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에서 녹화한 ‘타이니 데스크 콘서트’ 동영상이 유튜브 조회 수 370만 뷰가 넘어서면서 이희문은 해외에 먼저 알려졌다. 타이니 데스크 콘서트는 다양한 뮤지션을 소개하는 미국 공영 라디오 방송 ‘NPR’의 라이브 음악 프로그램이다. 그가 결성한 민요 록밴드 ‘씽씽’에 대해 주최 측은 이렇게 설명했다. “씽씽은 우리가 보거나 들은 적 있는 그 어떤 밴드와도 다르다(SsingSsing isn't like any other band I've ever seen or heard).”
펑크, 디스코, 레게, 글램록, 테크노와 어우러져 나온, 세상 어디에도 없는 아찔한 민요 사운드에 세계인은 즐거운 충격에 빠졌다. ‘NPR은 저 사람들을 대체 어디에서 찾아냈나?’ ‘쇼킹할 정도로 천재적이다’ ‘국악이 저토록 섹시할 수 있다니’ ‘전통의 창조적 파괴자’라는 댓글이 이어졌다. 민해경과 마돈나를 꿈꾸다 스물일곱 살 늦깎이로 소리를 시작한 이희문은 짧은 시간에 ‘조선의 헤드윅’으로 세계를 울리는 절창(아주 뛰어난 명창)이 됐다. “그 모든 게 노는 힘에서 나왔다”는 소리꾼 이희문을 만났다.
‘조선 아이돌’‘조선 헤드윅’이란 별명은 맘에 드는가.
“언젠가 국회 앞뜰에서 공연한 적이 있는데 한 정치인이 감탄하면서 ‘당신이야말로 조선의 아이돌이요!’ 하더라. 그때부터 ‘조선 아이돌’이라고 불렸다. ‘조선의 헤드윅’은 하이힐 신고 가발 쓰고 난장을 피니까 뮤지컬 ‘헤드윅’에 빗대서 나온 별명이고.”
여장을 하게 된 이유가 있나.
“태어나서부터 어머니(국가 무형문화재 경기민요 이수자인 고주랑 여사)를 통해 소리를 들었다. 1980년대 초반엔 여자 소리꾼들이 주류였다. 유년 시절을 할머니, 어머니 손에서 자라다 보니 여성적인 게 몸에 배었다. 한국은 ‘남자는 남자다워야 한다'는 억압이 있고, 특히나 전통문화를 하는 사람이 ‘여성스러우면’ 경을 칠 일이라 한동안 이런 기질을 숨기고 살았다.”
남자 소리꾼은 왜 드문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오류가 생겼다. 한국 문화는 대개 외국 문화와 섞이면서 발달했다. 한국인은 변화 흡수가 빠르고 컬래버레이션이 체질화된 민족이다. 그런데 구한말부터 80년대 초까지 일본의 장인 문화가 제도화되면서 ‘소리’가 보존 중심으로 바뀌었다. 문화재 선생님들만 공경받고, 결과적으로 생활 속에서 남자들의 ‘소리 놀음’이 사라졌다. 그런데 사실 당시에 가장 핫하고 트렌디한 장르가 민요였다.”
민요가 지금의 ‘랩’ 같았다는 건가.
“그렇다. 힙합 뮤지션이 랩 하듯 당대의 인기 가수가 민요를 부른 거다. 그 힘이 막강했으니까 지금도 그 장르가 보존된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100년 전 조선에 분명 나 같은 사람이 있었을 거다. 예술인들은 주로 비주류 문화에서 에너지를 받지 않나. 100년 전이라고 뭐 달랐을까. 당시 소리꾼들도 동아리처럼, 서로 모여서 홍대 밴드처럼 놀았다고 한다.”
조선 시대에도 지금의 홍대 인디 문화가 있었다는 이야기인가.
“내 생각엔 그렇다. 그게 내가 얼마 전 공연으로 재현한 ‘깊은 사랑’이다. 땅 깊숙이 만든 사랑방이라는 뜻이다. 농한기 때 노는 땅을 깊이 파서 동아리방을 만든 거다. 거기서 남자들끼리 소리하고 놀았다. 지금의 홍대 지하 벙커 같은 공간이랄까.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게 하나도 없다.”
양반들도 사랑방에 명창을 불러다 판소리를 청해 들었는데 그것과는 다른가.
