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끝이 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자신의 끝을 알 수 없다. 어쩌면 나는 미지의 끝을 보고 싶다는 욕망 때문에 소설을 읽는 게 아닐까. 좋은 작품을 만나면 소설이 끝나는 게 두려워 일부러 읽는 속도를 늦추거나 잠시 묵혀 뒀다 다른 날 다시 꺼내 읽는 사람들도 있다지만, 나는 한 번도 그래 본 적이 없다. 끝으로 향하는 길을 지연시키다니. 끝을 보는 것만이 소설을 읽는 이유는 아니지만 끝을 봐야만 소설을 읽은 것처럼 느끼는 내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소설의 끝은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근시(近視)의 인간에게 잠깐만 허락되는 신의 눈이다. 

왜 이렇게 끝을 보고 싶어 하는 거냐고 묻는다면, 제때 끝내지 못해 평생을 끌려다니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해야겠다. 끝내야 할 때 끝내지 못하거나 조금 더 기다려야 할 때 서둘러 끝내 버리는 바람에 끝이라면 괴롭고 아쉬운 기억이 대부분이다. 유종의 미는 대체 어디에 숨어 있기에 내 앞에는 이토록 나타나지 않는 걸까. 그런데 시작은 또 잘한다. 마구 일을 벌이고 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끝이다.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끝내야 할지 모르겠다. 아무리 좋은 작품도 적당한 곳에서 끝나지 않으면 태작(駄作)이 된다. ‘끝을 모르는’ 내가 소설의 엔딩을 차곡차곡 쌓아두려는 이유도 다른 데 있지 않다. 소설이 인생수업이라면 엔딩노트는 타의에 끌려다니지 않기 위한 끝내기 기술이다.

평론가로서 작품을 마주할 때는 가능한 한 많은 구조를 살피고 그 구조가 의도하는 메시지를 찾아내는 데 집중한다. 작가의 의도에서 작품의 가치를 발견하는 건 아니지만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고자 애쓰는 편이다. 편집자로서 작품을 볼 때는 좀 다르다. 답을 만들어 내기보다 다양한 질문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결말을 상상하려고 노력한다. 작품의 마지막은 작가에게 끝인 동시에 독자에게 새로운 시작이다. 작품이 독자에게로 넘어오는 사이에 끝이 있다. 편집자 9년 차이자 평론가 5년 차의 노트에 담고 싶은 불멸의 엔딩들. 우리 곁을 스쳐간 수많은 엔딩을 목격하면 이런 나도, 그러니까 끝을 모르는 나도 조금 자라날 수 있을까.

어떤 마지막은 더할 나위 없이 희망적이었고 어떤 마지막은 믿고 싶지 않을 만큼 절망적이었다. 김혜진 작가의 ‘딸에 대하여’는 내가 편집한 소설 중 엔딩이 가장 아름다운 작품이었다. 전세금을 다 써 버린 탓에 집(house)을 구할 돈이 없는 딸이 엄마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딸과 딸의 동성 연인, 엄마, 엄마가 돌보는 독거노인이 누구 하나 소외되지 않고 머물 수 있는 집(home)에서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는 장면으로 끝난다. 자신이 있던 자리에서 밀려난 여성들이 한집에 모여 평화롭게 주말 오전을 보내는 이 장면은 다만 머무르는 공간으로서의 집을 장소로서의 집으로, 제도적 공동체로서의 가족을 정서적 공동체로서의 가족으로 전환시킨다.

조남주 작가의 ‘82년생 김지영’은 내가 편집한 소설 중 엔딩이 가장 절망적이었던 작품이다. 경력단절 여성으로 언어 상실이라는 이상증세를 보이는 김지영씨의 인생 이야기는 소설 안에서 일말의 완화나 모종의 치유도 없이 끝나 버린다. 작가는 이 결말을 두고 작중 인물에게 미안한 마음을 토로한 적이 있다. 방 안에 김지영씨를 두고 나와 문을 닫아 버린 것 같은 기분이라는 것이다. 더욱이 김지영씨의 증상을 보고서로 작성하는 의사는 환자에 대해 이야기하는 전문가로서의 의식과 간호사를 고용하는 고용주로서의 의식이 불화하는 모습을 보인다. ‘82년생 김지영’의 결말을 장식하는 의사의 에피소드는 인식과 현실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한계를 보여 준다.

