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인 그라나다에 있는 알람브라 궁전. 이슬람 문화의 영향을 받아 이국적인 풍경을 보여준다. 사진 위키미디어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인 그라나다에 있는 알람브라 궁전. 이슬람 문화의 영향을 받아 이국적인 풍경을 보여준다. 사진 위키미디어

독일 북부 함부르크에 거주한 지 7년이 넘었지만, 이곳의 어두운 겨울 날씨는 여전히 적응하기 힘들다. 아무리 추워도 청명한 햇빛이 늘 가득한 한국의 겨울과 달리 함부르크의 겨울 아침은 9시쯤 시야를 밝힌다. 그것도 잠시, 오후 3시가 되면 캄캄한 어둠이 내린다. 그나마 해가 떠 있는 낮에도 구름이 두껍게 내려앉아 햇살 한 줄기 보기 힘들 정도다.

물론 조용히 내려앉은 겨울의 어둠이 여름 내내 들뜬 마음에 안식을 가져다주는 건 분명하다. 하지만 3년 전, 독일 언론이 12월 독일 북부 지역에 햇살이 비춘 시간이 총 6시간에 불과하다는 것을 뉴스로 전할 정도로 독일에선 겨울철 햇살이 그립기만 하다.

눈 내리는 거리의 어둠을 뚫고 집으로 가는 택시 안, 스페인의 유명 피아니스트 알리사 데 라로차의 피아노 선율이 귀를 사로잡은 건 그의 연주가 햇살을 머금은 듯했기 때문이다. 알리사 데 라로차가 연주하는 피아노 연주곡 ‘트리아나’는 창밖 세상과 정반대로 택시 안을 따뜻하게 만들었다. 트리아나는 스페인 작곡가 이삭 알베니즈의 대표작 ‘이베리아 피아노 모음곡’ 중 하나다. 트리아나는 새가 맑게 지저귀는 듯한 짧은 떨림의 트레몰로(tremolo·음이나 화음을 규칙적으로 떨리는 듯이 되풀이하는 주법)와 트릴(trill·본음과 그 2도 위의 도움음을 떨 듯이 교대로 나타내는 것)이 곡 전체를 뒤덮고 있다. 트리아나의 멜로디는 따뜻한 지중해의 바닷바람을 한껏 머금은 듯 상쾌하다.

트리아나를 최고로 해석한다고 정평이 난 알리사 데 라로차의 피아노 연주는 필자를 3년 전 방문한 스페인 안달루시아로 단숨에 데려가게 했다. 스페인 남부 지방을 일컫는 ‘안달루시아’는 남쪽으로 지중해와 대서양이, 서쪽으로는 포르투갈과 접해 있다. 넓이는 약 8만7300㎢로 말라가, 세비아, 그라나다 등과 같은 도시를 품고 있다. 가톨릭 문화권이지만 한때 이슬람의 지배를 받아 이슬람 전통이 아직도 남아 있다. 그라나다에 있는 알람브라 궁전의 중정은 이슬람식 회랑이 에워싸고 있어 이국적인 풍경이 눈길을 끈다.

뜨거운 태양 아래 넘실대는 높은 산봉우리, 거기에 예외 없이 찾아볼 수 있는 올리브 나무는 독특하고도 아름다운 안달루시아만의 장관을 만들어낸다. 안달루시아가 스페인을 넘어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이유 중 하나다.

이삭 알베니즈는 스페인을 대표하는 작곡가이자 스페인 민족 음악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다. 그는 1905년부터 3년 동안 안달루시아 지방의 색채를 담은 ‘이베리아 피아노 모음곡’를 작곡했다.

이베리아 피아노 모음곡은 이삭 알베니즈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동시에 이전까지 유럽에서 존재감을 발휘하지 못했던 스페인 음악을 단숨에 최고의 수준으로 올리는 공을 세웠다. 클로드 아실 드뷔시, 올리비에 메시앙 등 당대 최고의 작곡가들이 “이베리아 피아노 모음곡은 스페인 인상주의 음악의 완성”이라고 극찬했다.

