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하려는 난민들이 떼지어 있는 모습. 세바스치앙 살가두는 6년여에 걸쳐 39개국에서 난민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았다. 사진 김진영
이주하려는 난민들이 떼지어 있는 모습. 세바스치앙 살가두는 6년여에 걸쳐 39개국에서 난민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았다. 사진 김진영

우리는 구호금을 모으거나 자원봉사자를 모집하기 위해 사용되는 기아(飢餓)의 이미지를 TV에서 곧잘 마주한다. 앙상한 아이의 모습, 마실 것이 없어 먼 곳에서 물을 길어오는 모습, 어린 동생에게 얼마 안 되는 먹을 것을 내어주는 어린아이의 모습 등을 말이다. 이 이미지를 마주한 나는 무감각하게 채널을 돌린다. 가난과 곤궁의 이미지가 나에게 더 이상 충격으로 다가오지 않는 셈이다. 왜 그럴까?

미국의 평론가이자 작가인 수잔 손탁(Susan Sontag)은 저서 ‘사진에 관하여(On Photography)·(1977)’와 ‘타인의 고통(Regarding the Pain of Others)·(2003)’에서 카메라가 담아낸 현실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면서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해지는 역설을 진단한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세계 곳곳에서 발생하는 고통과 불의가 광범위하게 사진에 담기게 되자, 이는 우리를 잔혹함에 대한 어떤 익숙함으로 이끌었다. 그리하여 끔찍한 사태는 일상적인 것으로, 즉 낯익고 우리와 상관없으며 당연한 것이 되어 버렸다.”

그의 말대로 충격은 익숙해져서 엷어지기 마련이다. 손탁의 진단대로 현대인은 타인의 고통이 담긴 사진을 무감각하게 보고 잊기를 반복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진이 애초부터 무용한 것은 아니다. 사진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함으로써 잊고 있던 혹은 모르는 것을 보게 한다. 만약 타인의 고통을 재현해서는 안 된다는 윤리적 강박만이 앞선다면, 우리는 타인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세상에서 살게 될 것이다. ‘재난과 고통이 예술적 재현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라는 예술의 윤리성을 둘러싼 문제는 세바스치앙 살가두(Sebastião Salgado)의 사진을 둘러싼 논쟁에서도 잘 드러난다.

세바스치앙 살가두는 오랜 시간 세계 곳곳의 국제 분쟁, 기근(飢饉)이 만연한 장소에서 곤궁에 처한 이들을 담아낸 사진가다. 그는 ‘사헬: 길의 끝(Sahel: The End of the Road)·(2004)’에서 1980년대 중반 사헬 지역의 극심한 가뭄으로 인해 굶주리고 말라 비틀어진 사람들을 담았다. ‘노동자: 산업 시대의 고고학(Workers: Archaeology of the Industrial Age)·(2015)’에서는 광산, 기름 채굴, 농사 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현실을 담았다. 그런데 이와 더불어 살가두의 사진은 면밀한 구도, 극적인 빛, 광활한 구도에 담긴 스펙터클함 등을 특징으로 한다. 한마디로 그의 사진은 미적이고 아름답다.

살가두의 ‘이주(Exodus)’ 역시 마찬가지다. 이 사진집은 그가 1993년부터 6년여에 걸쳐 39개국에서 난민의 모습을 담은 사진집이다. 중남미를 떠나 미국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 구소련을 떠나는 유대인, 코소보를 떠나 알바니아로 가는 사람, 르완다 내전 후 난민이 된 사람, 지중해를 거쳐 유럽으로 가려는 보트피플(boat people) 등 다양한 경제·종교·기후·정치적 이유로 고향을 떠나 다른 어딘가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담겨 있다. 살가두는 우리가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해지고 있는 동안에 비극을 담아낸다. 살가두는 자신이 이미 많은 비극을 목격했다고 말하면서도 “이토록 심한 폭력, 과격한 증오와 야만을 만나게 될 줄 몰랐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길게 늘어서 줄을 따라 이동하거나 임시 거처에 모여 있는 엄청난 수의 난민은 스펙터클함을 자아내고, 극적인 역광을 통해 비치는 인물은 때때로 위엄 있고 아름답게 묘사된다.

살가두의 사진은 유독 논쟁의 중심에 서 왔다. 그것은 정치와 예술 사이의 논쟁, 끔찍한 내용과 아름다운 형식 사이의 논쟁이다. 비평가 잉그리드 시시(Ingrid Sischy)는 ‘뉴요커(The New Yorker)’에 쓴 글에서 살가두의 사진이 대상의 존엄을 훼손한다며 다음과 같이 비판한 바 있다. “살가두는 사진 구도를 신경 쓰고, 비탄에 빠진 피사체의 비틀린 형태에서 우아함과 아름다움을 찾는데 분주하다.”


세바스치앙 살가두 사진집 ‘이주’. 사진 김진영
세바스치앙 살가두 사진집 ‘이주’. 사진 김진영

참상을 다룬 사진에 대한 이 같은 비판의 어조는 물론 살가두만을 향한 것은 아니다. 전쟁의 한복판에서 보기 어려울 정도의 잔혹한 사진을 담은 ‘지옥(Inferno)·(1999)’을 출간한 제임스 낙트웨이(James Nachtwey) 역시 비판의 대상이 된 바 있다. 죽은 사람들을 시각적으로 세련되게 담은 그의 사진은 이들 틈에서 구도나 스타일을 신경 썼다며 비판받았다. 뤼크 들라예(Luc Delahaye)는 2011년 영국 테이트(Tate)에서 열린 전시에서 난민 캠프 사진을 거대하게 프린트해 걸었다. 그는 전쟁 사진을 갖고 예술 시장으로 다소 ‘불편하게’ 넘어왔다는 비판을 받았다.

매우 간략하게 서술했지만, 이런 사진 비평은 대체로 다큐멘터리 사진을 의심한다. 재난을 소비하게 만든다는 비판도 가한다. 하지만 한 점의 티끌 없이 깨끗한 사진가의 시선이 과연 존재할까. 과도한 비판 아래 재현이 금기시된다면, 우리는 많은 것을 잃고 그저 침묵을 선택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와 다른 입장의 비평가들은 사진을 ‘찍는 자’의 윤리학 속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사진 ‘찍힌 자’의 관점에서 이 문제를 바라보고자 한다. 이러한 비평은 대체로 재난 사진에 찍힌 자의 의지가 개입될 수 있음을 가정한다. 프랑스 미술사학자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Georges Didi-Huberman)은 재난 사진에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자 하는 대상의 의지를 읽어낸다. 사진에 관한 윤리적 담론을 개진하는 이스라엘 사진 비평가 아리엘라 아줄레(Ariella Azoulay)는 모든 사진은 사진가와 피사체가 만난 흔적을 담고 있으며 따라서 어느 한쪽이 의미를 결정짓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살가두의 사진으로 돌아와보자. 살가두는 오랜 시간 피사체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사진 작업을 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는 만큼, 우리는 이주하는 특정 인물이 사진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고 있음을, 어떤 ‘말하기’를 수행하고 있음을 보다 적극적으로 주장할 수 있지 않을까. 살가두가 자신의 자서전에서 ‘이주’ 작업에 대해 남긴 다음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그들은 힘겨운 시간을, 더러는 인생 최악의 고비를 넘기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내가 사진을 찍도록 허락해주었다. 자신들의 절망이 널리 알려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랬을 거라고 생각한다.”


▒ 김진영
사진책방 ‘이라선’ 대표, 서울대 미학과 박사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