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뉴욕 출신의 여성 지휘자 카리나 카넬라키스. 영국 런던에서 매년 7월부터 9월까지 열리는 국제 클래식 음악 축제인 ‘BBC 프롬스 2019’ 개막 지휘를 맡았다. 현 네덜란드 방송교향악단 음악감독이다. 사진 한정호
미국 뉴욕 출신의 여성 지휘자 카리나 카넬라키스. 영국 런던에서 매년 7월부터 9월까지 열리는 국제 클래식 음악 축제인 ‘BBC 프롬스 2019’ 개막 지휘를 맡았다. 현 네덜란드 방송교향악단 음악감독이다. 사진 한정호

클래식 음악의 역사는 시대 변화를 반영하면서 발전해왔다. 21세기에 들어와 미국을 시작으로 유럽의 몇몇 오케스트라는 행정감독을 여성에게 맡겼다. 이를 계기로 백인 남성이 행정감독부터 음악감독(지휘자)까지 담당하던 오케스트라 생태계가 변하고 있다. 특히 여성들이 독일 베를린 필하모니 오케스트라 행정감독과 미국 뉴욕 필하모니 오케스트라 최고경영자(CEO·미국에서는 행정감독이 CEO)로 취임한 뒤, 이들이 각종 모임에서 젠더 이슈(성비 불균형 문제)를 언급하면서 양성평등은 클래식 음악계에서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과제로 부상했다.

최근 들어 서유럽 지역의 저명한 오케스트라를 중심으로 지휘자의 성비 불균형을 해소하는 방안이 잇달아 제시되고 있다. 지난 7월, 독일 바이에른에서 매년 열리는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의 행정감독인 카타리나 바그너는 오는 2021년 연출할 작품에 여성 지휘자를 기용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에 따라 2005년부터 2015년까지 독일 함부르크 극장 음악감독을 맡아 꾸준히 바그너 음악을 연구한 호주 출신 여성 지휘자 시모네 영(1961년생)이 첫 지휘를 맡을 예정이다.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은 1876년부터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의 오페라를 공연하는 행사로, 지금까지 여성 지휘자가 이끈 적이 없다. 클래식 업계에서 가장 보수적이라고 알려진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이 여성 지휘자에게 문을 열자, 세계적인 페스티벌도 앞다퉈 지휘자의 양성평등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영국 런던에서 매년 7월부터 9월까지 열리는 국제 클래식 음악 축제인 ‘BBC 프롬스’ 운영감독인 데이비드 피카드는 2022년까지 초연작의 50%를 여성 지휘자에게 할애하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앞서 BBC 프롬스는 여성 지휘자 마린 알솝(1956년생·현 상파울루 심포니 음악감독)에게 2013년 폐막 공연의 지휘를 맡겼다. 올해 BBC 프롬스 개막은 미국 뉴욕 출신의 여성 지휘자 카리나 카넬라키스(1981년생·현 네덜란드 방송교향악단 음악감독)가 맡았다. BBC 프롬스는 현재 가장 뜨겁게 주목받는 여성 지휘자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장으로 자리 잡았다.


성시연 전(前) 경기 필하모니 예술단장. 사진 한정호
성시연 전(前) 경기 필하모니 예술단장. 사진 한정호
호주 출신 여성 지휘자 시모네 영. 사진 한정호
호주 출신 여성 지휘자 시모네 영. 사진 한정호

프랑스는 여성 지휘자를 음악계와 대중에게 알리는 방안을 내놓았다. 프랑스 문화부는 국립 오케스트라가 운영하는 프로그램의 약 4%만을 여성 지휘자가 담당하고 있는 현실을 파악하고 이에 대한 개선을 지시했다. 이에 파리 필하모니는 2020년 3월 여성 지휘자를 대상으로 한 경연대회인 ‘라 마에스트라’ 콩쿠르를 열 계획이다. 차세대 스타 여성 지휘자를 배출하는 것이 대회의 목적이다. 프랑스의 저명한 악단은 이 대회 우승자에게 공연 기회를 줘야 한다. 파리 필하모니는 기성 지휘자와 신인 지휘자를 막론하고 참가 신청을 받아 최종 12명을 선발했다. 한국인 김유원과 최현도 이름을 올렸다.

프랑스 브장송 국제 지휘 콩쿠르는 올해 우승자로 일본 여성 지휘자 오키사와 노도카를 선정했다. 일본 아사히신문은 우승 배경으로 “독재형 지휘자 시대에서 다양한 개성을 부드럽게 묶는 협조형 지휘자 시대로 변화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나 콩쿠르를 지켜본 공연 관계자들은 그보다 오키사와가 경연 내내 단원들을 논리적으로 압도하는 리더십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지휘자는 단원들의 성향과 악단의 전통을 파악해 음악의 방향을 정한다. 지휘자의 임무를 수행할 때 ‘온건한 여성 리더십’과 같은 전통적인 성 역할은 존재할 구석이 없다. 거장(巨匠)으로 불리는 지휘자들도 지휘대에 오르는 순간, 남녀라는 자신의 성별을 잊고 치밀하게 음악을 이해하고 자신만의 카리스마로 단원들과 쉼 없이 기싸움을 벌이는 데 충실할 뿐이다.

현재 클래식 음악계에선 에마뉘엘 아임(1962년생)과 수잔나 말키(1969년생)가 각각 베를린 필하모니 오케스트라, 뉴욕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에 정기적으로 초청받으면서 1급 여성 지휘자로서의 입지를 다지고 있다. 한국에서는 성시연(1975년생) 전(前) 경기 필하모니 예술단장, 김은선(1980년생) 휴스턴 그랜드 오페라 수석 객원 지휘자, 장한나(1982년생) 트론헤임 오케스트라 음악감독이 국제 무대에서 활동 중이다.

그러나 여성 지휘자가 저명한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이 되더라도 이를 유지하는 것은 험난하다. 오케스트라 업계는 여성의 임신과 출산을 고려하면서까지 여성 지휘자로서의 커리어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멕시코 출신의 여성 지휘자 알론 드 라 파라(1980년생·현 퀸스랜드 심포니 음악감독)는 2010년대 중반까지 업계의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2016년과 2018년, 두 차례 출산하면서 예정된 공연을 마치지 못하자 점차 관심 밖으로 사라졌다. 오스트리아 그라츠 오퍼의 음악감독이었던 옥사나 리니프(1978년생)는 일과 가정생활을 병행하는 데 어려움을 토로하며 자리에서 물러났다.

클래식 업계가 진정한 양성평등을 이루기 위해선 신인 여성 지휘자가 커리어를 쌓는 현재의 방식에 문제가 없는지를 살펴야 한다. 현재 중견급이 된 여성 지휘자 중엔 남성 지휘자의 추천을 받아 오케스트라의 부지휘자 직위를 얻은 경우가 많다. 지휘자의 시작점이나 다름없는 부지휘자 자리가 남성 지휘자의 입김에 달린 것이다. 지금은 업계 거장인 남성의 추천을 받아야만 오케스트라의 작은 자리라도 잡을 수 있다. 객관적인 실력 평가보다는 음악가 개인이 통제할 수 없는 현재의 오케스트라 인력 채용 과정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