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의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해 ‘부르심’을 받은 김하종(빈첸시오 보르도·63) 신부는 1990년 이탈리아에서 한국에 오자마자 김대건 신부의 김, ‘하느님의 종’을 따서 김하종으로 개명했다. 성당 부설 독거노인 점심 급식소를 운영하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이후 쏟아지는 노숙인을 위해 1998년 국내 최초로 저녁밥을 주는 ‘안나의 집’을 열었다. 사진 박상훈 조선일보 기자
거리의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해 ‘부르심’을 받은 김하종(빈첸시오 보르도·63) 신부는 1990년 이탈리아에서 한국에 오자마자 김대건 신부의 김, ‘하느님의 종’을 따서 김하종으로 개명했다. 성당 부설 독거노인 점심 급식소를 운영하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이후 쏟아지는 노숙인을 위해 1998년 국내 최초로 저녁밥을 주는 ‘안나의 집’을 열었다. 사진 박상훈 조선일보 기자

겨울 해는 짧아 오후 4시만 돼도 어둑하고 을씨년스러웠다. 성남시 모란역 뒤편 ‘안나의 집’ 앞에는 검은 점퍼를 입은 노숙인들이 수십 명 진을 치고 있었다. 수레에 짐을 실은 노인, 배낭을 멘 할머니, 트렁크를 끄는 아저씨…. 어떤 이는 앉아서 신문을 읽고, 어떤 이는 넘어가는 햇살 조각을 붙들고 졸고 있었다.

배식 시간이 다가오자, 김하종 신부가 식당 입구로 이끌며 말했다.

“여기서 배식할 때 노숙인들과 전부 하이파이브해요. 한국 문화는 눈 맞추는 거, 접촉하는 거 싫어하지만 여기 친구들, 이제 다 내 눈 보고 인사해요. ‘사랑합니다’ 하면서 눈 보면, 그 친구들 눈 매우 아름다워요.” 탬버린을 치듯 그가 리드미컬하게 말을 이어갔다. “나는 눈으로 말해요. ‘너하고 나, 같은 인간이다. 나, 너보다 괜찮아서 밥 주는 거 아니다. 나, 너 존중한다. 너, 못나서 여기 오는 거 아니고, 같은 인간이고 가족이라 오는 거다.’”

식당 안에서 흥겨운 트로트가 흘러나왔다. 벽면에는 ‘안나의 집’을 후원하는 후원자 명단이 빼곡했다.


밥 먹으러 온 분들의 표정이 참 밝다.
“처음엔 아니었다. 이 친구들, 거리 식당 앞에 가서 ‘밥 주세요’ 하고 죽치고 있었다. 지저분하고 굶주리고 상대를 안 해주니 억지를 부렸지. 지금은 그런 사람 없다. 우리 집에 샤워실, 이발실 다 있다. 옷도 나눠준다. 깨끗해지면 자존감 올라간다. 요일별로 프로그램도 많다. 내과, 정신과, 통증 치료도 하고 알코올 중독과 실업, 법률까지 상담해준다. 인문학 강좌에 미술, 운동, 음악 치료도 있다.”

사연은 천차만별이겠으나 왜 이들은 노숙의 길로 들어섰을까.
“우리 사회는 너무 빠르고 복잡하고 똑똑하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못 따라간다. 일이 없어서가 아니다. 정신, 성격, 육체 문제로 그런 사회를 못 따라간다. 여기 오는 분들 다시 시작하는 사람도 많다. 노숙 초기에 잡아주면 일어난다.”

산발한 곱슬머리는 노숙인과 함께 어울리기 위한 헤어스타일인가.
“맞다. 하하. 깨끗한 옷 입고 예쁘게 머리 깎으면 이 사람들 피한다. 처음 시작할 땐 외국인인 데다 체격 왜소해서 무시당했다. ‘너 뭔데?’ 하며 시비 걸어서 여러 번 싸웠다. 동물 사회처럼 보스, 리더 필요하다. 술 마시고 와서 행패 부리는 사람은 엄하게 가르친다. ‘술 마셨죠? 여기, 규칙 뭐예요? 여기 500명 다 규칙 지킵니다!’ 이제 서로 존중하니까 받아들인다(웃음).”

노숙자와 아이들…. 거리의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해 ‘부르심’을 받은 김하종, 빈첸시오 보르도 신부(오블라띠 선교수도회). 그는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대학에서 동양 철학을 공부했다. 1987년 사제 서품을 받았다. 1990년, 이탈리아에서 한국에 오자마자 김대건 신부의 김, ‘하느님의 종’을 따서 김하종으로 개명하고, 도시 빈민들이 많은 성남으로 왔다. 성당 부설 독거노인 점심 급식소를 운영하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이후 쏟아지는 노숙인을 위해 1998년 국내 최초로 저녁밥을 주는 ‘안나의 집’을 열었다. ‘안아 주고 나눠주고 의지하는 집’이라는 뜻답게, 노숙인 급식소와 기숙사, 자활센터 그리고 가출한 아이들을 돌보는 4개의 청소년 쉼터로 이루어져 있다.

