼레노의 간판 메뉴인 ‘로다바요(가자미 구이)’와 ‘출레톤(소 갈비등심 스테이크).’ 사진 채승우 객원기자

스페인 바스크어(語)로 ‘초코(txoko)’는 ‘작고 아늑한 구석·모서리’가 원뜻이지만 요즘은 ‘음식을 매개로 한 사교모임’ 또는 ‘사설 요리클럽’으로 통한다. 초코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187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스페인 북서부 바스크 지역 해안도시 산세바스티안 남성 몇몇이 직접 음식을 만들어 먹는 모임을 만들었다. 19세기 말이면 스페인에서도 남성이 요리하는 건 드문 일이었을 텐데, 이런 모임을 만들었다니 역시 산세바스티안답다. 산세바스티안은 전 세계에서 인구 대비 미쉐린 스타 레스토랑이 가장 많은 도시다.

초코는 곧 바스크 전역으로 확산됐고, 도시마다 수십~수백 개씩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다. 새로운 음식이 초코에서 개발됐고, 잊혔던 전통 요리가 복원되기도 했다. 바스크가 스페인은 물론 세계에서 손꼽히는 미식(美食)의 고장이 된 데는 초코가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받는 이유다.

레스토랑을 사용하는 초코도 있지만 대개 주방이 딸린 스튜디오(원룸 형태의 주거 공간)를 임대해 모임을 갖는 장소로 사용한다. 회원과 회원이 데려온 손님만 입장할 수 있다. 임대료, 기본양념과 식재료 구입비, 관리비 등 운영 비용은 회원들에게 걷은 회비로 처리한다. 초기엔 남성 전용이었고 보수적인 초코 중에선 지금도 남성만 가입을 허용하기도 하지만, 시대의 변화에 발맞춰 요즘은 대부분 여성도 회원으로 받는다. 단 남성만이 요리할 수 있으며 여성은 오로지 먹기만 한다는 독특한 규정은 거의 모든 초코에서 유지하고 있다.

서울 북촌에 있는 스페인 레스토랑 엘초코를 총괄·운영하는 신승환 셰프는 바스크 지방에서 주로 수련하고 경력을 쌓았다. 초코 특유의 편안한 분위기와 맛을 그리워하던 신 셰프가 최근 한남동에 ‘엘초코 데 떼레노(El Txoko de Terreno)’를 열었다. 회원이 직접 요리하는 진정한 의미의 초코는 아니다. 산세바스티안 뒷골목에 있는 초코에서 경험할 수 있는 제대로 된 바스크 음식을 손님들에게 제공하자는 뜻에서 초코라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

식당에 들어서면 커다란 ㄷ 자형 테이블이 놓여 있다. 손님들이 바(bar)에서처럼 테이블 주변에 둘러앉거나 서서 먹고 마시도록 했다. 테이블 안쪽, 손님들 맞은편으로 주방이 완전히 공개돼 있다. 손님과 거리가 너무 가까워 요리사들이 일하는 공간이라기보단, 아는 사람 집에 초대받아 그가 부엌에서 음식 준비하는 걸 곁에서 보는 듯한 느낌이 초코와 비슷하다.

주방 선반을 꽉 채운 나무 도마에는 소 갈빗대와 함께 도끼와 칼, 꼬챙이 따위 살벌한 도구들이 놓여있다. 그 뒤로 가스가 아닌 숯을 때서 조리하는 그릴과 오븐이 있다. 주방에 조리도구라고는 이 그릴과 오븐 둘뿐이다. 신 셰프를 비롯한 요리사들이 풀무와 부채를 부쳐가며 불을 피우고 요리하는 모습은 마치 전기가 존재하기 이전 시대로 돌아간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이 원초적 방식의 불맛이 초코 음식의 핵심이다. 엘초코는 그릴바(grill bar)를 표방한다. 숯불로만 조리한 음식의 맛은 상상 이상의 감동이다. 재료마다의 특징적인 맛을 고스란히 살려낸다. 숯불 그릴이 지닌 강점을 가장 도드라지게 보여주는 요리는 가자미 구이다. 구이요리라고 하면 으레 육류를 떠올리지만, 초코에서는 잘 구운 생선이 얼마나 맛있는 음식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바스크에서 사용하는 물고기 모양 석쇠에 다진 마늘과 레몬즙으로 만든 소스를 바른 가자미를 올리고 그릴에서 숯불에 굽는다. 앞뒤로 노릇노릇 익은 가자미를 접시에 담고 구운 마늘과 피망, 올리브오일을 뿌려 낸다. 얇은 가자미 껍질은 바삭하면서 하얀 속살은 담백하고 보드랍고 촉촉하다. 생선살 자체의 감칠맛을 완전하게 살려낸다.

