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미식당(본점)
메뉴 밥과 청국장
주소 서울 종로구 낙원동 288 낙원상가 B1 148호
영업 시간 매일 11:00~21:00 (준비 시간 15:00~17:00, 일요일 휴무)


새 해가 떴다. 과거가 잡아끄는 중력의 끈을 끊어낼 작두 같은 핑계가 생겼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저 그런 의미만 있으며, 시곗바늘은 제 갈 길을 갈 뿐 당신이 바라는 희망 따위를 향하지 않는다. 2020년 1월 1일, 2010년대를 종료하고 마주친 미래적 시간. 숙취로 일찍 잠이 들었다. 어렴풋이 들리는 종소리에 눈이 떠졌다. 이것이 진정 시대가 원하는 미래인가. 한복을 차려입은 거대 펭귄이 제야의 종을 울린다.

쌓아 올린 줄 알았던 시간은 딱 그만한 깊이의 웅덩이를 파냈다. 공중으로 날아간 줄 알았던 기억은 그 좁은 용탕 안에 가만히 괴어 있다. 종의 파동은 웅덩이에 빠져 수면 위로 허우적대다 도망치듯 사라진다. 한때 지독히 미워했던 그 시간의 얼굴이 그려지지 않는다. 깊은 물에 비친 내 얼굴이 일렁인다. 점점 더 멀어지고 점점 더 잊힌다.

“밥은?” 하루를 통틀어 아버지에게 하는 말이라고는 기껏해야 밥 먹었냐는 한 마디. 어둡고 축축한 집에서 밥 냄새는커녕 늘 차갑고 퀴퀴한 소주 냄새가 났다. 아침이 밝아도 볕이 들지 않는 집, 그 집에서 속수무책으로 긴 낮을 보내는 건 아버지뿐이었다. 엄마는 식당에서 노동자를 위한 밥을 지었고 동생은 서둘러 군대에 갔다. 나는 직장을 다니며 아르바이트를 했다. 가까이하고 싶지만, 멀어져 버린 우리는 밥 한 끼 나눌 시간도 여유도 없이 집에 오면 힘없이 쓰러져 잠을 자기 바빴다. 어쩌면 한 오라기의 볕이 들지 않는 그 집은, 긴 잠으로 도망치기에 모자람 없는 안식처였을지도 모른다.


일미식당의 흰 쌀밥. 사진 김하늘
일미식당의 흰 쌀밥. 사진 김하늘
일미식당의 감칠맛 나는 오징어볶음. 사진 김하늘
일미식당의 감칠맛 나는 오징어볶음. 사진 김하늘

집구석엔 라면 봉지와 싸구려 편의점 도시락 용기만 쌓여 갔다. 엄마가 일하는 식당에서 남은 반찬과 찌개 따위를 싸 오면 그게 별식이었다. 큰딸내미가 할 노릇이라곤 쌀을 사서 밥을 짓는 게 전부였다. 쌀을 씻어 불리고 물을 맞춰 압력솥에 밥을 안쳤다. 가스 불을 켜며, 혹여나 밥이 되거나 질까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 밥솥의 추가 들썩이니 금세 집에 밥 냄새와 온기가 돌았다. 돋보기를 쓰고 지역 신문을 뒤적이며 일자리를 찾던 아버지는 가스레인지 주변을 서성이다 냉장고에서 달걀 세 알을 꺼냈다.

밥에 뜸이 다 들 때쯤, 아버지는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달걀을 깨뜨렸다. 그러곤 삐걱대는 찬장을 열어 소금과 미원을 꺼내 노른자 위에 뿌렸다. 처음 지은 하얀 쌀밥과 엄마의 김치와 된장국, 아버지의 달걀프라이. 얼른 슈퍼에 뛰어가 도시락 김 몇 봉지를 사서 밥상 위에 올려놓았다. 작지만 모자람 없는 밥상이 차려졌다.

“밥 먹자.” 그렇게 지은 첫 밥. 살포시 떠서 밥공기에 소복이 담은 자태가 마치 첫눈과 같았다. 숟가락으로 듬뿍 퍼서 후후 불고 한 입 가득 넣었다. 밥을 한가득 문 채 뜨거운 입김을 내뿜었다. 파삭하고 짭조름한 김에 흰 쌀밥과 반숙 달걀노른자를 얹어 한 입, 김치 한 조각, 된장국 한 모금. 아버지는 밤낮으로 일하느라 고생한다며 달걀프라이 두 장을 찢어 내 밥에 얹어 주셨다. 눈알이 뜨거워지고 콧속이 시큰했다. 두 손으로 국그릇을 들어 국을 삼키는 시늉을 했다. 후루룩 소리를 내다 그릇을 내려놓고 건너 빈 밥그릇을 바라봤다. 늘 아깝게 밥 한 숟가락 남기시는 아버지의 밥그릇은 밥풀 하나 없이 깨끗했다. 아주 오랜만에 안도감이 들었다.