“민요는 양반들이 향유하던 판소리와는 다르다. 사대문 밖의 중인 계급이 즐기던 노래다. 폼 잡고 그런 게 없지. 중인들이 가내수공업으로 돈이 좀 생기면서 사대부의 여유를 따라 취미생활을 한 거다. 그런데 당시에도 예술하는 사람들은 자유로운 영혼이라 자기 스타일대로 놀았다. 내가 하는 민요도 몇 백 년 이어진 게 아니라 100년 내외의 소리가 아니겠나.(웃음).”
전통은 시대에 맞게 더 트렌디해져야 보존된다는 역설이군.
“맞다. 나는 민요도 좋아하지만, 잡가도 좋아한다. 잡가는 소리꾼들이 자기 목청을 뽐내려고 만들어 부른 노래다. 더 자유롭다. 박자, 리듬 다 자기 멋대로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에 권번이 생기고 게이샤 문화가 들어오면서 달라졌다. 게이샤는 엄격하게 훈련된 상품이잖나. 권번이 일종의 아이돌 기획사 역할을 하고, 남자 소리꾼들이 권번에 가서 소리를 가르친 거다. 그때부터 우리 소리가 규격화되면서 자유로움이 사라졌다. 나는 그 자유로움을 다시 살려내려는 거고.”
그래서 민요와 록, 막춤, 퀴어 코드로 무장하고 홍대 클럽으로 갔나? 요즘엔 관객들이 ‘베틀을 놓세, 베틀을 놓세’ 하면서 민요를 떼창으로 따라 한다고 들었다.
“40대 중반 여성이 가장 열광하고, 30대나 50~60대분들도 좋아한다. 지난주 홍대 라이브 홀에서 공연했는데 중년분들로 꽉 찼다. 본인들도 ‘와! 우리가 홍대 와서 놀고 있네’ 하고 놀라면서.”
무엇보다 미국의 공영라디오방송 NPR의 ‘타이니 데스크 콘서트’에 나왔던 민요록밴드 씽씽의 시너지가 대단했다. 세상에 없던 ‘미친 흥’이었다. 소리꾼 3명의 ‘야릇한 끼’에 감전되는 것 같았다.
“추다혜, 신승태씨랑 같이 노래하다 보면 다들 ‘핀이 나간 것처럼’ 논다. 춤추며 흔들고 사는 게 생명의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씽씽밴드는 2014년 12월부터 홍대 클럽에서 4년 정도 활동을 했다.”
처음엔 홍대 인디 밴드들도 충격 꽤나 받았겠다.
“어어부밴드의 장영규씨(‘부산행’ ‘곡성’ 등의 영화 음악을 작곡하기도 했다)가 씽씽과 함께했는데, 일단 장영규씨가 홍대 밴드의 조상 격이니까(웃음). 전통과 록이 충돌 없이 어울려 노니까 순식간에 밴드가 좋아하는 밴드로 유명해졌다.”
‘밴드들의 밴드’였다가 2017년 미국의 ‘타이니 데스크 콘서트’에 출연하면서 세계적으로 ‘잭팟’이 터졌다.
“우연이었다. 미국 투어 공연을 ‘타이니 데스크 콘서트’ PD가 보고 출연 요청을 했다. 딱 하루 쉬는 날 무슨 방송인지도 잘 모르고, 15분 녹화하러 워싱턴까지 4시간 기차 타고 갔다(웃음).”
유튜브에선 조회 수가 370만 뷰가 넘었다. 씽씽밴드는 지금 해체됐는데, 재결합해달라는 운동이 일어날 정도다.
“씽씽은 어딜 가도 잘 노는 무적함대 같았다. 미국 공연할 때도 그랬다. 미국인이 민요를 어떻게 알겠나. 그런데 일단 우리가 좋아 난리블루스를 추면 관객이 어느 순간 따라온다. 잘 노는 놈을 당할 사람은 없다. 씽씽으로 클럽에서 몇 년간 놀아본 저력이 있기에 가능했다. 끝까지 놀 수 있는 마음… 우리한텐 그런 노는 힘이 있다.”
노는 힘이라…
“‘틀려도 돼, 망해도 돼, 놀려고 하는 거야.’ 이런 태도가 홍대에서 자연스레 훈련이 됐다. 그런데 민요의 전통이 그렇다. 잔칫집에서 메들리로 많이 불렀거든. 잔칫집은 극장이나 무대 개념이 없다. 문턱도 없고 경계도 없고, 선을 막 넘어서 노는 거다.”
대단한 기세다. 잘 보여야겠다는 생각은 티끌만큼도 없나.
