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너선 사프란 포어 사진 제프 머멜스타인(Jeff Mermelstein)
조너선 사프란 포어 사진 제프 머멜스타인(Jeff Mermelstein)

내가 여기 있나이다
조너선 사프란 포어 지음|송은주 옮김|민음사
전 2권|각 권 1만5000원

유대계 미국 소설가 조너선 사프란 포어(42)의 장편 ‘내가 여기 있나이다’는 ‘성경’ ‘창세기’의 아브라함 이야기에서 제목을 따왔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신의 부름에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답했고, 아들이 그를 찾을 땐  “내가 여기 있다”고 답했다. 아브라함은 두 개의 ‘나’로 분열됐다. 신의 명에 따라 아들을 희생시키려는 ‘나’와 아들을 사랑하는 ‘나’ 중 어느 쪽이 진정한 ‘나’일까.

포어는 ‘성경’ 구절을 정체성 위기에 빠진 인간 중심으로 해석한 뒤 그 바탕 위에 4대에 걸친 미국 유대인 가족사를 그려냈다.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유대인 아이작 블록을 비롯해 그의 아들과 손자, 증손자에 이르는 가족사가 전개되는 것. 각 인물이 오늘날 미국 유대인의 다양한 정체성과 세대 차이를 대변한 가운데 현대적 삶의 여러 양상을 몽타주 기법으로 형상화했다. 철학과 문학을 전공한 작가 포어가 지성과 감성이 번득이는 문장으로 우아하면서도 우스꽝스러운 인간의 본성을 치밀하게 파고들었다.

소설의 등장인물은 다채롭지만, 중심인물은 소설가 출신의 드라마 작가 제이콥과 건축가로 활동하는 그의 아내 줄리아로 규정할 수 있다. 그들의 세 아들이 조연을 맡지만 저마다 깜찍하고 영리한 발언으로 이야기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제이콥의 할아버지와 부모, 사촌도 저마다 비중 있는 발언권을 행사해 이야기의 층위를 두껍게 한다.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서술된 소설이지만, 각 인물이 잘게 쪼개진 이야기의 각 국면에서 사실상 일인칭 화자처럼 등장하기 때문에 다성(多聲)으로 채워진 공간 속에서 그 목소리들이 상황에 따라 호응하면서 내는 울림의 파장을 제시한다. 이런 ‘파편화’ 기법 때문에 독자는 자칫 이야기의 미로를 헤매기 쉽다.

하지만 이 소설은 후반부로 갈수록 제이콥의 이야기로 좁혀진다. 제이콥이 마흔을 넘겨 맞은 삶의 위기를 통해 진정한 정체성 찾기에 나서는 것을 보여주면서 이 소설을 쓰는 작가 포어의 웅숭깊은 고뇌가 책에 투영되는 효과를 빚어낸다. 작가는 자전소설로 보는 서평에 대해 “이 소설은 내 삶의 이야기가 아니지만, 바로 나 자신”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 소설 독법은 다채로운 주제의 등장에 걸맞게 여러 갈래로 나뉠 수 있다. 유대주의 전통과 역사가 오늘날의 유대인에게 지닌 의미의 해석이기도 하고, 미국 지식인의 허무주의와 지적(知的) 유머를 통한 삶의 해석이기도 하고, 가족의 가치는 무엇인가에 대한 현대적 해석이기도 하고, 진정한 자아와 행복이 지닌 관계에 대한 철학적 해석이기도 하다. ‘성경’과 그리스 서사시 ‘오디세이’, 서양 인문학에 뿌리를 둔 작가의 명상록을 재기발랄하게 전개했기 때문에 중후한 생각거리를 경쾌하게 풀어보는 재미를 선사한다. 이 소설은 인간이 지닌 다중(多重) 정체성을 파고들면서 참된 정체성을 찾는 방법을 제시하지만, 이것이냐 저것이냐 선택의 이분법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고, 정체성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 선택의 변화 과정이기 때문에 삶을 ‘생존 중에 겪는 환생’으로 보기도 한다.

인문학을 ‘반성적 사고의 언어 사용’이라고 한다. 이 소설의 언어는 그런 측면에서 인문학 향내를 물씬 풍긴다. 독자로 하여금 천천히 읽다가 생각에 잠겨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중얼거리게 하는 소설이다.

박해현 조선일보 문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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