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포지타노 전경. 독일의 명(名)피아니스트 빌헬름 켐프가 62세 때인 1957년 건물을 구입하고 1991년 사망할 때까지 많은 시간을 보낸 곳이다.
이탈리아 포지타노 전경. 독일의 명(名)피아니스트 빌헬름 켐프가 62세 때인 1957년 건물을 구입하고 1991년 사망할 때까지 많은 시간을 보낸 곳이다.

이탈리아 나폴리 공항에서 차를 타고 구불구불 이어지는 산등성이를 한 시간가량 달렸을까. 마치 술에 살짝 취한 듯 멀미에 정신이 몽롱해질 때쯤 눈앞에 탁 트인 바다 수평선이 나타났다. 도로 옆, 깎아지른 듯한 절벽 아래로는 시원하게 파도가 부서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고개를 조금 들어 올리자 이탈리아의 뜨거운 태양 아래 코발트 색을 발하는 지중해와 하늘 높이 솟아오른 베수비오 화산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황홀한 풍경에 넋이 나가 시간 가는 줄 모르는 동안 목적지에 도착했다. 깎아지르는 절벽 능선에 색색의 옷을 입은 빌라, 성당, 레몬나무가 가득한 곳. 도착한 곳은 아말피 해안에 자리한 포지타노다.

여행객들이 휴양지에서 입을 옷가지를 가득 담은 가방을 차에서 분주히 꺼내는 동안 필자는 악보를 한 움큼 챙겨 내렸다. 휴양지에 어울리지 않는 긴장되는 마음을 부여잡고 말이다. 이는 곧 예정된 연주 때문이었다.

연주 장소는 포지타노 한쪽에 위치한 빌헬름 켐프(Wilhelm Kempff)의 빌라. 빌헬름 켐프는 독일의 명(名)피아니스트로 20세기 최고의 피아니스트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켐프는 베토벤, 슈만, 브람스 등 독일 출신 작곡가의 음악을 제대로 해석한 최고의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는 1991년 생을 달리했지만, 지금도 전 세계 수많은 클래식 음악 팬과 음악 전공자의 사랑을 받고 있다. 필자는 어렸을 때부터 켐프의 음반을 한두 장씩 사 모았고, 현재 20장이 넘는 음반을 갖고 있다.

켐프는 62세 때인 1957년, 포지타노에 카사 오르페오(Casa Orfeo)라는 건물을 구입하고 사망할 때까지 이곳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현재 카사 오르페오는 ‘빌헬름 켐프 빌라’로 불린다. 켐프는 포지타노와 이 빌라에 엄청난 애정을 쏟았다고 한다. 이곳이 그의 삶에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빌헬름 켐프 빌라는 프랑스 화가 세잔의 작품에서 볼 법한 큐비즘(cubism·입체파)을 연상시킨다. 절벽에 서 있는 건물이 여러 블록으로 나뉜 정원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빌헬름 켐프 빌라는 연주가 열리는 메인 살롱이 있는 본채와 별채로 나뉘어 있다. 별채는 게스트 하우스, 빌헬름 켐프 재단 사무실 등으로 쓰이고 있다.


빌헬름 켐프.
빌헬름 켐프.

켐프는 베토벤의 음악을 탐구하고, 베토벤의 철학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1982년부터 포지타노의 빌헬름 켐프 빌라에서 ‘베토벤 아카데미’를 열었다. 켐프는 매년 학생들과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32곡을 연구했다. 학생들과 그릴 파티도 하고 바닷가에서 수영을 즐기는 등 소박한 일상도 함께 나눴다.

연주를 앞두고 아네테 본 보데커(Annette von Bodecker) 여사를 만났다. 보데커 여사는 반 평생 켐프의 비서로 일했다. 현재 빌헬름 켐프 재단을 이끌며 이 빌라에 담긴 켐프의 혼을 지켜가기 위해 애쓰고 있다. 보데커 여사는 켐프와의 기억을 회상할 때면 어린 소녀와 같은 눈망울을 반짝였다. 그녀는 “켐프는 늘 자연과 하나가 되길 원했던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음악에도 켐프의 마음이 투영돼, 그의 연주는 바닷물이 백사장을 찰싹거리고 바람이 숲을 가르듯 자연스럽기 그지 없었다고 했다.

보데커 여사와 담소 후 살롱에서 리허설과 연주가 진행됐다. 살롱에는 켐프가 사용했던 스타인웨이 콘서트 그랜드 피아노가 있었다. 건반을 누르자 켐프의 온기가 마음으로 전달되는 듯했다. 어렸을 때 감동을 줬던 음반을 만든 이의 악기를 연주하니 마음 한편에 설명할 수 없는 뭉클한 감동이 몰려들었다.

켐프가 세상을 떠난 뒤, 보데커 여사와 여러 음악가가 그의 정신을 이어받고 지켜나가기 위해 애쓰고 있다. 켐프가 이끌었던 베토벤 아카데미는 피아니스트 게르하르트 오피츠, 존 오코너 등이 바통을 이어받아 진행하고 있다. 또한, 독일에서 활동 중인 피아니스트 윤홍천이 빌헬름 켐프 재단의 일원으로 활동 중이다. 대한민국 출신의 음악가로서 반갑고 자부심이 드는 일이다.


▒ 안종도
독일 함부르크 국립음대 연주학 박사, 함부르크 국립음대 기악과 강사


Plus Point

함께 감상하면 좋은 음반

빌헬름 켐프
베토벤 소나타
피아노 빌헬름 켐프

빌헬름 켐프가 이탈리아 포지타노에서 ‘베토벤 아카데미’ 기간에 연주한 베토벤 후기 소나타 4곡이 수록된 음반이다. 고전 시대에서 기악 독주곡 중 가장 규모가 큰 곡인 29번 하머 클라비어 소나타부터 베토벤의 음악 세계가 집대성된 소나타 30번, 31번 그리고 32번이 담겨 있다. 켐프는 살아생전, 포지타노의 자연이 베토벤과 닮았다고 했었다. 포지타노에서 연주한 베토벤의 곡이 어떨지 생각하며 감상해 보길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