“원칙은 하나다. 내가 즐거워야 보는 사람이 즐겁다. 남이 뭐라든 내가 재밌는 게 먼저다. 그렇게 노는 힘이 가장 무섭다. 놀아본 사람이 창조도 할 수 있다. 딱히 뭘 이뤄야겠다는 각오도 없다. 야생의 잡초처럼, 외인구단처럼 산다(웃음). 나도 조직에 있었다면 선을 지키려고 노력했겠지.”
봉준호의 영화 ‘기생충’이 ‘선을 넘을 때’의 불쾌감을 환기했다면, 이희문의 소리는 ‘선이 허물어질 때’의 쾌감을 느끼게 해줬다. 하지만 선을 마구 넘으면서도 지키는 어떤 룰이 있지 않을까?
“있다. 가발 쓰고 여장하고 놀아도 소리는 올곧게 하려고 한다. 나는 창작도 안 한다. ‘긴난봉가’ ‘베틀가' ‘청춘가’… 다 원래대로 하고 있다. 레게, 록, 재즈와 컬래버레이션을 해도 리듬의 변주를 줄 뿐, 소리는 제대로 한다. 아는 분들은 그걸 안다.”
올곧은 민요 소리가 펑크, 테크노비트, 디스코, 글램록과도 잘 붙는다는 게 신기했다. 혹시 안 맞는 장르도 있나.
“헤비메탈은 안 맞는다. 그 장르엔 ‘키치’한 멋이 없다.”
과거에 타악기 주자 김대환 선생의 상가에서 장사익 선생이 부르는 ‘대전 부르스’를 들었다. 그때 잔칫집과 상갓집, 슬픔과 기쁨이 뒤섞이는 기묘한 느낌을 받았다.
“나는 그렇게 느낀다. 내가 하는 경기 민요도 딱 그렇다. 멜로디는 경쾌한데, 그 안의 텍스트는 절절하다. 말을 어떻게 씹느냐에 따라 감정이 확확 달라진다. 입은 웃는데 눈에서는 눈물이 난다.”
이희문이 처음부터 소리꾼의 길을 걸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27세 다소 늦은 나이에 경기 민요를 시작했다. 어머니인 고주랑 여사는 아들이 소리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고, 민해경과 마돈나를 좋아했던 그는 댄스 가수가 되고 싶었다. 2000년에 일본에 가서 3년간 뮤직비디오 공부를 했고, 돌아와서는 한동안 ‘강남스타일’로 B급 유행을 일으킨 김수현 감독 밑에서 조감독으로 일했다.
소리꾼의 길을 권한 건 어머니의 친구인 이춘희(경기민요 인간문화재) 선생이다. 우연히 이희문이 흥얼거리던 노래를 들은 이춘희 선생은 그의 독특한 음색과 흥을 알아차렸다. “너 소리 해라!” 그 소리를 27년 만에 처음 들었다. 운명에 이끌리듯 사사했다. 27년간 억압됐던 소리의 물꼬가 샘물 터지듯 몸 밖으로 흘러나왔다.
‘내가 이걸 왜 하는지’, 그 한 줄만 있으면 전통과 현대가 충돌 없이 풀린다고 했다. 스스로 무엇을 한다고 생각했나.
“나는 결핍되고 뒤틀린 자아를 그대로 표현했다. ‘나는 이런 사람입니다’라고. 일종의 자기 선언이고 치료 과정이었다. 신기한 건 내가 나를 위로하는 모습에 다른 사람도 위로를 받더라. 이젠 대중에게 즐거움과 힐링을 주는 단계가 된 것 같다.”
‘노들강변’을 가장 좋아한다고.
“어머니가 부르는 민요 스타일을 좋아한다. 어머니가 ‘노들강변’을 잘 부르신다. 소리는 그 사람의 성품과 닮는다. 어머니가 굉장히 강하고 또 남한테 베풀기를 좋아한다. 어쩌면 당신이 받지 못한 영광을 내가 누리는가 싶기도 하다. 고백하자면 내 결핍의 실체는 어머니다.”
성년도 유년의 연장이니까.
“미해결 과제를 그냥 가슴에 품고 가는 거다. 아버지는 일찍 암으로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가장 역할을 하느라 늘 바쁘셨다. 나는 외할머니 손에 컸다. 어머니를 많이 탓하고 미워했다(웃음). 그런데도 난 어머니가 부르는 ‘노들강변’이 참 좋다.”
“노들강변 봄버들 휘휘 늘어진 가지마다/ 무정세월 한 허리를 칭칭 동여 매어볼까/에헤요 봄버들도 못 믿을 이로다…” 이희문이 노들강변을 불렀다. 낭창하게 휘어지는 소리가 봄버들처럼 마음을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