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 호지슨 크리스털팰리스 감독.
로이 호지슨 크리스털팰리스 감독.

축구와 클래식은 만국 공통어다. 클래식 연주자, 축구인도 예외가 아니다. 월드컵, 유로, 챔피언스리그 4강 이상의 경기가 열릴 때면 이탈리아와 독일 등 축구 강국의 오페라 대기실에선 경기 실황을 틀어놓고 매니저에게 점수를 물어보는 장면이 연출된다.

심지어 휴대전화 반입이 금지된 오페라 무대에서도 무대 기술자들이 몰래 중계를 보는 장면이 목격되기도 한다. 빈 슈타츠오퍼에서 주역 가수로 활동하는 베이스 박종민은 “축구와 클래식은 둘 다 관중을 앞에 두고 무대에서 싸우는 직업이라 실수하면 안 된다”며 “준비를 철저히 해서 무대에 올라가야 성공하고, 몸이 악기이자 재산이다”라고 축구와 클래식의 공통점을 정리했다.

클래식 스타들의 축구 사랑은 잘 알려진 편이다. 3대 테너(루치아노 파바로티, 플라시도 도밍고, 호세 카레라스) 중에서도 도밍고의 축구에 대한 애정은 각별하다. 영국 북동부에 있는 ‘타인극장’ 대표 잭 딕슨은 도밍고를 무대에 세우려고 뉴캐슬 유나이티드 홈경기 VIP 시즌권을 활용했다. 결국 시즌권을 받은 도밍고는 타인극장에서 공연하는 오페라 ‘토스카’ 출연을 수락했다. 열두 살 때 축구공에 머리를 맞은 충격으로 시력을 상실한 안드레아 보첼리도 축구에 관심이 있다. 보첼리는 축구를 눈으로 즐길 순 없지만,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티켓을 구해 경기장의 기운을 느끼거나 주제가를 부르면서 망중한을 즐긴다.

“축구보다 축구 선수를 더 사랑한다”는 농담과 함께 2002년 월드컵 홍보대사를 맡았던 소프라노 조수미는 프란체스코 토티(AS 로마)의 열혈팬이었고, 축구를 보는 안목이 탁월하다. 조수미는 유로 2012 이탈리아·스페인전을 보면서 트위터에 “내가 프란델리 감독이라면 후반에 디 나탈레를 넣겠다. (전반에 부진했던) 발로텔리는 헤어스타일을 고치러 나가야겠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프란델리는 후반에 발로텔리 대신 디 나탈레를 투입했고, 디 나탈레는 득점에 성공했다.

영국 지휘자 대니얼 하딩은 클래식계를 대표하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팬이다. 1983년 아버지 손에 이끌려 런던 웸블리 구장에 들어간 하딩은 FA컵 결승전 맨유 대 브라이튼 경기를 보면서 헤딩골을 넣은 맨유의 노먼 화이트사이드에 매료됐다. 이후 그는 맨유의 충성팬이 됐다. 그는 칸토나, 로이 킨의 충동적인 플레이와 솔샤르, 박지성의 헌신적인 자세를 모두 높게 산다. 그는 음악감독을 하며 받는 피로를 축구로 풀었다. 하지만 맨유 성적이 하락세를 걸으면서 최근에는 경비행기 조종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한다.

축구 감독 중에선 6~7월 휴식 기간에 클래식 공연을 찾는 이들이 적지 않다. 선수들을 독려하고 팀을 규율하는 책임이 막중한 축구 감독들 역시 자신의 감정을 추스르고 머리를 맑게 하는 데 클래식을 선용한다. 1996년부터 2018년까지 아스널을 감독한 아르센 벵거는 경기가 끝나면 차에서 클래식 음악이나 1970~80년대 팝 음악을 듣는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생각을 정리할 때면 클래식 음악을 활용한다. 리버풀 감독 위르겐 클롭은 벵거 감독과 자신의 전술을 음악에 비교했다. 그는 자신은 ‘헤비메탈’식 접근으로 팀을 운영하고, 벵거는 ‘오케스트라’처럼 팀을 꾸린다고 설명했다.


