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런던에서 차로 2시간쯤이면 도착하는 ‘세븐 시스터즈’의 아찔한 절벽. 사진 이우석
영국 런던에서 차로 2시간쯤이면 도착하는 ‘세븐 시스터즈’의 아찔한 절벽. 사진 이우석

영국은 한국보다 북위가 높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란 영국의 별명은 한때 수많은 침략전쟁을 통해 곳곳에 식민지를 둬서 붙었지만, 실제 영국은 여름철 해가 빨리 지지 않는 나라다. 10월쯤엔 이런 상황이 바뀐다. 해가 일찍 지고 늦게 떠오른다. 오후 예닐곱 시쯤 길고 푸르스름한 석양을 드리운 런던 트래펄가 광장에는 아쉬운 볕을 조금이라도 더 받으려는 런더너(Londoner·런던 사람)로 가득 찬다. 이때 관광객은 일제히 펍(pub·선술집)으로 모이고 웨스트엔드 뮤지컬 극장 앞에 긴 줄을 드리운다. 이것이 런던의 가을 일상이다.

고풍스러운 건물 사이로 새빨간 더블데커(이층버스)와 정감 있는 블랙캡(택시)이 질주한다. 런던은 미국 뉴욕 이상으로 인종(人種) 전시장 같은 거리 풍경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프랑스 파리와도 뉴욕과도 다르다. 더 자유롭다. 매일 우산을 들고 다니는 사람도 있고 마차를 끄는 마부도 있다. 알록달록한 ‘마술사 모자’를 쓴 남자도 있다. 홍차와 스콘을 먹은 후 에일(Ale·영국식 맥주의 일종)이 그득한 머그잔을 기울인다. 스치며 지나는 런더너 특유의 강한 ‘티(T)’ 발음이 똑똑히 들린다. ‘그들처럼’ 펍에 서서 걸쭉한 에일을 마신 것이 런던에서 가장 먼저 한 일이었다. 말쑥한 차림새는 아니 었지만 꽤 여유있게 ‘영연방의 심장’에 적응할 수 있는 방법이다.

런던은 나도 모르게 친숙하게 다가와 있었다. 근대 이후 수많은 영화·음악·소설 등 대중문화의 배경으로 내게 주입됐다. 비틀스가 녹음했던 애플 스튜디오가 있던 애비로드(Abbey road)에서 단순히 횡단보도를 한 번 건너보는 것만으로도 꽤 훌륭한 여행의 추억을 남길 수 있는 곳이 런던이다. 한낮 내내 수많은 ‘중국인 비틀스’가 길을 건너고 있었지만 그래도 신선했다.

“왓슨, 베이커가 221B로 와주게.” 셜록홈스가 살았던 상상 속 그 집은 실재한다. 의뢰할 것은 딱히 없었지만 막상 문 앞에 접근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베이커가에 위치한 홈스의 집 두꺼운 나무문 앞에는 그를 찾아온 중국인 단체와 꼬마 의뢰인들이 온종일 진을 치고 있었다. 바로 이곳에 셜록홈스 박물관이 있다.

또 하나의 낯익은 풍경. 차를 타고 템스강 강변북로를 달리다 보면 서쪽 강둑에 당당히 선 녹색 건물이 눈에 익다. 이곳은 이언 플레밍의 007이 ‘내근’일 때 출근하는 곳으로 유명한 영국 비밀정보부 MI6 본사 건물이다. ‘비밀정보부’라지만 누구나 이곳이 MI6임을 알고 있다. 택시를 타고 “비밀정보부에 가자”고 하면 바로 데려다주는데 그것이 왜 비밀일까. 낡은 폐공장 지하나 토굴 속에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패션 브랜드 ‘빅토리아 시크릿’이 절대 ‘비밀’스럽지 않은 것처럼 MI6 역시 지극히 ‘대중적인’ 명소다.

런던에서 근교를 둘러보자면 추천하고 싶은 곳은 브라이턴이다. 런던에서 남쪽으로 차를 타고 2시간쯤 달리면 닿는 해안 휴양도시다. 풍경은 미국 LA 샌타모니카를 쏙 뺐다. 해변 언덕 아래 도로를 따라 늘어선 상점가와 바다로 길게 뻗은 피어(pier·부두), 값비싼 물가 등 많은 부분이 닮아 있다. 18세기 중반 빅토리아 시대에 휴양도시로 개발된 곳이다. 조지 4세 별궁이 들어서고 귀족과 부자들이 앞다퉈 이곳에 집을 짓고 왕의 이웃이 됐다. 19세기 중반 런던~브라이턴 간 철도도 놓였다. 영국인은 이곳 몽돌해변에서 일광욕과 수영을 즐긴다. 브라이턴 피어는 유원지처럼 오락거리가 있어 가족 단위 관광객이 즐겨 찾는다.

한국 해변에도 맛있는 생선구이집이 있듯 브라이턴에도 피시앤드칩스를 아주 잘하는 집이 있다. ‘뱅커스(Bankers)’란 곳인데 작은 대구 한 마리를 통째로 튀겨 내온다. 피시앤드칩스는 영국이 자랑하는 몇 안 되는 음식이다. 사실은 산업혁명 당시 사용자들이 노동자의 점심시간과 비용을 줄여보려고 고안한 싸구려 음식이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뱅커스’의 대구 튀김은 소문대로 맛이 좋았다. 맥주와도 잘 어울렸다.

