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 영혼은 조금씩 불안을 품고 있다. 시시함을 품을 만큼 너그럽다. 시시함을 감싸 안지 않고서는 일상을 살아갈 수 없다.
다정한 영혼은 조금씩 불안을 품고 있다. 시시함을 품을 만큼 너그럽다. 시시함을 감싸 안지 않고서는 일상을 살아갈 수 없다.

어쩌면 나는 그럴듯한 사랑 이야기에 중독된 채 살았는지도 모른다. 강렬한 사랑을 찾아 헤맸고 또 그러한 사랑의 서사 속을 살아가고자 했다. 세상에 시시한 사람은 없지만, 시시한 선택과 시시한 행동과 시시한 이야기는 존재한다고 믿었다. 우리가 하찮음으로 존재가 하락하는 때는 바로 하찮은 이야기에 가두어졌을 때, 그 이야기를 어떻게든 구원하기 위해 분투하지만 그 분투가 결국 나도 또 서사의 다른 상대방도 우리의 이야기도 구원할 수 없음을 투항하듯 인정할 때라고 믿었다.

운이 좋았던 건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럭저럭 나 스스로는 그 존엄을 인정할 수 있는 사랑과 또 그러한 상대를 만나 몇 차례 긴 연애를 했다고 믿어 왔다. 한때는 그 믿음으로 나의 존엄을 버티기도 했다. 결혼의 마감 또한 고통과 갈등의 긴 시간이 있었음에도 서로의 존엄을 해하지 않고 지날 수 있어 다행이라고 여겼다. 나에게 사랑만큼 중요한 건 나와 그의 존엄이었고 어쩌면 그걸 해하는 순간, 지난 사랑조차도 절망으로 떨어질 것 같아 두려웠다.

사랑이 바닥을 치고 고통을 뒹구는 순간조차도 존엄이란 있다. 그 모든 절망의 말들을 관통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겪는 고통보다 더 큰 상대의 고통을 보고 언젠가는 서로 용서할 것을 믿고 지금의 진흙탕이 언젠가는 마르고 굳어서 밟고 지나갈 땅이 되리라는 것을 예감하는 일이 그러했다. 비록 결말을 향해 달려가고 있지만, 한때의 진실했던 마음과 뜨거웠던 용기와 삶을 뒤흔들었던 선택으로 우리가 함께했음을 믿을 수 있다면, 그 확고한 신뢰가 있다면 가능한 일이었다. 헤어지는 누군가를 붙잡고 과거의 사랑을 심문하지 않을 수 있는 것, 적어도 너와 나는 사랑했노라고 깊은 침묵으로 인정하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의 서사를 지키는 존엄이었다.

살면서 사랑했다고 기억되는 사람이 대부분인 건 아니다. 지우고 싶고 떠올리기만 해도 짜증 나는 만남 또한 별수 없이 있었다. 잊고 싶은 기억은 대체로 이별조차 시시했다. 뜨거운 시작은 수월하지만 존엄한 이별은 얼마나 드문지. 그리고 사실 이별의 존엄이 관계와 사랑의 존엄을 최종적으로 보장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결말이 나쁘면 앞선 이야기 또한 나락으로 떨어지기 일쑤였다.

물론 제대로 사랑하고 사랑받은 시간 그 자체가 있다면, 갖은 험난한 여정에도 불구하고 지난 사랑에 대한 예의를 다하려는 마음이 이별의 순간에도 이어졌다. 찬란한 기억 앞에 무너지는 서로를 연민하여 어느덧 사랑과 이별의 여정을 함께했던 서로를 그 모습 그대로 인정하게 되는 과정을 가깝든 멀든 겪게 되었다.

그리고 그와 같이 마무리된 사랑은 시작에서조차 용감했음을 이제는 안다. 사랑인지 사랑이 아닌지 가늠하고 재고 머뭇거리면서 사랑이 시작되는 눈부신 시간을 모조리 허비하지 않았다. 망설이는 시간이 지나치게 길어지면 관계는 그 자리를 벗어나는 법을 잊어버린다. 이야기는 거기서 지지부진 맴돌다 스러진다. 사랑에 있어서는 성실함도 필요하지만 도약의 용기와 행위가 필요하기 마련이다. 사랑은 용맹한 영웅적 행위와도 같아서, 사랑하는 이들을 투사로 만들고 삶의 주인공으로 이끌어내며 사랑을 통해 삶을 뒤바꾸고 갱신하며 일어나게 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랑은 사랑이 끝난 뒤에도 온전한 폐허를 맞이하게 하며 결국은 우리를 그 폐허를 딛고 일어서는 사랑의 영웅으로 부활시킨다. 제대로 사랑한 사람이 또다시 사랑하게 되는 일을 종교처럼 믿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리고 부활과 재생의 에너지는 사랑하고 사랑받은 기억에서 비롯된다. 사랑을 통해 우리가 배우는 것은 오로지, 사랑에 대한 확신이자 사랑을 관통하여 나아가는 삶을 향한 믿음이다.


