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추어 권투선수 록키(실베스터 스탤론)가 미국 필라델피아 미술관 계단에 올라 두 팔을 활짝 뻗고 있다. 도전 의식을 고취하는 명장면이다. 사진 IMDB
아마추어 권투선수 록키(실베스터 스탤론)가 미국 필라델피아 미술관 계단에 올라 두 팔을 활짝 뻗고 있다. 도전 의식을 고취하는 명장면이다. 사진 IMDB

맞고 때리고 깨지고 피 나고, 엄청 아플 텐데 왜 싸우는 걸까? 레슬링이나 격투기, 복싱 같은 경기를 보면 궁금하다. 하지만 같은 질문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왜 힘들게 마라톤을 할까? 왜 다 큰 어른이 공 하나를 골에 넣겠다고 저 난리일까? 왜 스쿠버다이빙이나 패러글라이딩이나 카 레이싱 같은 위험천만한 일에 목숨을 걸까? 왜 시를 쓰고 소설을 쓴다고 머리를 싸매고 있어? 누군가에게는 재미도 없고 이해도 안 되고 당장 돈벌이도 되지 않는 일, 그런데 누군가에게는 목숨을 걸어도 좋을 만큼 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일, 그게 꿈이다.

이기든 지든 고작 몇십달러를 받고 링에 서는 록키는 아마추어 권투선수다. 언젠가 세계 챔피언이 되리라는 희망을 안고 살지만, 현실은 사채업자의 수금원 노릇을 해야 생계를 이어갈 수 있는 가난한 청년. 왼손잡이라는 약점을 가진 데다 제대로 가르쳐줄 스승도, 스폰서도 만나지 못한 그는 설상가상, 사람들을 협박해서 돈을 받아내는 몹쓸 짓에 재능을 낭비하고 있다며 6년이나 다닌 체육관 관장에게도 내쫓긴 신세다. 하지만 록키는 보스의 지시대로 채무자의 손가락을 부러뜨리거나 악랄하게 협박할 줄 모른다. 불량배들과 어울리는 이웃 소녀에게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가 ‘너나 잘하세요’라는 비웃음을 사기도 하는 순수한 남자다.

그런 마음을 보았던 것일까. 짝사랑하던 에이드리언이 마침내 마음을 열고 연인이 되기를 허락한다. “춤도 못 추고 노래도 못해서 권투를 한다”며 싱겁게 농담하던 그에게 “아인슈타인도 두 번이나 낙제했고 베토벤은 귀머거리였고 헬렌 켈러는 앞을 보지 못했다”면서 록키의 꿈을 진심으로 응원한다. 

누구에게나 세 번, 인생의 기회가 온다는 말이 있다. 에이드리언의 사랑을 얻고 나자 마법 같은 문이 또 한 번 열린다. 세계 헤비급 챔피언 아폴로가 미국 독립 200주년을 기념하는 이벤트 경기의 상대 선수로 록키를 지목한 것이다. 예정됐던 도전자가 부상으로 나오지 못하게 된 탓이었는데 아폴로가 워낙 핵 주먹이다 보니 대타로 나와서 체면을 구기고 싶어 하는 유명 선수가 아무도 없었던 것. 이유야 어쨌든 이탈리아 이민자 2세가 아메리칸 드림을 이룰 기회를 얻게 됐다는 것만으로도 록키는 일약 관심의 대상이 된다.

떠들썩한 세상과 무관하게 록키는 차분히 몸을 단련하며 시합을 준비한다. 새벽 4시, 아직 깨어나지 않은 어두운 거리를 달린다. 떠오르는 태양을 향해 두 팔을 높이 추어올리며 이겨보리라, 반드시 이겨서 세상을 놀라게 하리라, 마음을 다진다.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안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그를 매 순간 사로잡는다. 감히 세계 챔피언과 맞선다는 두려움도 나날이 커지기만 한다.

“랭킹 안에도 못 드는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시합 전날 어마어마하게 큰 경기장을 돌아보고 온 그는 작게 움츠러든다. 어찌 보면 아무런 부담 없이 치를 수도 있는 경기였다. 그 누가 무명 선수가 챔피언을 쓰러뜨릴 거라고 기대하겠는가. 아폴로의 주먹을 단 3라운드라도 견딘다면 기특하다 할 시합이었다. 그에게 지급되는 대전료와 아폴로와 맞대결이라는 경력 추가만으로도 행운이라면 행운이었다. 