브라이턴 인근에는 여고생 폭력서클과 비슷한 이름의 명소가 하나 있다. 바로 ‘세븐 시스터스(일곱 자매)’다. 영국 해협에서 뚝 잘려진 석회암 절벽지대다. 해안선 위로 빙벽처럼 새하얀 절벽이 매우 우람하다. 바다를 병풍처럼 막아선 이 7개의 절벽(사실 8개라고 한다)의 최고 높이는 해발 160m. 수직으로 잘린 듯 아찔하다. 이 단호한 절벽처럼 유럽과 영국은 이혼을 하는 것인가? 프랑스를 향해 선 절벽은 냉정할 정도로 수직이다.

도립공원 격인 ‘세븐 시스터스’는 입구에서 트레킹을 해 오를 수 있다. 안내센터로부터 평평한 초지를 따라 걷다 보면 갈림길이 나온다. 완만한 언덕을 올라 절벽 위로 곧장 가는 방법과 아래 해변을 보고 난 후 급경사 오르막길을 따라 절벽에 가는 방법이다. 둘 중 어느 길을 선택해도 그리 힘들지는 않다.

아찔한 절벽 끝까지 아무런 안전펜스나 위험경고판이 없다. 누군가 절벽 끝에 걸터앉아 사진을 찍고 있다. 절벽에 엉덩이를 걸치고 두 발은 허공을 휘젓고 있다. 보는 사람도 아찔해 발바닥이 쪼그라든다.

가장 높은 절벽은 ‘녹차가루를 뿌린 크림 케이크’처럼 생겼다. 많은 이가 절벽 위에 누워 마지막 하절기 햇볕을 즐기고 있다. 시원한 바람과 파도 소리, 그리고 바닷냄새. 바다 너머엔 프랑스가 있다.


역사 보려면 ‘대헌장 기념탑’으로

자연 대신 역사를 보고 싶다면 대영박물관도 좋지만, 공항 가는 길에 ‘대헌장 기념탑’을 봐도 좋다. 영국은 제국주의 침략 시대의 과실도 많았지만, 어쨌든 ‘근현대 민주주의’의 역사를 이끈 나라다. 영국은 군주에게 “법대로 하자”며 문서(대헌장)에 사인을 받은 최초의 군주국가다.

법치주의의 기초가 된 ‘대헌장(Magna Carta)’은 804년 전에 작성됐다. 1215년 존 왕의 폭정에 대항해 귀족들이 런던 시민의 지지를 등에 업고 왕과 대결했다. 귀족의 문장이 새겨진 깃발을 나부끼며 템스 강변에서 존 왕을 만나 양피지에 ‘칙허장’을 받았다.

‘의회 승인 없이 과세할 수 없고 재판 없이 사람을 처벌할 수 없다’는 등의 조항은 각 국가 근대 헌법의 기초가 됐다. 대헌장이 승인된 곳은 그냥 넓은 허허벌판이다. 몇몇 금속 조형물이 서 있는 것 이외엔 아무것도 없다. 다만 미국변호사협회에서 ‘자신들의 일자리를 마련해 준’ 대헌장을 기념해 작은 기념석조 건물을 지어놓았다.

비록 축구를 보지 않는다고 해도 영국 남부 여행에선 건질 것이 많다. 짧은 일정이어도 한 번에 둘러볼 수 있는 다양한 자연·역사·문화가 존재하는 곳이다.


▒ 이우석
성균관대 미술교육학과, 전 여행기자협회 회장, 16년째 여행·맛집 전문 기자로 활동 중


여행수첩

가는 길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 영국항공이 인천~히스로(런던) 구간을 운항한다. 약 12시간 소요. 런던에서 ‘세븐 시스터스’로 가려면 브라이턴을 거친다. 런던 빅토리아역이나 런던브리지 역에서 브라이턴행 기차를 타면 약 1시간이면 도착한다. 차로는 2시간쯤 걸린다. 브라이턴역 인근 처칠스퀘어 버스정류장 E에서 12번과 12A, 12X번 버스를 타고 ‘세븐 시스터스’역에서 내리면 된다. 택시비가 비싸니 렌터카 운전도 좋다. ‘유로카(Europcar)’는 유럽 렌터카 시장에서 가장 높은 점유율(지난해 말 기준 약 25%)을 보이는 곳이다. 차종도 다양하고 보험 등 서비스도 신뢰할 만하다. 국내에선 퍼시픽에어에이젠시(PAA)에서 한국 총판매대리점(GSA)을 운영한다. 한국어 예약 홈페이지(www.europcar.co.kr).

통화 파운드(£). 1£는 9월 25일 현재 약 1495원이다. 전압은 240V이며 BF 타입(안전장치 포함 3구)의 콘센트를 쓴다.

겨울에 접어들면 비가 잦다. 겨울에도 그리 춥지는 않지만 으슬으슬하고 쌀쌀하다. 12월부터는 눈도 자주 내린다. 문의 주한영국관광청(www.visitbrita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