19세기까지 유럽 클래식 음악은 독일이 주도했다. 하지만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유럽 각 지방에서는 독일의 영향에서 벗어나 각국의 음악 색채를 찾으려는 움직임이 벌어졌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체코 스메타나의 ‘몰다우’, 루마니아 에네스쿠의 ‘루미니안 광시곡’이다. 프랑스에서는 드뷔시, 라벨이 바로크 시대 프랑스의 전통을 되살린 작품을 작곡했다. 이삭 알베니즈의 이베리아 피아노 모음곡도 독일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일던 시기에 나왔다. 이삭 알베니즈는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로서, 전 세계를 누볐던 방랑가로서의 삶을 안달루시아의 음악적 영감에 투영했다. 그렇게 이베리아 피아노 모음곡이 탄생했다.

‘이베리아 피아노 모음곡’은 총 4집으로 이뤄져 있다. 연주 시간은 1시간 30분 남짓이다. 이베리아 피아노 모음곡을 여는 첫 곡인 ‘에보카션(Evocación)’은 신비스러운 인상화 한 폭을 연상시킨다. 이삭 알베니즈는 자신의 고향인 스페인 남부에서 춤을 출 때 연주하던 ‘판당고(Fandango)’라는 리듬에 안달루시아의 풍경을 담았다.

이후에는 알메리아, 트리아나, 말라가, 헤레즈 등 안달루시아 지방 도시의 이름을 제목으로 삼은 곡이 등장한다. 이 곡에는 플라멩코처럼 스페인 전통 무곡에 담긴 리듬이 쓰였다. 서정적인 멜로디와 함께 기타 연주를 연상시키는 트레몰로 기법이 안달루시아 지방의 정열적인 민속 음악과 만나 피아노 전공자도 고개를 내저을 만큼 어려운 고도의 기교를 요구한다. 이베리아 피아노 모음곡이 공개됐을 당시에는 이 곡이 고난도의 기교를 담고 있어 연주가 불가능하다는 의견도 나왔다. 하지만 초연 이후에는 자주 연주되는 곡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안달루시아의 자연이 담겨있는 음악

필자가 2016년 찾았던 말라가(안달루시아 최남단 도시)는 4월임에도 여름처럼 꽤 더웠다. 말라가 거리를 활보하는 이들의 활기찬 스페인 억양과 움직임에서 이베리아 피아노 모음곡 제4권의 첫 곡인 ‘말라가’가 그대로 느껴졌다. 말라가는 정열적으로 춤추는 듯한 반주와 멜로디가 가득하다. 한겨울, 이베리아 피아노 모음곡으로 안달루시아의 감성을 함께 나눴으면 한다.


▒ 안종도
독일 함부르크 국립음대 연주학 박사, 함부르크 국립음대 기악과 강사


Plus Point

함께 감상하면 좋은 음반

이삭 알베니즈
이베리아 피아노 모음곡
피아노 알리사 데 라로차

1923년에 태어나 2009년에 타계한 스페인의 여성 피아니스트 알리사 데 라로차는 햇빛이 깃든 맑고 투명한 터치로 많은 이에게 사랑받았다. 그는 모차르트 해석의 권위자로 알려져 있고 그가 녹음한 모차르트 소나타 및 협주곡 음반은 지금도 명반으로 남아있다. 하지만 그의 진가는 스페인 음악 해석에서 여실히 나타난다. 알시아 데 라로차가 해석하는 스페인 작곡가 이삭 알베니즈의 음악, 특히 ‘이베리아 피아노 모음곡’은 현재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연주로 알려져 있다. 정열적인 리듬을 비롯해 우수를 가득 머금은 멜로디 등 스페인의 이국적 감성을 심연에서부터 이해하며 연주하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