안드레아 보첼리. 라니에리 감독의 레스터시티 EPL 우승을 노래로 축하하고 있다. 사진 Leicester
안드레아 보첼리. 라니에리 감독의 레스터시티 EPL 우승을 노래로 축하하고 있다. 사진 Leicester
거스 히딩크 감독과 피아노 듀오 유센 형제 중 한 명. 사진 유니버설뮤직
거스 히딩크 감독과 피아노 듀오 유센 형제 중 한 명. 사진 유니버설뮤직

2012년부터 2016년까지 잉글랜드 국가 대표팀을 맡았던 크리스털팰리스 감독, 로이 호지슨은 영국 축구계에서 대표적인 오페라광이다. 호지슨은 1999년 인터밀란에서 잔여 여섯 경기를 책임지는 임시 감독직을 제안받았을 때, 급여 대신 라 스칼라 오페라 티켓을 마음대로 구하는 조건을 제시했다. 호지슨은 경기가 끝나고 산 시로 스타디움을 떠나면, 라 스칼라 극장의 베르디 오페라를 보는 데 시간을 아끼지 않았다. 호지슨은 런던 남서부 리치먼드에 살면서 얻는 가장 큰 이득이 “코벤트가든 로열 오페라를 마음대로 볼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2001년부터 2006년까지 잉글랜드 국가대표를 맡은 스벤 예란 에릭손 현 필리핀 대표팀 자문은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앞두고 자신이 감독 생활을 하면서 즐겨듣는 클래식 음원들로 세 장짜리 편집음반 세트를 발매했다. 에릭손은 자신의 조국인 스웨덴을 비롯해 북유럽 작곡가들과 영국, 유럽 작곡가들을 망라해 선곡했다.

2008~2012년 잉글랜드, 2012~2015년 러시아 대표팀을 이끈 파비오 카펠로는 영국 국가대표 감독 시절, 런던 심포니 수석지휘자를 맡았던 발레리 게르기예프와 클래식을 매개로 친분을 쌓았다. 런던에 있을 땐, 게르기예프가 지휘하는 바비컨센터를 방문해 대기실에서 오스트리아 TV 채널을 같이 봤다. 2018년 러시아 월드컵 기간에는 볼쇼이와 마린스키에서 문화축전을 책임진 게르기예프를 열성적으로 성원했다.

2002년 이탈리아 대표팀을 맡아 한국에 패배한 조반니 트라파토니는 국제 축구계에서 알아주는 LP 애호가다. 베토벤, 비발디, 모차르트, 슈베르트 음반을 2000장가량 갖고 있다. 밀라노 근교에서 자란 트라파토니는 어려서 축구와 직업 음악가의 기로에 섰고, AC밀란 유스팀에 다닐 때도 마음속으로는 프렌치 혼(French Horn)에 대한 열망을 놓지 않았다. 그는 “축구 선수가 클래식을 이해할수록 축구의 질이 더 높아진다”는 강력한 믿음을 갖고 있다. “모차르트를 들으면 축구를 더 잘한다”는 식이다. “인터벌·템포·리듬에 대해 음악적인 논리를 익히면 게임을 읽을 수 있다”는 게 트라파토니의 설명이다. 수많은 리그 우승컵을 안았지만 리오넬 메시는 여전히 월드컵과 코파 아메리카컵 트로피가 없다. 메시는 클럽 감독처럼 축구 시즌이 끝나고 바르셀로나의 리세우 오페라 극장을 찾는 대신, 집에 돌아가 챔피언스리그 공식 주제가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즉흥으로 변주해서 피아노로 연주한다. 2001~2002년 한국 대표팀을 맡은 거스 히딩크는 네덜란드의 떠오르는 피아노 듀오 유센 형제와 페이크 다큐멘터리를 찍었다. 자신이 축구를 가르치고, 유센 형제가 자신의 피아노 연주를 봐주는 식이었다. 그러나 2018 러시아 월드컵 기간 TV 해설가로 모스크바에 왔을 때, 무릎이 아파 애인 엘리자베스가 볼쇼이 극장 갈라 공연에 가자고 했으나 동행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