엔딩이라 하면 흔히 해피엔딩이나 새드엔딩을 떠올리지만 대개의 엔딩은 행복하지도 슬프지도 않다. ‘딸에 대하여’의 따사로운 분위기는 해피엔딩이라는 말에 어울리는 것 같고 ‘82년생 김지영’의 절망적인 분위기는 새드엔딩이라는 말에 적합한 것 같지만 두 작품은 해피엔딩도 새드엔딩도 아니다. ‘딸에 대하여’가 바뀌지 않을 것 같던 사람이 바뀌게 되는 모습을 보여 주는 성장의 엔딩이라면 ‘82년생 김지영’은 많이 바뀌었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변하지 않은 것을 보여 주는 퇴행의 엔딩이다. ‘딸에 대하여’가 한 발짝 전진하는 끝이었다면 ‘82년생 김지영’은 한 발짝 물러서는 엔딩이랄까.

아무려나 해피엔딩과 새드엔딩은 끝에 대한 선입견만 키운다. 애당초 인생이 행복과 불행으로 존재하지 않는데 행복한 결말과 슬픈 결말 따위가 존재할 리 없다. 행복과 슬픔 사이 그 어딘가에 멈춰 선 수많은 엔딩이 있을 뿐이다. 돌이켜보면 내가 좀처럼 끝내지 못하는 이유도 해피엔딩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과 새드엔딩이어서는 안 된다는 불안 때문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모파상은 인생을 행복과 불행의 틀로 바라보지 않는다. ‘여자의 일생’ 마지막 문장은 인생에 관한 가장 냉소적이고 염세적인 대사일 것이다. “인생이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좋은 것도 그렇게 나쁜 것도 아닙니다.” 굴곡 많은 한 여성의 고통스러운 결혼 생활을 그린 이 작품은 모진 풍파를 다 겪은 잔느가 종내에 이르러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높지도 낮지도 않은, 희망적이지도 절망적이지도 않은 인생론을 들려주는 장면에서 끝난다.

잔느의 말처럼 우리 인생 대부분의 시간은 대단히 좋지도, 특별히 나쁘지도 않은 상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상태를 좋은 것과 나쁜 것 사이에서 규정할 필요가 없다. 그러니 끝이라고 해서 특별해야 할 필요는 없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엔딩이야말로 가장 좋은 엔딩일 수 있다. 가장 좋을 뿐만 아니라 가장 그럴 듯한 엔딩일 것이다. 우리 인생이 그런 것처럼.


▒ 박혜진
조선일보 신춘문예 평론 당선, 한국문학평론가협회 젊은평론가상


Plus Point

기 드 모파상 (Guy de Maupassant)

1850년에 태어났다.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이 발발하자 자원입대했으며 전쟁이 끝난 후 파리로 돌아와 플로베르의 소개로 에밀 졸라, 공쿠르 형제, 알퐁스 도데 등 여러 문인과 친분을 쌓았다. 특히 어머니의 친구였던 플로베르에게 사물에 대한 독창적인 관찰 방법과 정확한 표현 기법을 배웠던 것은 유명한 일화다. 모파상이 작가로서 두각을 나타낸 것은 졸라가 주축이 돼 만든 자연주의 작품집 ‘메당의 저녁’에 ‘비곗덩어리’를 발표하면서부터다.

모파상이 작가로서 집필 활동에 전념한 것은 10년 남짓에 불과한데, 이 기간에 무려 300여 편에 이르는 단편소설과 6편의 장편소설, 시집과 희곡 등을 쓰는 엄청난 집중력을 보였다. 1883년 무렵부터 눈병과 척추 통증 등으로 고통을 겪기 시작한 모파상은 과도한 지적 활동과 육체적 소모, 마약 사용 등으로 건강이 급속히 악화됐다. 1891년 마비 증세가 시작돼 집필 활동이 불가능해진 모파상은 다음 해에 자살을 시도한 끝에 요양원에 수용, 1893년 5월 간질성 발작으로 혼수상태에 빠져 7월에 43세 나이로 생애를 마감했다. 흔히 자연주의 작가로 소개되지만 서정적이고 시적인 문체가 빛나는 작가로 프랑스적 염세주의를 현대적 감각으로 표현해 냈다는 평가를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