김 신부는 오후 6시부터 밤 12까지 직접 트럭을 몰고 나가 현장에서 거리의 아이들을 먹이고 상담하는 이동형 아웃리치 ‘아지트’도 운영 중이다.

인간에게 밥 이상으로 필요한 것은 사랑이라고 했다. 동시에 밥 한 끼를 나누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했는데, 무슨 의미인가.
“인간은 40일 동안 단식해도 안 죽는다. 하지만 4일만 사랑을 못 받아도 죽어간다. 음식보다 사랑과 인정이 먼저다. 잠깐 어려움이 있어 식사하러 왔지만, 우리는 같은 인간이라는 메시지다. 밥을 줘도 불친절하면 의미가 없다.”

일각에서는 ‘공짜로 밥 주니 노숙인이 생기는 것 아니냐’는 부정적인 시선도 있다.
“설날, 추석, 크리스마스에도 이 친구들 여기로 밥 먹으러 온다. 친구, 형제 있으면 거기 가겠지. 명절에도 갈 곳이 없다. 그런 날엔…. (가슴을 지그시 만지며) 마음이 더 많이 아프다.”

모여서 밥 먹는 걸 보면 어떤가.
“반갑고 행복하다. 김이 폴폴 나는 거 퍼주면 맛있게 먹는다. 그 밥, 나도 먹는다. 점심 저녁, 나 여기서 같은 밥 먹는다. 3년 전 노숙인과 나, 여기 식당에서 함께 환갑잔치도 했다. 여기 기숙사에서 사는 노숙인 3명과 같이 한복 입고 우리 육십 살 동갑 기념했다(웃음).”

노숙인과 함께 치른 회갑연에서 이탈리아 농부의 아들은 노래를 불렀다.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이것은 우리의 바람이었어’로 시작해 ‘너를 사랑해’로 끝나는 노래 ‘만남’. 밑바닥 형제들을 사랑해서 밑으로 내려온 신부는 피 한 방울 안 섞인 그들과 그렇게 몸으로 엉겨 피붙이가 됐다.


‘아이들을 지켜주는 트럭’ 일명 아지트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의 이동 트럭. 사진 남강호 조선일보 기자
‘아이들을 지켜주는 트럭’ 일명 아지트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의 이동 트럭. 사진 남강호 조선일보 기자

어떻게 그토록 자연스러울 수 있나.
“사랑한다면 당연하다. 엄마가 아이들 사랑하면 기쁘게 밥 주고 청소하잖나.”

사랑을 받아 새 삶을 사는 사람을 보면 기쁘겠다.
“식사하러 와서 감사한 마음에 빗자루 잡고 청소하던 요한이란 사람이 있었다. 정말 예뻐서 ‘노숙하지 말고 같이 살자’고 했다. 직원으로 들어와서 감사패도 받고 공무원도 됐다. 손기술 좋은 노숙인은 국제 대회에서 상도 받고 주얼리 디자이너가 됐다. 여기 작업장에서 꾸준히 일하면 한 달에 150만원 이상 번다.”

그가 스마트폰으로 노란 태권도복을 입은 꼬마 사진을 보여줬다. “우리 공동 가정의 여섯 살 막내다. 예쁘지 않나? 얘 아빠가 청소년 쉼터에서 자립해 나갔다가 아이가 생겼다. 아빠는 여기서 직장 다니고, 이 아이는 우리가 키운다.”

‘안나의 집’을 만나 다행이다. 하지만 그런 이상적인 가정이 얼마나 될까. 가출 청소년들의 상황도 심각할 듯하다.
“대개 아이들이 집을 나오는 이유는 폭력 때문이다. 가정 폭력을 피해서 거리로 나온다. 노숙인의 상당수도 대부분 버림받은 아이들이다. 거리에 내몰린 아이 중 우리 집에 와서 도움 못 받으면 자라서 노숙인이 된다. 어릴 때 사랑과 교육을 제대로 못 받으면 자신감이 없고, 사회생활도 못 한다. 빠르고 복잡하고 똑똑한 사회, 못 따라간다.”

특별히 가슴에 남는 아이가 있나.
“(손목을 가리키며) 여기 이 팔찌, 한 소녀가 줬다. 나한테 이거 주면서 ‘신부님, 이거 보면서 저 위해서 기도해주세요’ 하면서 성매매하러 떠났다. 잡았지만 뿌리치고 가버렸다. 사무실에 있으면 이런 현실 모른다. ‘아지트’ 트럭 몰고 나가면 하루 80명 만난다. 길거리의 아이들은 경계에 있다. 나쁜 어른 만나면 나쁜 길로 가고, 좋은 어른 만나면 좋은 길로 간다. 아지트에서 쉬고 먹는 아이들 보면, 참 아름답다.”

