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정취가 가득한 전북 군산 해망로 경암동 철길. 사진 이우석
옛 정취가 가득한 전북 군산 해망로 경암동 철길. 사진 이우석

우리는 모든 것이 직진하는 걸 미덕으로 간주하는 세상을 살고 있다. 그러나 기대보다 빠른 속도로 원을 그려나가는 시침(時針)의 차가운 궤적은 그 원심력으로 단숨에 인간성을 소외시켜 버린다. 소외된 현대인은 과거의 흔적을 ‘낡고 허름한’ 것이 아니라 그나마 행복했던 시절로 추억한다. 여행만큼은 역주행이 절실한 이유다. 여기 즐거운 역주행 여행이 있다. 대한민국 근대사의 흔적이 오롯이 남아있는 전라북도 군산이 바로 그곳이다.

군산은 김제·정읍·익산·완주 등 한반도에서 가장 너르다는 호남평야를 두르고 있다. 이런 이유로 일제강점기 미곡 수탈의 주요 항구로 번성했다. 역설적이다. 작은 어촌에 철길이 놓이고 은행과 미두장(곡물 거래소)이 생겼다. 일본인은 쌀을 죄다 쓸어 자국으로 실어 나르기 바빴다. 1933년의 예를 보자. 이북을 포함해서 국내 쌀 연간 총생산량이 1630t이었는데 이 중 53.4%(870t)가 군산항을 통해 일본으로 반출됐다. 쌀이 나가는 대신 돈 냄새를 따라 내외국인이 몰려들었다.

채만식(1902~50)의 소설 ‘탁류(濁流)’는 말한다. 진흙탕 고기잡이 어항 군산은 갑자기 2, 3층 건물들에 은행과 요정, 청요릿집, 인력거꾼이 가득 메운 ‘꽤 그럴듯한’ 도시가 됐다. 군산은 한마디로 ‘돈이 돌던’ 동리다. 개도 지전(紙錢)을 물고 다닌다고 했다. 1899년 개항 이후엔 경성 이남에선 최고 호사스러운 2층 청요릿집이 생겨날 정도였다. 조선총독부 핵심 금융기관 조선은행, 일본 상인들이 차린 나가사키18은행, 당시 600명이 한 번에 밥을 먹을 수 있었다던 청요릿집 빈해관 등이 군산 해망동에 그대로 남아있다. 국내에 현존하는 빵집 중 가장 오래된 이성당 역시 군산의 위용을 말해주는 증표다.

지금 군산에 가면 아프지만, 반드시 기억해야 할 과거를 만날 수 있다. 100여 년 전부터 켜켜이 쌓인 우리 근대사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덕이다. 바다 냄새를 담은 상쾌한 바람에 어울리는 뜨끈한 짬뽕도 있다. 마침 약 15만 마리의 가창오리 손님들도 떼로 와서 금강하구둑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다. 군산은 바람이 잦은 항도다. 쉴 새 없이 바람은 불어오지만, 서울 도심의 벼린 바람처럼 사납지는 않다. 군산에는 꽃게장이니 아귀찜이니 짬뽕이니 멋을 것이 많다. 예나 지금이나 풍요의 땅이다. 도시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데도 많은 짬뽕 맛집이 있다. 복성루와 지린성을 비롯, 서원반점·쌍룡반점·빈해관·황해짬뽕집 등이 유명하다.

군산 근대역사를 함께했던 군산 화교 덕이다. 1890년대 후반 군산 땅에 산동 출신 화교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했고 한때 그 숫자가 1000여 명에 이르렀다. 비단을 팔고 농사를 짓거나 식당을 차렸다. 1941년엔 한강 이남에 최초로 화교학교를 세웠다. 화교소학교장이었던 여건방씨가 운영하던 용문각을 시에 무상 기증, 군산화교역사관으로 운영 중이다.


군산근대역사박물관 내부. 옛 가게를 재현했다. 사진 이우석
군산근대역사박물관 내부. 옛 가게를 재현했다. 사진 이우석

시간여행의 중심지 해망로

시간여행의 중심지는 해망로다. 해망로를 걸으면 진포 바닷가에 군산근대역사박물관과 옛 군산세관이 보인다. 군산근대역사박물관은 전국 5대 공립박물관에 선정될 정도로 알찬 구성이다. 안에는 군산의 향토사를 한 번에 볼 수 있는 전시물이 가득하다. 당시의 미두장, 고무신 가게, 극장, 역 등 옛 거리 모습을 재현한 시설물이 가득해 재미있다.