시시함마저 사랑할 수 있는 용기

그렇지만 삶이 사랑을 가두기를 거듭할 때, 사랑이 도무지 그 삶을 헤어날 수 없을 때, 삶과 사랑이 반목할 때 우리의 사랑은 어떻게 될까. 삶이 자꾸 우리를 시시하게 만들 때, 사실 시시함의 대부분으로 삶이 채워지고 있고 사랑 또한 그 삶의 일부라는 걸 인정해야만 할 때가 있다. 요새는 부쩍 이런 생각이 든다. 어쩌면 서로의 시시함마저 사랑하고 나아가는 것 또한 때로는 용기이자 용맹함이 아닐까. 물론, 그 시시함이 이야기의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되겠지만. 시시함은 일상을 꾸리는 동전 같은 것은 아닐까.

“내가 먼저 좋아해서 쫓아다닌 거였어. 맨날 오빠 집 앞까지 가서 기다리곤 했었어.”

얼마 전에 어릴 적부터 친하게 지낸 친구로부터 그녀의 남편을 만나게 된 이야기를 조금 다른 버전으로 들었다. 두 사람은 대학 시절 동아리 활동으로 만났는데, 열렬했던 첫사랑이 혹독하게 끝나버려 그녀가 무척이나 힘들어했던 시절이었다. 나는 두 사람이 모임을 통해 조금씩 가까워진 줄 알았기에, 그녀의 뒤늦은 고백은 의외로 다가왔다.

그토록 가깝게 지내던 사이였던 우리는 첫 번째 연애의 참혹한 결말을 동시에 앓고 난 뒤 서로의 연애에 되도록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간섭도 하지 않았다. 도움이 필요하면 응해줬지만 질문을 던지는 일은 고통스러워 암묵적 동의처럼 피하며 지냈다. 가끔 그녀가 밤늦게 내게 전화를 걸어 부탁했다. 엄마에게 나와 있다고 거짓말했다고. 확인 전화 오면 잘 둘러대 달라고. 귀찮았지만 그녀의 부탁이라 거절할 수 없었다. 그녀가 방황 중이라고 생각했다. 첫사랑의 결말은 그녀에게 너무나도 잔혹했으니까.

그녀의 외박이 이어졌다. 몇 년 뒤 그녀는 파리에 있던 나를 방문했고 이후 오랜 외박의 상대였던 남자와 결혼해서 지금까지 안정적인 결혼 생활을 이어오고 있다. 그럼에도 나는, 나도 모르게 항상 그녀가 그를 남성으로 사랑한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정말? 네가 좋아해서 쫓아다닌 거라고?”

“응, 처음에는. 나중에는 그 사람이 더 좋아해서 포기하지 않으려고 한 거지만.”

“몰랐어. 네가 이성으로서도 그 사람을 좋아한다고는 생각 안 했어.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조금 다른 감정이긴 했어. 착하고 다정한 사람이니까, 그 사람과 있으면 마음이 놓였으니까. 난 말이야, 그 사람의 시시한 다정함이 좋았어. 과장되지 않고 사소해서 잘 들여다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그런 일상의 다정함 말이야. 이전에 사귀었던 사람이 내게 준, 세상을 다 바칠 것 같은 열렬한 다정함이랑 다른 종류의 것.”

지금의 나는 여전히 그녀 곁을 지키는 그에게 감사하지만, 하물며 그녀가 그토록 필요로 했을 안정과 다정을 짐작하지만, 우리가 살아온 삶이 얼마나 달랐는지 스무 살 여자 둘이 마흔을 넘어가기까지 어떤 빛깔로 굴렀는지, 가까웠기에 제대로 볼 수 없었던 건 아닌가 생각한다. 재발견하듯 그녀를 다시 보고 지난 삶을 궁금해한다. 우리에겐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다정한 영혼은 조금씩 불안을 품고 있다. 시시함을 품을 만큼 너그럽다. 물 위를 흔들흔들 떠다니듯 다정한 물결 같은 부드러움은 불안을 안고 있다. 불안을 알지 못하면 다정함에 이를 수 없다. 시시함을 감싸 안지 않고서는 일상을 흘러갈 수 없다. 이제는 나 역시 그것을 짐작할 수 있다.


▒ 이서희
서울대 법대를 마치고 프랑스로 건너가 영화학교 ESEC 졸업, 파리3대학 영화과 석사 수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