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8년 러시아의 작곡가 표트르 차이콥스키(Pyotr Tchaikovsky)가 레만호 앞에 자리한 로잔 근교 클라렌스(Clarens)에 머물며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바이올린 협주곡 작품번호 35를 작곡했다고 전해진다.
1878년 러시아의 작곡가 표트르 차이콥스키(Pyotr Tchaikovsky)가 레만호 앞에 자리한 로잔 근교 클라렌스(Clarens)에 머물며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바이올린 협주곡 작품번호 35를 작곡했다고 전해진다.

새벽 5시 알람에 겨우 뜬 눈을 비비며 일어나서 여권, 악보, 짐가방을 챙겨 서둘러 함부르크 공항으로 향했다. 오늘은 스위스 로잔으로 향하는 날이다. 오래 알고 지낸 한 첼리스트와 곧 듀오 연주가 있을 예정이다. 그 친구가 지내는 로잔에서 연습에 몰입하자고 결의를 다졌다. 비행기에 탑승한 지 1시간이 조금 더 지났을까, 북독일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깎아지른 듯한 산봉우리들이 창밖으로 끝없이 펼쳐졌다.

제네바 공항 착륙 후 경전철을 타고 로잔으로 향했다. 익숙한 독일어 대신 머리 위 스피커에서 나오는 경쾌하고 부드러운 프랑스어가 낯설게 다가온다. 차창 밖으로 완만한 구릉지대에 와인밭이 펼쳐져 있고, 그 뒤로는 레만호, 그 위로는 알프스 산맥의 봉우리가 자리 잡고 있다. 심장 박동 수가 빠르게 반응한다.

이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있으면 지난 며칠 괴롭게 연습했던 어려운 연주곡의 일부분조차 다시 콧노래로 흥얼거릴 수 있다. 이윽고 로잔역에 마중 나온 첼리스트 친구와 반갑게 포옹했다. 스위스 현지인인 그를 통해 4일의 체류 기간에 이 지역의 음악적 토양도 더욱 깊게 이해할 수 있었다.

로잔은 꽤 가파른 구릉지대에 자리 잡아서 도시 어디서든 푸르른 레만호를 조망할 수 있다. 시간과 위치에 따라 호수에 비치는 빛이 각기 다르다. 도시를 산책하는 동안 몇 번이나 탄성을 질렀을 정도의 빛깔이다. 필자만의 생각이 아니었음이 분명한 것이, 스위스를 대표하는 화가 페르디난드 호들러(Ferdinand Hodler)는 레만호를 주제로 여러 작품을 남겼다. 작품에 그가 담아낸 숭고함의 가치는 세기를 넘어선 지금도 전 세계 미술 팬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1878년에는 러시아의 작곡가 표트르 차이콥스키(Pyotr Tchaikovsky)가 레만호 앞에 자리한 로잔 근교 클라렌스(Clarens)에 머물며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바이올린 협주곡 작품번호 35를 작곡했다고 전해진다. 이곳에 오기 전 그의 제자이기도 했던 안토니나 밀유코바(Antonina Miljukova)와 짧았던 결혼 생활이 파탄 났고, 당시 사회적 죄악으로 여기던 동성애적 기질을 발견한 시기였다.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그는 육체·정신적으로 힘든 시기를 보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클라렌스에서 체류하면서 빠르게 쾌유했다. 조용하고 아름다운 자연환경이 그의 음악적 상상력을 자극하면서 짧은 시간 안에 협주곡을 완성했다. 서정, 재치, 우수를 가득 머금은 이 협주곡은 현대 공연장에서 자주 연주되는 주요 곡목으로 이름을 올린다.


언제나 클래식 울려 퍼지는 스위스 가정집

이 외에도 20세기 독일 작곡가 폴 힌데미트(Paul Hindemith)는 차이콥스키가 머물렀던 클라렌스에서 차로 약 10분 떨어진 블로네(Blonay)에 1953년부터 거주하며 창작활동을 이어 나갔다고 전해진다. 또 바로 옆 근교에 자리한 브베(Vevey)에는 20세기 초중반을 풍미했던 루마니아 출신 여류 피아니스트 클라라 하스킬(Clara Haskil)이 나치의 박해를 피해 이곳에서 연주활동을 이어 나갔다고도 한다.

로잔 체류 기간에 친구와 리허설하면서 흥미로웠던 점은 그의 이웃들이 자신의 집에서 리허설해주길 바랐다는 것이다. 유럽에서도 손에 꼽히는 문화 강국에 부유한 환경 덕인지는 몰라도 수많은 가정이 미국과 독일의 수제 피아노 브랜드의 그랜드 피아노를 보유하고 있다. 그들은 지역 예술가들을 초대해 거실에서 하우스 콘서트를 연다. 그들은 집에서 음악이 쉼 없이 흘러나오길 원한다. 친구가 말하길, 연주가 끝나면 로비에서 관객과 종종 담소를 나눌 기회가 있는데 모두 ‘언제든 집을 내어줄 테니 연습하러 와 달라’고 부탁한다고 했다.

실제로 하루는 그의 이웃의 부탁으로 리허설하러 그 집에 갔는데, 레만호가 내려다 보이는 근사한 빌라 응접실에 수준급의 뵈젠도르퍼(오스트리아의 명품 피아노 브랜드) 피아노가 놓여 있었다. 이곳에서 종일 연습하면서 음악에 빠져들 수 있었다. 또 우리의 연습을 지켜보며 흐뭇해하던 집 주인 할머니의 얼굴도 잊을 수 없다. 이것이야말로 음악을 향한 그들의 존중과 사랑이고 적은 인구에도 세계적인 문화 강국을 일구어낼 수 있는 그들의 힘이 아닐까 생각했다.


▒ 안종도
독일 함부르크 국립음대 연주학 박사, 함부르크 국립음대 기악과 강사


Plus Point

함께 감상하면 좋을 음반

표트르 차이콥스키
라장조 작품번호 35
바이올린 야사 하이페츠(Jascha Heifetz)

차이콥스키는 이 곡을 1873년에 완성한다. 그는 바이올리니스트 레오폴드 아우어(Leopold Auer)에게 초연(初演)을 부탁했지만, 거절당한다. 솔로 부분의 난해한 기교가 곤란했기 때문이었다. 차이콥스키는 곡을 수정해 1879년 뉴욕에서 피아노와 합주로 초연을 마쳤다. 오케스트라와 바이올린을 위한 정식 초연은 아돌프 브로드스키(Adolph Brodsky)의 협연과 한스 리히터(Hans Richter)의 지휘 그리고 빈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1881년 12월 4일에 진행됐다. 이후 관객의 폭발적인 반응과 함께 클래식 문헌 명작의 반열에 올랐다. 러시안 바이올리니스트의 대가 야사 하이페츠의 음원을 소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