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같은 크로아티아 자그레브 야경. 사진 이우석
그림 같은 크로아티아 자그레브 야경. 사진 이우석

항공권의 최종 목적지는 크로아티아 자그레브였고, 일단 터키 이스탄불을 거쳤다. 터키항공 기내에 앉아 있는 내내 ‘내가 아는 크로아티아인이 누구지’라는 스스로 내린 과제에 몰두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하이킥을 잘 차는 미르코 크로캅(UFC 선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당연히 이탈리아 출신으로 알았던 마르코 폴로(1254~1324)부터 에디슨을 능가했다는 발명왕 니콜라 테슬라(1856~1943)까지 이곳 출신이었다.

그만큼 크로아티아는 익숙한 이름은 아니다. 크로아티아 사람은 자신을 흐르바트스카(Hrvatska)라고 부른다. 발음조차 어려운 나라가 한국 여행객에게 큰 인기를 얻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이 나라는 1992년 유고슬라비아 연방이 해체되면서 생겨났다. 유고슬라비아 연방은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마케도니아 등 6개 국가로 분리됐다.

날씨는 춥고 흐렸다. 하지만 분위기는 화려하고 흥겨웠다. 영하의 날씨를 체온으로 덥히려는 듯 모두 우르르 몰려나와 즐기는 가운데 슬쩍 낄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었다. 자그레브 공항에 내려 ‘눈 내리는 대림절 조형물’과 마주치는 순간부터 가슴이 벅차올랐다.

이미 크로아티아는 한국인에게 ‘핫한’ 여행지다. 고색창연한 성곽이 둘러싼 중세풍 도시, 아드리아해의 아름다운 물빛과 옹기종기 모인 붉은 지붕의 멋진 색감 대비, 유럽연합(EU) 국가 중 가장 저렴한 축에 드는 물가와 맛있는 음식은 한국인의 여행지 선정에 굉장히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아무튼 11월부터는 대림절(Advent·성탄 전 4주간을 말함) 축제 기간이다. 크로아티아 수도 자그레브는 하나의 거대한 트리 장식처럼 변신한다. 연말까지 이어지는 축제를 즐기려고 도심으로 몰려나온 수많은 남녀와 그들에게 잡동사니와 데운 와인(Kuhano Vino)을 파는 노점 상인, 깔깔대며 스케이트를 즐기는 청소년들이 자그레브 시가지를 가득 메운다.

자그레브 대림절 크리스마스 시장은 도심 곳곳에 펼쳐진다.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실종된 한국과는 달리 온종일 캐럴이 흐르고 모두가 새로운 계절, 겨울을 즐긴다. 크리스마스 마켓에는 수공예품과 골동품, 꽃으로 만든 향수와 화장품 등 다양한 물건이 있지만 시원한 맥주와 따뜻한 와인이 가장 잘 팔리는 품목이다.

도시는 그리 크지 않아 몇 바퀴 걸어서 돌다 보면 끝이지만, 건물이나 장식 하나하나에 의미를 새겨 들여다보고 거리 공연을 즐기다 보면 이곳에서의 하루는 무척 짧다. 다만 사나흘 이상 머문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어제 봤던 사람을 같은 장소에서 다시 보고, 맥주와 데운 와인을 마시고 잡동사니를 구경한 후 다시 호텔로 돌아가고…. 같은 날이 반복되는 영화 ‘사랑의 블랙홀’처럼 매번 비슷한 일상일 것이다.

어퍼타운과 전망대는 강력히 추천할 만하다. 어퍼타운은 로워타운과 구분되는 개념으로 옐라치치 광장을 중심으로 위쪽으로 오르는 성곽 도시를 말한다. 광장에서 조금 올라가면 쌍둥이 첨탑이 우뚝한 자그레브 대성당이 있다. 전쟁, 화재, 지진 등으로 무너진 후 지금 모습으로 복원한 것이다. 어퍼타운으로 오르는 길은 좁은 골목 계단이나 ‘푸니쿨리’라고 불리는 짧은 트램 중 하나를 고르면 된다.

