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가 그의 상징과도 다름없었던 중절모를 쓰고 있는 모습과 작업실. 사진 듀안 마이클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가 그의 상징과도 다름없었던 중절모를 쓰고 있는 모습과 작업실. 사진 듀안 마이클

1920년대에 등장한 초현실주의는 무의식이나 꿈처럼 이성에 억눌려 있는 것을 표현하고자 한 예술사조다. 초현실주의는 인간의 욕망, 상상, 에로스 등으로 현실에선 낯설거나 기이한 것들을 표현하고자 했다.

초현실주의는 낯선 것을 표현해야 하기 때문에 대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사실주의와 대립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는 막스 에른스트, 호안 미로 등 일부 초현실주의자들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다. 르네 마그리트, 살바도르 달리와 같은 화가들은 대상을 극사실적으로 묘사해 초현실주의가 지향하는 바를 성취할 수 있다고 믿었다. 두 경향을 거칠게 정리하자면, ‘내용으로서 낯선 것’을 표현하자는 공동의 목표 아래 두 가지 길이 있는 셈이다. 한 가지 길은 표현수단 역시 낯선 것, 즉 추상의 길을 택하는 방식이고 다른 한 가지는 표현수단은 우리에게 익숙한 것, 즉 사실적인 방식을 택하는 식이다.

이런 맥락에서 많은 초현실주의자가 사진을 주요 매체로 택한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대상에 대한 기계적 복제와 대상의 사실적 재현에 탁월한 카메라를 이용해 초현실주의가 추구하는 상상, 욕망, 에로스 등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초현실주의자들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되, 우리 눈이 일상적으로 지각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을 추구했다.

초현실주의를 논할 때 중요하게 언급되는 사진가 중 한 명인 듀안 마이클(Duane Michals)이 곧잘 이용한 기법은 다중노출이다. 다중노출이란 동일한 프레임을 두고 두 번 이상 촬영하는 방법이다. 일반적인 사진이 한 장에 하나의 장면을 담는 것과 달리 다중노출로 촬영된 사진은 한 장에 여러 장면이 겹쳐져서 담긴다. 여러 장면이 겹쳐진 사진은 환영(幻影) 같은 장면이나 현실에 있을 법하지 않은 모습을 만들어낸다.

듀안 마이클의 사진집 ‘마그리트와 보낸 시간(A Visit with Magritte)’은 화가 마그리트의 모습을 다중노출 기법으로 담고 있는 책이다. 마그리트는 초현실주의를 대표하는 화가 중 한 명으로, 후대에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마이클 역시 마그리트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마이클은 마그리트의 그림들이 자신의 인생에 ‘위대한 선물’과도 같았다고 말한 바 있다. 마이클에게 마그리트는 감히 범접할 수 없고 비현실적이기까지 한 존재였다. 친구의 친구가 마이클을 직접 소개해주기 전까지 말이다.

이 책에는 마이클이 1965년 8월 어느 날 마그리트 집을 방문해 찍은 마그리트의 초상사진과 집 안의 모습이 담겨 있다. 마이클은 그날을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그날의 기억에 나를 맡겨보자면, 마그리트의 집을 찾아서 길 코너를 돌 때 나를 사로잡은 흥분을 나는 아직도 느낄 수 있다. 서른세 살이던 나는 사진에 대해 내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가정들을 무너뜨린, 심오하고 위트 있는 초현실주의 그림을 그린 그 남자를 곧 만나기 직전이었다.”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 사진 듀안 마이클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 사진 듀안 마이클

마그리트와 함께 보낸 한나절 동안 찍은 사진이 담긴 이 책은 작고 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사진집에서 두 예술가의 흥미로운 만남을 엿볼 수 있다. 이 책에는 눈을 감고 상상하거나 소파에 누워 잠을 청하는 듯한 마그리트의 모습, 마그리트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중절모가 나온다. 즉, 이 사진들은 마이클의 기법과 마그리트의 개성이 모두 돋보이는 초상사진 작업인 셈이다. 이 책은 자신에게 영감을 준 다른 작가에 대해 자신만의 시선으로 응답한 오마주(hommage·다른 작가나 감독의 업적과 재능에 대한 경의를 담아서 특정 장면이나 대사를 모방하는 일)라 할 수 있다.

마이클이 마그리트의 모습을 찍은 최초의 사진작가는 아니다. 마그리트는 20세기 초반 사진을 주요 매체로 사용한 초현실주의자들과 가까이 교류했다. 그리고 이때 이미 다른 초현실주의자가 찍은 사진에 그는 종종 등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사진들은 마그리트에 관한 초상사진은 아니었다. 마그리트는 마치 연극무대의 배우와 같이 등장인물 가운데 한 명으로 나타나 특정 행동을 취하는 모습으로 등장할 뿐이다.

이외에도 잡지나 신문에 게재되기 위해 제작된 마그리트의 사진들이 있다. 이 사진들에서 그는 아마도 사진기자의 요청에 따라, 많은 독자가 화가에게 기대하는 모습을 재현한다. 이를테면 그는 자신의 집에서 그림을 배경으로 두고 붓을 든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와 달리 마이클은 마그리트라는 인물 본연을 드러내는 것에 초점을 둔 사진, 따라서 우리가 초상사진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을 제작한다. 자신의 스타일을 극대화하는 방식을 통해서 말이다. 벨기에 샤를루아 사진미술관(Musée de la Photographie à Charleroi) 관장인 자비에 카노네(Xavier Canonne)는 마이클이 찍은 마그리트의 초상을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사진들은 마그리트의 사고방식에 가장 근접한 초상사진이다. 마그리트는 그의 이젤과 집의 장식물들에 마치 워터마크(watermark)처럼 투사돼 겹쳐져 있다. 소파에서 잠든 듯이 누워있는 채로 말이다. 대단한 예술가에 대해 또 다른 예술가가 만들어낸 이 이미지는 마그리트에게 최고의 헌사를 보내고 있다.”

마그리트는 마이클과 만나고 2년 후인, 1967년 8월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 책의 마지막에는 마이클이 찍은 마그리트와 그의 아내 조제트 베르제가 함께 묻힌 묘석 사진이 담겨 있다. 듀안 마이클이 마그리트에게 전하는 마지막 인사로 이 글을 마친다.

“안녕, 르네 마그리트. 당신은 놀라운 오페라의 위대한 지휘자였습니다. 당신의 작품은 음악이 끝난 후에도 오래도록 지속되는 선율처럼 내 마음에 남아 있습니다. 이제 당신은 망각의 침묵 속으로 사라졌기에 아마도 우리 박수갈채의 메아리를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 김진영
사진책방 ‘이라선’ 대표, 서울대 미학과 박사과정

김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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