그러나 인간이란 도전하겠다고 마음먹은 이상 주어진 한계를 훌쩍 뛰어넘어보고 싶어 하는 존재다.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날건달처럼 살아온 인생에 대한 반항이라도 하듯, 록키는 처음으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스스로 증명해 보이고 싶다는 욕망을 느낀다. 그는 이 경기를 타인과의 대결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싸움으로 치환시킨다. ‘록키’가 명작으로 오래 기억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다짐한다. “머리가 터져버려도 상관없어. 15회까지 버티기만 하면 돼. 그때까지 두 발로 서 있을 수 있다면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뭔가를 이뤄낸 순간이 되는 거야.”

가난한 이탈리아 이민자였던 아버지 밑에서 자라며 뉴욕 뒷골목을 전전하던 왕따 소년 실베스터 스탤론은 재혼한 어머니 덕에 대학까지 마칠 수 있었지만, 배우로 성공하겠다는 꿈은 요원하기만 했다. 태어날 당시 의료 사고로 생긴 신경조직의 손상, 그 결과 축 처진 두 눈과 어눌한 발음 탓에 수많은 오디션에서 번번이 떨어지는 좌절을 맛봐야 했다.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이어가며 굶어 죽지 않는 것이 생의 목표였을 정도로 힘들던 시절, 그는 텔레비전으로 권투경기를 보게 된다. 그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는 순간이었다.

1975년 3월,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쏜다’던 권투계의 전설, 무하마드 알리와 무명에 가깝던 척 웨프너의 경기가 열렸다. 척은 3라운드도 못 버틸 거라던 세간의 판단을 무너뜨린다. 알리를 다운시키고 15라운드까지 버텨낸 것이다. 결국 알리가 이기긴 했지만, 그날 척이 보여준 경기는 누구도 예상 못 한 인간의 투지가 그려낸 감동적인 드라마였다.


제작비 적어 28일 만에 완성된 명작

충격을 받은 스탤론은 자신의 가난한 현실과 배우에 대한 꿈을 녹여낸 삼류 복서의 이야기를 단 사흘 만에 한 편의 시나리오로 완성해낸다. 자신을 주연으로 써달라는 조건으로 시나리오를 팔았을 때 그가 갖고 있던 돈은 100달러가 전부였다. 존 G. 아빌드센 감독이 28일 만에 완성한 작품이기도 하다. 무명작가에 무명 배우가 나오는 영화이다 보니 제작비 지원이 적었던 탓이었다. 돈을 아끼기 위해 록키의 의상과 모자, 개와 붕어와 거북이, 심지어 낡고 허름한 아파트와 거울에 꽂혀 있던 어린 시절의 사진까지, 영화에 나오는 장소와 거의 모든 소품을 당시 스탤론의 것을 그대로 사용했다. 

열악한 환경에서 제작된 ‘록키’는 1977년 제49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10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됐고 작품상, 감독상, 편집상을 받았다. 이후 실베스터 스탤론의 시대가 열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Gonna Fly Now’ 선율을 배경으로 미국 필라델피아 미술관 계단에 올라 파이팅하는 록키의 모습은 도전 의식을 고취하는 최고의 명장면으로 앞으로도 오래 기억될 것이다.

꿈이란 인생을 걸고 승부를 던져야 하는 한 판의 도박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단 한 번이라도 모든 걸 내던지고 꿈을 향해 뛰어들어본 사람만이 인생이 얼마나 뜨거운지를 안다. 그렇게 최선을 다했을 때, 세상이 가르는 승패는 중요하지 않다. 이겼든 졌든, 경기 종료를 알리는 종이 울리는 순간, 인생의 무대는 비로소 꿈을 향해 달려갈 수 있는 길을 활짝 열어준다. 새해를 시작하고 작심삼일이 몇 번이나 무너졌을 지금, 차갑게 식은 심장도 뜨겁게 달아오르게 해줄 영화를 찾는다면 주저하지 말고 선택하라.


▒ 김규나
조선일보·부산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 소설 ‘트러스트미’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