“하늘씨, 이 집 밥 끝내줘요.” 걸음 빠른 한 남자는 나를 종로3가로 이끈다. 천장이 높고 근사한 스테이크집은 잘 몰라도 기가 막힌 백반집은 귀신같이 잘 찾아다니는 사람인 것 같다. 괜히 신뢰가 갔다. 아직 영업 개시를 하지 않은 포장마차촌을 지나니 악기와 음향 장비가 즐비한 낙원상가가 보인다. 아귀찜, 순댓국, 우거지탕 등 싸고 오래된 식당들 또한 상가 옆에 바투 몰려 있다. 호기심에 간판을 외우며 앞장서다 그에게 손목을 붙잡혀 낙원상가 지하로 향했다. 이런 낡은 건물 지하에 무슨 밥집이 있을까 반신반의했지만 나는 기꺼이 그의 손에 이끌렸다.

종합시장몰도 아닌 악기 상가 지하에 형성된 시장은 그야말로 낙원이었다. 과일, 반찬, 분식뿐 아니라 생활용품까지 없는 게 없다. 그의 빠른 걸음이 목도한 곳은 시장 한구석의 ‘일미식당’. 입구에는 쌀 포대와 식자재가 켜켜이 쌓여 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눈에 띄는 것이 있다. 바로 30인분짜리 대형 밥솥 다섯 개. 테이블이 10개가 되지 않는 작은 백반집에서 이 무슨 사치인가 싶다.

백반 종류는 청국장, 제육볶음, 오징어볶음, 낙지볶음. 그리고 추가할 수 있는 안줏거리 몇 가지가 있다. 오징어볶음에 청국장 추가. 곧이어 조미김, 어묵볶음, 숙주나물, 도라지나물 등 반찬 여섯 가지와 청국장 한 뚝배기, 오징어볶음이 상에 오른다. 그리고 마지막 밥솥 앞을 지키고 서 있던 사장님이 갓 지은 밥을 그릇에 담아 준다. 보기 드문 풍경이다.

김을 설설 내뿜는 갓 지은 밥 한 그릇이 앞에 놓였다. 내 앞에 앉은 남자는 걸음도 보채더니 얼른 먹어 보라며 밥 한술까지 보챈다. 반질반질 윤기 도는 밥알은 입에 넣기도 전에 먹음직스럽다. 한 숟가락을 가득 퍼서 입안에 와락 넣는다. 움찔. 스뎅(스테인리스)에 담기면 그 밥이 그 밥이리라 오해했던 게 미안할 지경이다.

밥알은 몇 번 씹지도 않았는데 입안에서 스르르 녹아 사라진다. 순하고 옅은 청국장과 김 한 장이면 충분하다. 나머지 찬과 오징어볶음은 사치다. 입맛에 반찬이 단 편인데 밥맛만 못하다. 그렇게 각자 밥 두 공기씩, 도합 총 네 그릇을 먹었는데 반찬이 남아돈다. 남은 반찬을 핑계 삼아 막걸리 한 병까지 후딱 비운다. “밥맛이 제일 중요하지.”

이 집의 밥맛은 쌀보다 밥 짓는 기술, 아니 부지런함에 있다. 30인분짜리 밥솥에 10인분, 그러니까 3분의 1 정도 양의 불린 쌀을 넣고 밥을 짓는다. 아침에 미리 지어 놓고 ‘스뎅’ 그릇에 담아 온장고에 넣어두지 않는다. 점심과 저녁때에 맞춰 밥솥을 돌려가며 그때그때 밥을 짓는다. 그래서 손님이 몰리는 시간에 가야 더욱 밥맛이 좋다.

새 해가 떴다. 세월이 파낸 웅덩이에 어떤 기쁨과 슬픔이 차오를까. 백미 밥 한 그릇에 아버지의 주름진 얼굴이 드리운다. 시간을 희망하고 싶다.


▒ 김하늘
외식 컨설팅 회사 ‘라이스앤컴퍼니’ 대표


‘김하늘의 푸드스트리트’는 잠시 쉬어갑니다. 그리고 새롭게 ‘김하늘의 인생의 백미’라는 꼭지를 시작합니다. 누군가와 밥 한 끼를 나누며 그들의 화양연화, 그러니까 인생의 백미 그 순간에 대해 써볼까 합니다. 물론 밥을 비롯한 음식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여러분 인생의 백미는 무엇인가요? 맛있는 밥 한 끼와 그 이야기를 나눠 주실 분은 제게 메일 보내주세요. 언제 밥 한번 드시죠.

sky@rice8compan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