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라이트 감독이 연출하고 키아라 나이틀리가 주연을 맡은 영화 ‘안나 카레니나(2012)’의 한 장면. 사진 유니버설픽처스코리아
조 라이트 감독이 연출하고 키아라 나이틀리가 주연을 맡은 영화 ‘안나 카레니나(2012)’의 한 장면. 사진 유니버설픽처스코리아

안나 카레니나
레프 톨스토이 지음│박형규 옮김│문학동네
1644쪽(전 3권)│3만8500원

숱한 소설가들이 국내외를 막론하고 최고로 꼽는 소설가 명단을 훑어보면, 내가 아는 범위에선, 러시아 작가 레프 톨스토이(1828~1910) 아니면 표도르 도스토옙스키(1821~1881)를 빼놓는 경우가 거의 없다. 동시대에 활동했던 두 작가를 비교한 연구서도 꽤 된다.

3년 전 박종소 서울대 노어 노문학과 교수가 일반 독자들과 함께 떠난 러시아 문학 기행을 취재한 적이 있다. 박 교수는 톨스토이의 무덤을 찾은 뒤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의 차이점을 설명했다. “도스토옙스키 소설의 인물들은 저마다 제 목소리를 내며 갈등을 빚는다. 톨스토이 소설은 작가가 전지적 시점에서 모든 인물을 내려다본다. 톨스토이는 주인공이 타인이나 외부의 대상을 마치 처음 본 듯 묘사하는 ‘낯설게 하기’ 기법을 애용한다. 불륜의 유혹을 느끼기 시작한 안나 카레니나가 남편을 보곤 뒤늦게 ‘저 이의 귀는 왜 저렇게 생겼을까’라며 낯설어 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서양 소설가를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톨스토이의 대표작으로 ‘안나 카레니나’가 압도적으로 손꼽혔다. 한국어 번역본도 여럿이다. 최근 최선 고려대 노어 노문학과 명예교수가 새 번역본을 창비 출판사에서 내놓았다. 창비는 고유의 외래어 표기법을 쓰기 때문에 ‘안나 까레니나’란 제목을 달았다. 이 책을 뒤적이다가 기존 번역본과 비교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원로 노문학자 박형규 고려대 명예교수가 옮긴 ‘안나카레니나(문학동네)’와 젊은 노문학자 연진희가 옮긴 ‘안나 카레니나(민음사)’를 찾았다.

개인적으론 박형규 교수 번역본을 좋아한다. 러시아 원문을 해독할 수 없고, 세 번역본을 샅샅이 대조한 것이 아니라서 내 선택을 절대적으로 내세울 생각은 조금도 없다. 올해 아흔 살 가까이 됐을 박 교수를 만난 적도 없다. 다만 청소년 시절에 박 교수가 번역한 러시아 소설을 읽고 자란 세대에 속하기 때문에 그분의 이름이 친숙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톨스토이가 소설 초반부에서 주인공 안나를 묘사한 대목은 무척 인상적이다. 세 사람의 번역 차이도 인상적이다. 남자 주인공 브론스키가 안나를 처음 본 순간, 떠올린 느낌을 묘사한 대목이다.

우선 문학동네 번역본을 소개한다. “이 짧은 시선으로 브론스키는 재빨리 그녀의 얼굴 가운데서 노닐기도 하고 반짝이는 두 눈과 살포시 짓는 미소로 실그러진 붉은 입술 사이를 팔딱팔딱 뛰어 돌아다니기도 하는 짓눌린 생기를 알아챘다.”

다음은 민음사 번역본. “그 짧은 시선을 통해, 브론스키는 그녀의 얼굴에서 뛰노는 절제된 활기를 포착할 수 있었다. 붉은 입술을 곡선으로 만든 희미한 미소와 빛나는 눈동자 사이에서 차분한 생기가 날개를 파닥이며 날아다녔다.”

이번엔 독자적인 외래어 표기법을 사용하는 창비 번역본. “이 짧은 시선에서 브론스끼는 억눌린 생명감, 그녀의 얼굴에서 넘실거리며 뛰놀고 있는, 반짝이는 두 눈과 붉은 입술을 휘움하게 만드는 보일락 말락 하는 미소 사이에서 그만 터져 나오고 마는 생명감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문학동네 번역본은 상대적으로 우아한 문어체의 맛을 준다. 민음사 번역본은 젊은 세대의 가독성을 염두에 둔 듯, 문장을 잘랐고 구어체가 두드러진다. 창비 번역본은 번역체를 숨기지 않은 채 원문의 형식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분명한 것은 세 번역본이 저마다 다른 풍미를 풍기고 있다는 점이다. 내 선택도 분명하다. 하지만 아직 안 읽어본 분은 대형 서점에서 직접 비교해보시길 바란다. 긴 겨울밤을 보내면서 읽기 좋은 소설이니 신중히 골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