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경계 예술가 백현진. 2월 7일 오후 8시 서울 한남동에 있는 현대카드 언더스테이지에서 새 솔로 앨범 ‘가볍고 수많은’의 단독 공연을 앞두고 있다. 사진 이태경 조선일보 기자
무경계 예술가 백현진. 2월 7일 오후 8시 서울 한남동에 있는 현대카드 언더스테이지에서 새 솔로 앨범 ‘가볍고 수많은’의 단독 공연을 앞두고 있다. 사진 이태경 조선일보 기자

백현진이 11년 만에 새 솔로 앨범 ‘가볍고 수많은’을 냈다. 목마른 사자처럼 으르렁대던 한대수의 탁성을 깎아, 꽈배기 반죽 말듯 부드럽게 스윙하는 백현진. 그가 애타지만 슬프지 않은 목소리로 ‘사자 티셔츠’를 돌려달라고 호소한다. ‘니가 빌려 간 사자 티셔츠 왜 돌려주지 않는 건지, 그 셔츠가 요즘 가끔 생각이 나, 니 마음대로 가져간 거잖아. 내가 좋아하는 사자 티셔츠…’

김오키의 색소폰은 빗속의 헤드라이트처럼 앞을 비추고, 이태훈의 기타 줄은 얌전히 찰랑거리며, 진수영의 피아노는 공기 중에 물보라를 일으킨다. 장식을 다 걷어낸 프로페셔널의 ‘청순한 자아도취’에 어안이 벙벙해진다. 뒤따르는 감정은 평안이다.

‘극사실주의자의 절창’이라고 명명되는 백현진을 만났다. 1990년대와 2000년대의 문화계를 자기만의 촉과 속도로 관통해온 차분하게 시끄러운 남자. 장영규와 결성한 어어부 프로젝트, 방준석과 함께한 프로젝트 그룹 방백으로 20년 넘게 지치지 않고 사운드를 만든 인디 음악계의 아웃라이어이자,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까지 오른 성실한 현대미술가, ‘개장수’로 얼굴이 알려진 배우이기도 한 삼위일체의 사나이. 서울 연남동 작업실은 무질서한 공간에 웃자란 식물이 군데군데 터를 잡고 있어 싱싱하게 그로테스크했다. 바닥의 물감을 피해 사뿐사뿐 걸어 다니는 백현진은 21세기의 신선처럼 보였다.


뭐 하는 사람인가.
“개장수, 사채업자, 재벌 2세, 지방대 교수… 길거리에서 나를 보면 고개를 갸웃한다. ‘어? 신민아(드라마 ‘내일 그대와’에 함께 출연)… 어? 김선아(드라마 ‘붉은 달 푸른 해’에 함께 출연).’ 나는 백현진이다. 소리를 만들고 그림을 그리는 사람.”

시장에서 그렇게 소비되는 게 재미있나.
“처음엔 어색하고 쑥스러웠다. 이젠 인정한다. 나는 붓질하고 소리를 다룬다. 그 일이 무척 즐거워서 나머지 하나의 정체성도 즐겁게 해낼 수 있다.”

백현진은 2004년부터 연남동 주택의 한 공간에 세 들어 살고 있다. 화가로 좀 더 잘나가기에 3층 전셋집에선 그림을 그리고, 2층 월셋집에선 음악을 만든다. 치열하게 ‘예술 작업을 한다’가 아니라 오르락내리락하며 ‘일을 본다’. ‘일을 한다’가 아니라 ‘일을 본다’라는 말에는 어떤 압박도 느껴지지 않는다. 얄미우리만치 느긋한 언어 선택에서 히피와 힙스터의 무드가 동시에 읽힌다.

연기하고 그림 그리고 음악 만들고… 번아웃으로 탈진한 현대인은 당신 같은 느슨한 형태의 유닛 라이프를 꿈꾼다.
“가족이 생기면 이런 패턴이 힘들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나란 사람이 내린 결론은 ‘주문받고 컨펌받는 일은 못 하겠다’였다. 넓게 보면 외부에서 주문과 컨펌 없이도 자기 삶을 이어 가는 게 예술가의 디폴트다.”

하지만 외부 질서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주문과 컨펌을 한다는 건 또 다른 고통을 수반한다.
“아니다. 나는 고통이 없다.”

창작의 불안이나 고통이 없다는 말인가.
“(담담하게) 없다. 어떤 예술가가 되는 것보다 어떤 사람이 되는가가 상위 개념이다. 어떤 사람이 되면 작품은 그에 맞게 따라온다. 사운드가 있고 뮤직이 있는 것과 같다. 사람이 예술의 선행 조건이다.”