긍휼의 샘이 어떻게 마르지 않고 계속 차오르나.
“(잠시 생각에 잠기며) 고통에 대한 이야기를 해도 될까? 어릴 때 나는 난독증을 앓았다. 청소년기에 학습장애와 열등감으로 어려움을 겪을 때, 예수님 사랑으로 극복했다. 아파본 사람은 안다. 그래서 고통을 겪는 사람에게 더 정이 간다.”

나는 질문을 멈추고 가만히 이 갈색 눈의 이탈리아 남자를 바라보았다. 1990년 비행기 트랩에서 내려 땅을 밟는 순간 ‘이제 한국인이 내 민족이다’라고 외쳤다는 33세 청년은 어느새 백발이 듬성듬성한 63세 노인이 되었다. 30년간 성경 대신 주걱을 들고, 성수 대신 설거지물에 손을 담가, 노숙인의 품에 십자가 대신 밥 한 공기를 안겼다. 그에게 밥과 사랑은 동의어였다.

지금, 건강은 어떤가.
“얼마 전까지 안 좋았다. 2년 전엔 성당 미사 중에 쓰러졌다. 눈뜨니 병원이었다.”

어디가 문제였나.
“마음이다. 우울증으로 마음이 힘들어서 2년간 고생했다.”

무슨 일로 번민했나.
“2016년에 힘들었다. 20년 무료 임대가 끝나 2018년엔 ‘안나의 집’을 비워줘야 했다. ‘나도 62세가 되면 정리하고 쉬어야지….’ 그런데 그럴 수가 없었다. ‘안나의 집’ 문 닫으면 이 친구들, 어디서 밥 먹나? 너무 고민을 하니까 쓰러졌다. 성당 가서 예수님 앞에서 무릎 꿇었다. ‘예수님, 저는 쉬고 싶지만, 이 친구들 생각하면 안 돼요. 저 계속할게요. 이제까지 그리하셨듯이 도와주세요.’”

그리고 기적이 일어났다. 새 집을 지을 땅도 돈도 없는 상태에서, 우연찮게 성당 맞은편 공터가 그린벨트에서 풀렸다. 땅값이 12억원이라 포기했더니, 교구에서 돈을 지원했다. 공사비가 40억원이라 다시 포기했더니, 때마침 KBS ‘이웃집 찰스’와 ‘인간극장’에서 그를 취재해 다큐멘터리로 만들었다.

대가 없이 헌신하는 ‘산타 신부’를 보고 사람들은, 십시일반 돈을 모아 ‘안나의 집’을 찾았다. 결혼 패물 판 돈 들고 온 아주머니, 첫 월급 기부한 스무 살 아가씨도 있었다.

기적을 겪으며 우울증도 치료가 됐나.
“돈이 들어와도 부족하고 빚을 지니, 그 걱정에 더 힘들었다. 매일 주방 일에, 쉼터의 애들 보고, ‘아지트’ 하러 거리로 나가고, 굉장히 힘들었다. (두 손을 비비며) 처음 이 이야기를 한다. 다행히 기도해주신 분들 많아서 아주 괜찮아졌다.”

그 일로 더 선명하게 알게 됐다고 했다. “어두운 터널에도 끝이 있다는 것. 5㎞, 10㎞, 30㎞…. 끝나지 않을 것 같았는데, 끝이 있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을 열심히 산다. 내일 일은 내일 걱정하면서. 조금씩 앞으로 가면 터널 밖으로 나온다. 기도하고 자전거 타며 기나긴 시간을 버텼다. 빚도 이제 다 갚았다(웃음).”

늘 우연과 기적을 기대하며 살아가는 삶이 불안하지 않나.
“불안, 있다. 우울증도 여전히 있다. 하지만 괜찮다.”

신부님에게 행복이란 무엇인가.
“나는 이 친구들한테 배운다. 첫째, 이 친구들은 생활이 어려워도 자살 안 한다. 겨울에 바깥 잠을 자도 이듬해 봄, 기다린다. 생활이 위대한 선물이고 아름다운 일이라는 걸, 안다. 여태껏 자살하는 부자는 봤어도 자살하는 노숙인은 못 봤다.

행복은 다른 데 있지 않다. 자신이 가진 걸 나누는 거다. 내가 가진 시간, 돈, 집, 자동차 지키려고만 하면 뺏길까 봐 늘 긴장한다. 나만 감싸 안으면, 밖에서 오는 상처는 안 받아도 공허하다. 손 펴고 팔 벌려서 안아주면, 상처받을 위험 있지만 행복하다. 나누면 채워지고 행복해진다. 그건 진리다.”

김지수 조선비즈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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