바스크어로 ‘왕갈비’란 뜻의 출레톤(txuleton)은 어떤 고기 마니아라도 만족시킬 맛이다. 커다란 갈빗대가 붙은 소 갈빗살을 쇠꼬챙이에 끼워 그릴 위에 걸어뒀다가 주문이 들어오면 그릴에 겉이 군데군데 거뭇거뭇 탈 정도로 강하게 구운 뒤 오븐에 마무리해 낸다. 먹기 알맞은 크기로 잘려 접시에 담겨 나온 고기 안쪽은 진한 붉은빛이 선명하다. 얼핏 덜 익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강렬한 불기운이 고기 안쪽까지 충분히 들어가 차갑지 않고 따뜻하다. 그야말로 제대로 레어(rare)로 구운 스테이크다. 엘초코에서는 바스크에서처럼 레어로 구운 출레톤을 고집한다. 고기는 바싹 구워 먹기를 선호하는 한국에서 그 고집을 계속 지켜 가기를 응원한다.

이 밖에 그릴에 구운 연한 꼴뚜기에 완두콩과 완두 순을 곁들인 치피론(txipiron)과 여러 종류의 토마토를 15년 숙성 셰리 비니거로 버무린 엔살라다 토마테(토마토 샐러드), 스페인에서 해산물이 최고로 맛있다는 갈리시아 지방에서 공수한 문어를 수비드 방식으로 부드럽게 조리한 풀포(pulpo), 가장 등급이 높은 5J 하몬 등 어떤 음식을 주문하건 두루 훌륭하다.


엘초코 데 떼레노 (El Txoko de Terreno) ★★

주소 서울 용산구 독서당로 73 성아맨숀 1층 2호(옛 커피바K 자리)
전화번호 (02)792-5585
분위기 기분 좋은 웅성거림이 식당을 가득 채운다. 일행과 마주보며 대화하고 싶다면 일렬로 앉는 바보단 4인석 테이블이 낫겠다. 더 조용하고 프라이빗한 분위기를 원한다면 8명까지 들어갈 수 있는 룸이 있다. 테이블과 룸은 하나씩 있다.
서비스 격식 없고 편하다.
추천 메뉴 로다바요(Rodaballo·가자미) 2만5000원, 출레톤(소 갈비등심 스테이크) 1kg 15만원, 치피론(꼴뚜기·완두콩·완두 순) 1만5000원, 엔살라다 토마테(토마토 샐러드) 1만원, 풀포(수비드 문어) 2만원, 5J 하몬 3만5000원, 푸아그라 2만5000원, 브리치즈 1만5000원
음료 레드와인 25가지, 화이트와인 10가지, 스파클링와인·샴페인 12가지, 맥주 5가지가 있다. 스페인산 비중이 높은 건 당연하달까 자연스럽달까. 가격대는 최저 8만원부터 650만원까지 비싼 편이다. 티오 페페(8만원), 아몬티야도 나폴레옹(9만원), 크리스티나(9만원) 등 다른 곳에선 찾기 힘든 주정강화 와인을 8가지나 갖춰 반갑다. 특히 달지 않은 셰리는 중국 소흥주나 한국 전통주를 연상케 하는 풍미가 친숙하게 느껴지면서 어떤 음식과도 잘 어울린다.
영업 시간 오후 6~12시·월요일 휴무
예약 매우 권장
주차 주차 공간 협소. 발레파킹 서비스
휠체어 접근성 좋음

★ 괜찮은 식당
★★ 뛰어난 식당
★★★ 흠잡을 곳 없는 식당

김성윤 조선일보 음식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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