1908년 독일 건축가가 지은 옛 군산세관은 박물관 바로 옆에 있다. 옛 서울역, 한국은행 건물과 함께 고전주의 3대 건축물로 꼽힌다. 길을 따라 내려오면 조선은행 군산지점이 있다. 뼈대를 남겨두고 복원한 조선은행 건물은 현재 조선근대건축관으로 공개하고 있다.

조선근대건축관은 항일 역사 유물로 빼곡하게 채워졌다. 특히 안중근·채만식·유관순 등 독립 유공자의 얼굴을 포함해 다양한 인물의 초상을 사과만 한 크기의 환조로 채워놓은 전시물은 깊은 인상을 준다.

길을 건너면 1980년대로 ‘워프’한다. 정겨운 인상의 구도심 영화동이 있다. 이곳엔 낯익은 초원사진관이 있다. 영화에서 배우 한석규가 앉아있던 조그만 사진관이다. 쇼윈도에는 배우 심은하 사진이 있고 안에서는 ‘8월의 크리스마스’ 영화를 상영한다. 영화에서 주차 딱지를 떼던 심은하가 타고 다니던 티코도 주차돼 있다.

옆 신흥동에는 일본식 가옥이 즐비하다. 일본식 다다미방에서 숙박할 수 있는 고우당을 비롯해 일본식 가옥이 나타난다. 신창동 항도호텔(항도장)은 100년 역사를 자랑하는 곳이다. 처음 지었을 때는 총독부 영빈관으로 쓰다 광복 후 미군 정보기관, 이후 호텔(장급 여관)로 바뀌었다. 이승만 대통령도 전북에 오면 전주가 아닌 이곳에서 묵었다. 게스트하우스를 겸한 호텔로 쓰는데 옛 모습 그대로를 유지했다. 근대역사 골목에 위치한 입지도 좋아 여러 곳을 돌아다니기에 딱 좋다.

언덕엔 국내 유일 왜식 사찰 동국사가 있다. 일본 조중종이 지은 일본식 사찰로 특유의 가파른 지붕이 특징이다. 근사한 대숲 앞에 자리한 절집 한쪽에는 조중종이 침략 포교를 사죄하는 참사문이 새겨져 있고 그 앞에는 소녀상이 있다.

해망동은 재개발됐다. 바다를 바라보며 옹기종기 모여앉은 달동네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대신 바로 옆 경암동 철길마을은 그대로 남아있어 다행이다. 판잣집 사이 골목을 협궤 철도가 지난다. 예전에 가끔 열차가 다닐 때는 오는 시간에 맞춰 모두가 뛰어나가 빨래를 걷고 자전거도 치워야 하던 그런 낭만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카페와 공예품을 파는 가게들이 하나둘씩 들어서고, 빈 철길 위에는 열차 대신 카메라를 든 관광객이 걷는다.

지나간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다. 그러나 한겨울 군산 여행은 잊고 지내던 추억을 되살려 준다. 살아보지 못한 일제강점기의 아픈 역사 역시 직접 보고 손으로 만진 듯 이입된다. 방학을 맞은 가족 여행지나 커플의 출사 여행지로 제격이다.


▒ 이우석
놀고먹기 연구소 대표, 성균관대 미술교육학과, 전 여행기자협회 회장


여행수첩

둘러볼 만한 곳 군산 여행은 크게 도심과 외곽으로 나눠 즐길 수 있다. 군산IC를 통해 들어와 도심으로 진입하기 전에 만나는 외곽에서는 개정동 이영춘 가옥(구마모토 별장)과 옛 간이역의 모습을 오롯이 간직한 임피역 등을 둘러볼 수 있다. 옛 건물을 개조한 갤러리와 공연장도 있다. 일본 무역회사 미즈상사 건물은 예쁜 ‘미즈커피숍’으로 바뀌었다.

먹거리 내항 앞 수산물센터 인근에 있는 군산회집은 오랜 시간 신선한 회와 맛있는 찬으로 인기를 끌어온 집이다. 깔끔한 시설에 개별 룸을 갖춘 고급 횟집으로 꽃게장도 판매한다.
영화동 해물포차는 보기만 해도 입이 딱 벌어지는 ‘비주얼 깡패’ 조개찜 맛집이다.
서원반점은 시원한 짬뽕이 맛있다고 알려진 집이지만 사실은 잡채밥이 더 근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