이를테면 ‘내가 어떤 종류의 사람인가’가 작품으로 그대로 나온다는 건가.
“맞다. 그래서 현재 불안해한다고 다른 작품이 나오지 않는다. 내가 달라지지 않는 한 현재의 내가 나올 뿐. 불안해봤자 소용없으니 불안해하지 않기로 했다.”

목표가 뭔가.
“없다. 계획이 있고 목표가 정확하면 불안하겠지. 가령 어떤 작품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걸 못 하거나 수준에 못 미치면 안절부절못하잖나. 나는 목표가 없다. 그래서 아등바등 무리를 안 한다. 내가 원하는 건 오로지 무리가 없는 상태다. 절대 무리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웃음).”

노래를 들어보면 보컬뿐 아니라 색소폰, 피아노, 기타…세션들도 하나같이 선수와 백수 사이를 오간다는 느낌을 받는다. 무리하지 않고 딱 내야 할 소리만 정확히 내면서 에너지나 감정의 낭비가 없더라. 힘을 뺐다기보다는 아예 처음부터 힘을 안 들인 느낌이었다. 기승전결도 없고.
“(함빡 웃으며) 맞다. 선수와 백수 사이에 있고 싶었다. 영감을 쥐어짜고 타인을 괴롭히고 온갖 진상 다 떨면서 나온 음악이 싫어졌다. 그게 잘못이라기보다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 음악으로라도 그런 경향을 보여주고 싶다. 즐겁게 일해서 나온 결과물이라는 걸.”

상업적인 완성도를 끌어올리기 위해선 때론 나와 남을 쥐어짜야 할 때도 있다.
“(단호하게) 나는 완성도를 믿지 않는다. 수정과 개선과 발전을 믿지 않는다. 내가 보는 인류 문명도 발전이 아니라 변화와 변경 정도다. 작은 단위에서 개선이 있을지언정 역사도 변화를 겪을 뿐. 그런 철학이 정착되니 작업할 때도 마감이나 목표가 없다. 아예 그 욕심을 안 낸다.”

‘완성’은 없고, 그저 과정 중에 손을 뗄 뿐이라는 말인가.
“그렇다. 누군들 자기 일을 성실하게 하고 싶지 않겠나? 즐겁고 성실하게 자기 일을 보다가 정해진 시간에 손떼면 끝이 나는 거다. 마감이 좋아지고 수준이 높아졌다? 모르겠다. 즐겁게 변경시켜 나가면, 몸과 마음에 무리가 덜하다. 난 그런 상태를 희망한다.”


자신의 노래와 그림이 세상에 무해하길 바라는 백현진. 멘털이 지칠 땐 과학자 멘델을 생각한다. 사진 이태경 조선일보 기자
자신의 노래와 그림이 세상에 무해하길 바라는 백현진. 멘털이 지칠 땐 과학자 멘델을 생각한다. 사진 이태경 조선일보 기자

백현진은 외항선 선장이었던 아버지와 외향적인 어머니 사이에서 삼 형제의 막내로 태어났다. 그 자신, ‘방치’에 가까울 정도로 자유롭게 자란 게 예술가의 바탕이 됐다고 했다. 입시 미술로 홍대 조소과에 들어갔고, 입학하던 해 봄에 베이시스트 장영규를 만나 1995년 어어부 프로젝트로 데뷔했다. 학교는 자퇴했다. 1996년에 화가로서 밀라노에서 첫 전시를 했다. 영화 ‘반칙왕’ 단역으로 시작해 연기의 지경도 넓혔다. ‘복수는 나의 것’ 등의 스크린에 하드보일드한 사운드를 입히며 홍상수, 김지운, 박찬욱 감독의 영화음악을 만들었다.

1990년대 어어부 프로젝트의 음악은 많이 무리한 음악이지 않나.
“그렇다. 분노, 냉소, 농담이 집약적으로 터져 나온 음악이다. 그악을 떨고 호통을 치고… 몰아붙이는 힘이 있는. 그런데 젊은 시절 무리했던 그 음악이 더 훌륭하냐? 아니다. 그냥 다른 거다. 발전은 수직이지만 변화는 수평이거든. 그런데 나는 ‘저 높은 곳’을 향해 가고 싶지 않다. 뻔히 다 알면서 체념, 좌절, 불안을 맞닥뜨릴 이유가 없다.”

