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도쿄의 산토리홀 외관. 사진 위키미디어
일본 도쿄의 산토리홀 외관. 사진 위키미디어

영국 클래식 전문지 ‘그라모폰’이 2008년에 ‘세계 최고 오케스트라’ 1~3위로 선정한 필하모닉이 지난 11월 일제히 일본 도쿄 산토리홀에서 공연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을 본거지로 하는 로열 콘세르트허바우 오케스트라(1위·지휘 파보 예르비)는 11월 18~19일, 독일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2위·지휘 주빈 메타)는 11월 20~22일, 오스트리아 빈 필하모닉(3위·지휘 크리스티안 틸레만)은 11월 5~15일에 산토리홀을 찾았다.

그뿐만 아니라 미국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독일 쾰른 방송교향악단은 물론, 일본 NHK 교향악단을 비롯한 일본의 정상급 악단 6곳이 11월 산토리홀에서 공연했다. 해외 오케스트라의 공연 대부분은 매진됐다.

일본 도쿄에서 클래식 음악의 중심지가 된 ‘산토리’의 이름은 위스키에서 나왔다. 일본 오사카의 주류 제조상 토리이 신지로(1879~1962)가 내놓은 위스키 이름이 산토리. 이후 토리이의 차남인 사지 케이조(1919~1999)는 회사명을 아예 ‘산토리’로 바꿨다.

어려서부터 클래식에 조예가 깊었던 사지는 기업의 이익을 소비자, 사회 그리고 회사를 위해 쓴다는 부친의 ‘이익 삼분주의’를 계승해 1969년 ‘토리이 음악재단’을 설립했다. 재단 이사로 참여했던 작곡가 아쿠타가와 야스시(1925~1989)는 클래식 전용 홀 설립을 제안했다.

사지는 아쿠타가와의 제안을 받아들여 베를린 필하모닉의 음악감독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1908~1989)에게 클래식 전용 홀의 건설 자문을 맡겼다. 카라얀은 베를린 필하모닉의 공연장과 동일하게 오르간을 갖춘 포도밭 구조의 산토리홀을 만들었다. 산토리홀 앞 광장은 1986년 10월 개관과 동시에 ‘카라얀 광장’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산토리홀은 훗날 일본 삿포로 기타라홀, 서울 잠실 롯데콘서트홀의 모델이 됐다.


산토리홀 내부. 베를린 필하모닉의 포도밭 구조를 모방했다. 사진 산토리
산토리홀 내부. 베를린 필하모닉의 포도밭 구조를 모방했다. 사진 산토리
오른쪽부터 게이조 산토리 회장과 산토리홀 건립 자문을 맡은 지휘자 카라얀. 사진 산토리
오른쪽부터 게이조 산토리 회장과 산토리홀 건립 자문을 맡은 지휘자 카라얀. 사진 산토리
2016년 산토리홀을 찾은 베를린 필하모닉. 사진 산토리
2016년 산토리홀을 찾은 베를린 필하모닉. 사진 산토리

클래식계에서 산토리홀은 음향으로 유명하다. 객석에서 듣는 소리의 안정감과 선명도, 홀 전체를 울리는 소리가 세계 최고 수준이다. 산토리홀을 다녀간 독일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오스트리아 빈 필하모닉 단원들은 산토리홀의 음향 장치를 칭찬했고, 이를 바탕으로 산토리홀의 명성은 단기간에 미국 카네기홀 수준으로 올라갔다. 독일 함부르크 방송교향악단 음악감독이었던 귄터 반트(1912~2002), 폴란드의 지휘자 스타니슬라프 스크로바체프스키(1923~2017)가 산토리홀에서 공연한 것도 공연장의 가치를 배가시키는 데 이바지했다.

그러나 기업 산토리가 공연장을 바라보는 관점은 조금 다르다. 이 기업은 산토리홀 건립을 통해 세계 어디에도 없는 새로운 클래식 향유 문화를 선도했다는 자부심이 크다. 토리이 음악재단은 산토리홀에 위스키 매장의 운영 노하우를 접목했다. 산토리홀에는 모든 것을 총괄 관장하는 총지배인이 있다. 산토리홀 직원은 관객이 마치 고급 호텔 라운지에 들어선 기분이 들도록 공연장 곳곳에서 노련하게 움직인다. 고객 불만 응대 서비스, 휴대전화 전파 차단, 휴식 시간에 저 알코올음료 허용 등 일본 내 클래식 공연 문화는 산토리홀이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구 음악계도 주목한 산토리홀의 저력은 1990년대 일본 경제가 휘청거릴 때도 흔들리지 않았던 운영 노하우에 있다. 보통 대기업 소유의 문화재단은 연간 운영비를 종잣돈의 이자 수익으로 마련한다. 반면 산토리홀은 대관 수입, 자체 기획 공연의 티켓 수익, 산토리 계열사의 기부금을 바탕으로 운영한다. 산토리홀에선 ‘빈 필하모닉 일본 주간’과 같은 기획 공연이 총공연의 약 20%를 차지한다.

산토리홀의 대관비는 시부야 도쿄 오페라 시티, 이케부쿠로 도쿄 예술극장보다 20% 비싸지만 도쿄에서 최우선 순위 공연장은 언제나 산토리홀이다. 대관 수요가 넘치기 때문에 5년 단위 개보수 작업을 야간에 한다. 가급적 휴관하지 않기 위해서다. 2019년을 기준으로 산토리홀의 연간 관객은 60만 명 이상이다. 누적 관객은 2000만 명을 눈앞에 두고 있다.

도쿄도는 일본이 저출산 초고령화 시대에 들어서면서 클래식 음악을 즐기는 인구가 더 늘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한다. 그렇기 때문에 공공 재원을 투입해 클래식 전용 공연장을 추가 건립할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 대신 산토리홀을 영국 런던, 미국 뉴욕, 프랑스 파리를 대표하는 일류 공연장과 비슷한 공연장으로 발전시킬 예정이다. 서울 강남에 클래식 공연장이 집중돼 있다며 강북에 클래식 공연장을 설립해 도시 불균형을 해소하려는 서울시와는 다른 접근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