어퍼타운에는 색실로 짠 듯 예쁜 지붕을 얹은 성 마르코 성당이 있다. 골목 아래쪽에서도 아름다운 자태가 보인다. 마침 로트르슈차크 탑에서 낮 12시를 알리는 대포를 쏜다고 해서 서둘러 골목을 올랐다. 관광객이 탑 아래 모여있는 가운데, 곧 창문이 열리고 ‘펑’ 소리와 함께 허연 포연이 허공으로 퍼져나갔다. 낮 12시가 됐으니 점심을 먹으라는(?) 무시무시한 알람이다. 원래는 시간을 알리는 종이 있었는데 누가 종을 훔쳐 가는 바람에 지금은 대포를 쏜다고 한다. 이 대포마저 도둑맞는다면 미사일이라도 쏠 기세다.

가는 길에는 미술관과 박물관이 여럿 있다. 이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은 ‘이별 박물관(Museum of Broken Relationships)’이다. 관계 단절, 즉 이별을 테마로 한 박물관이다. 박물관은 작지만 볼거리가 많다. ‘떠난 그(녀)가 남기고 간’ 세계 각국에서 기증한 다양한 전시품은 하나같이 눈물겨운 사연으로 가득했다. 기특하게도 한글 자료도 제공한다.

한 네덜란드 여성의 전 남편이 17세에 사랑을 시작했을 때 줬다는 스누피 인형, 지금은 세상을 떠난 반려견이 가지고 놀던 햄버거 모양 장난감, 잠깐 만났던 ‘선수(?)’가 입고 팽개친 농구 셔츠도 전시돼 있다. 남녀 간 애정과 관련된 전시품만 있는 게 아니다. ‘자살한 어머니의 마지막 쪽지’도 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살던 H에게 그의 어머니는 마지막으로 짧은 덕담을 남겼고, H는 이별 박물관에 이를 기증했다.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가득한 크로아티아 자그레브 도심. 사진 이우석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가득한 크로아티아 자그레브 도심. 사진 이우석

자그레브 상징 성 마르코 성당

어퍼타운의 랜드마크인 성 마르코 성당은 자그레브의 상징이다. 삐죽한 탑 하나를 옆에 둔 새하얀 건물인데 벽에는 두 개의 문장이 그려져 있다. 하나는 크로아티아·달마티아·슬라보니아의 것이며 또 하나는 자그레브의 문장이다. 관문은 스톤게이트. 돌로 만든 굴다리에는 성모 초상이 있고 매일 신자들이 찾아와 촛불을 밝힌다. 18세기 대화재에도 성화가 훼손되지 않아, 성지가 됐다고 한다.

해가 일찍 진다. 어둑해지면 더 좋다. 자그레브 야경이 꽤 근사하기 때문이다. 다소 생뚱맞은 현대식 건물이 있는데, 그곳이 바로 전망대 구실을 하는 ‘자그레브360’이라 다행이다. 이곳에 오르면 조화롭지 않은 ‘자그레브360’ 자체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최고층 12층에는 카페가 있고 사방으로 펼쳐지는 자그레브의 화려한 야경을 둘러볼 수 있다.

자그레브 대학교 인근에는 미마라 미술관이란 곳이 있는데 아주 재미있다. 자칭 르누아르와 루벤스 등 세계적 거장의 명화를 비롯해 다양한 골동품과 예술작품을 전시해놓았다는데, 모든 작품을 아무런 장애 없이 볼 수 있다. 그 귀중한 작품을 마음대로 사진 찍고 손으로 만질 수 있다는 것이 정말 불가사의하다. 여행 가이드에는 이곳을 ‘위작(Fake art) 미술관’으로 소개하고 있지만, 미술관 측은 모두 진품임을 강조한다.

좀 더 여유롭게 아드리아해의 아름다움을 만끽하기 위해 두브로브니크로 갔다. ‘아드리아의 진주’로 불리는 곳이다. 크로아티아 이야기는 2편에서 계속된다.


▒ 이우석
성균관대 미술교육학과, 전 여행기자협회 회장, 16년째 여행·맛집 전문 기자로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