김창완이나 신구 선생처럼 호흡이 둥글고 당김음이 찰지다. 공기 반 소리 반 창법이면서도, 딕션이 좋아 가사든 대사든 귀에 쏙쏙 박힌다. 혹시 판소리를 했나.
“나는 거리 출신이다(웃음). 미술도 동네에서 최정화, 이불, 안은미를 따라다니며 배웠다. 노래는 10대 시절엔 한대수 같은 보컬리스트를 지향하다, 어느 순간 톰 웨이츠를 레퍼런스로 삼았다. 20대 중반쯤 되니 안 되겠더라. 이러면 톰 웨이츠의 주석이나 되겠구나 싶었는데 그때 남도 소리꾼 박병천 선생의 소리, 고수 김데레 선생의 구음을 만났다. 영미의 사운드가 썰물처럼 빠지고 로컬이 밀물처럼 몸에 들어왔다. 직관적으로 우리의 좋은 소리를 모으고 뭉개서 서른 중반에 지금의 내 소리가 만들어졌다.”

시장에서 성과는 좀 있나.
“전무하다.”

성과가 전무하다니.
“괜찮다. 나는 그 부분에서는 훈련이 돼 있다. 다행히 2005년부터 미술에서 성과가 있고, 연기자로 활동도 많아졌다. 지금은 설령 음악이나 미술에서 성과가 없어도 계속할 뱃심이 생겼다.”

무관심 속에서 20년을 지속했다는 건가.
“(담담하게) 그렇다. 언제부턴가 눈을 감고 노래한다. 차마 눈뜨고 노래할 수 없어서. 장영규와 1995년부터 어어부밴드를 만들어 활동했는데, 노래하다 보면 그나마 한 명 있던 관객도 나가는 거다. 당시엔 나도 청년이라 얼마나 마음이 이글이글했겠나. 안 보려고 눈을 감고 노래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게 습관이 됐다(웃음).”

시장에 눈을 감았다….
“시장에 눈 감지 않으면 못 버틴다. 본능적으로 그 앱이 개발됐다. 성과가 없어도, 혹평이나 무관심 속에서도 나는 계속하겠다.”

멘털이 경이롭군.
“(활짝 웃으며) 그 부분에서 멘델에게 감사한다. 그 자세를 멘델에게 배웠다. 멘델이 잡종 교배 실험할 때, 학계에서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래도 멈추지 않고 계속했고 마침내 그의 손을 들어줬다. 지칠 땐 멘델을 생각한다. 자기 일을 오래 할 사람이라면, 멘델을 스승으로 모시는 것도 좋다(웃음).”

시장에선 무관심했지만, 가야금 명인 황병기와 홍상수는 그를 동시대 예술가로 지지했다. 전설적인 안무가 피나 바우시와 박찬욱 감독은 백현진과 작업하며 그를 천재로 인정했다.

잘 팔리는 그림, 잘 팔리는 음악을 하고 싶은 생각을 해본 적은 없나.
“20대 초중반에 알게 됐다. 그렇게 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걸. 오히려 내 스타일대로 하다가 반응이 오면, 그때부터 오래갈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실제론 그 게이트 안으로 들어갈 확률이 희박해 보여서, 낙담하던 시절도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반응이 온 거다. 밀라노 첫 개인전에서. ‘말도 안 돼. 그림이 팔리다니!’ 그리고 아라리오 갤러리와 5년 전속 계약을 했다.”

자기를 믿고 끝까지 해내는 뱃심은 어떤 식으로든 보상받는 듯 보였다. 등가의 법칙이랄까. 다만 ‘No Pain No Gain’은 백현진의 육체를 거치면서 ‘No Pleasure No Gain’으로 수정됐다. 즐거움 없인 얻는 것도 없다. 최고의 가치 기준은 즐거움. 은행 잔고를 확실히 채워주지만, 실시간 컨펌으로 자율성을 저해하던 영화음악 작업도 그만뒀다.

나다움에 대한 탐구가 증폭되는 개인 시대다. 언제 나답다고 느끼나.
“오랫동안 나에 대해 궁금해했지만, 붙들고 있다고 답이 나오진 않더라. 그래서 궁금해할 시간에 일이나 봐야지, 했다. 불안해하지 말고 일 좀 보자(웃음)! 사람마다 문맥이 다르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으면 생각을 붙들지 말고 움직여야 한다. 다행히 하고 싶은 일을 하다 보면 나의 무언가가 나온다(웃음).”

백현진으로 사는 게 즐거운가.
“약간은 쑥스럽지만, 큰 무리는 없다. 개인전이나 공연을 앞두고도 예민하지 않다. 평소처럼 즐겁게 평정심을 갖고 일한다. 흐뭇한 상태에서 만들면 결과물에도 좋은 감정이 생긴다. 일도, 삶도… 가능한 한 무리 없이, 쓱쓱 뚝딱뚝딱….”

김지수 조선비즈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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