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드리스 넬슨스, 코로나19를 이유로 아시아 투어를 취소한 보스턴 심포니 음악감독이다. 사진 로버트 토레스
안드리스 넬슨스, 코로나19를 이유로 아시아 투어를 취소한 보스턴 심포니 음악감독이다. 사진 로버트 토레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해외 오케스트라 대부분이 2~3월에 예정돼 있던 동아시아 투어를 연달아 취소했다.

보스턴 심포니는 악단 대표 명의로 “소속 단원의 건강을 염려해 서울·타이베이·홍콩·상하이 투어를 포기했다”는 내용의 입장문을 냈다. 중국 정부는 우려를 막기 위해 홍콩과 상하이 공연장을 폐쇄했고 공연 기획자들은 상대적으로 안전한 지역에서만 공연을 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오케스트라 입장에선 코로나19가 발생한 곳에서 열리는 장거리 원정 투어를 강행해 얻을 실익이 없다고 판단했다.

워싱턴 내셔널 심포니는 올해 3월 일본과 중국 일대에서 8회에 걸쳐 동아시아 투어 공연을 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워싱턴 내셔널 심포니는 베이징에서 두 번, 상하이에서 한 번 예정돼 있던 공연을 취소하고 일본에서만 공연을 열기로 했다. 워싱턴 내셔널 심포니는 미국 행정부를 공식적으로 대표하는 악단이다. 이 악단은 “미 연방정부의 중국 여행 제한 조치에 따라 공연을 취소한다”고 밝혔다.

홍콩 공연계는 코로나19 확산으로 직격탄을 맞았다. 애초 홍콩에선 2월 13일부터 3월 14일까지 아시아 최대 공연예술축제인 ‘홍콩 아트페스티벌’이 열릴 예정이었다. 그러나 코로나19로 인해 공연 일정 전체가 취소됐다.

캐리 람 홍콩 행정장관은 2월 17일까지 홍콩 아트페스티벌 주 공연장을 폐쇄한다고 발표했다. 이에 개막 공연인 홍콩 신포니에타 콘서트를 시작으로 영국 새들러스 웰스, 윌리엄 포사이스 댄스 컴퍼니, 이란 나심 극단, 영국 브리스톨 올드빅 극장, 쓰촨성 민중극장이 공연을 취소하면서 사태의 추이를 살피던 참이었다.

2월 말로 잡혀있던 몬테카를로 발레단, 바이에른 슈타츠오퍼 공연 역시 취소됐다. 대규모 인원이 장기간 연습해야 하지만 코로나19로 연습을 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었다. 3월 초로 잡혀있는 프라이부르크 바로크 오케스트라, 루체른 페스티벌 스트링스, 이고르 모이세예프 발레단의 홍콩 방문도 취소됐다. 이들은 홍콩 방문 전후로 한국에서도 공연 일정이 잡혀있는 상태라 국내 공연 관계자들도 사태를 주시하고 있다.

유럽과 북미 연주 단체는 동아시아 지역 투어 관련 업무를 주로 영국의 음악 매니지먼트사인 아스코나스홀트, 해리슨패럿, 인터무지카와 미국의 컬럼비아 아티스트 매니지먼트에 맡긴다. 이들 매니지먼트사는 2003년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2015년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 당시, 제한적으로 유럽과 북미 아티스트가 아시아 지역에서 공연하는 것을 도왔다. 하지만 코로나19 앞에선 매니지먼트사가 취할 방법이 막혔다. 중국 정부가 ‘공연장 폐쇄’ 방침을 세운 이상 이에 대응할 카드가 없기 때문이다.

메르스나 코로나19 같은 전염병이 발생하면 국제 투어를 유치한 주최 측은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 2015년 메르스 발생 당시 테너 요나스 카우프만은 내한 공연을 강행했지만, 주최 측은 관객들이 예약을 취소하자 속앓이를 했다.

보통 내한 공연에 참여하는 해외 오케스트라 인원은 100명 이상. 그런데 공연 주최 측은 해외 오케스트라의 내한 공연이 무산돼도 숙박비를 돌려받기 힘들다. 여기다 공연 기획자는 해외 유명 음악 매니지먼트사와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전염병으로 인해 공연이 취소돼도, 이에 대한 비용을 청구하기 힘들다. 공연장 대관료 역시 전액 환불받기 어렵다. 천재지변에 대한 대관료 환불 규정이 명문화돼 있지 않고 천재지변의 범위에 대한 해석이 분분하기 때문이다.

공연 계약 당사자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천재지변에는 보통 홍수, 화재, 전쟁, 폭동 등 불가항력적인 일이 포함된다. 그러나 현행 국제 공연 계약상 전염병, 방사능을 천재지변으로 보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방사능 등과 같은 위험을 천재지변에 준하는 재난으로 간주해야 하는 일이 늘고 있다.


브리스톨 올드빅 시어터의 공연 모습. 홍콩 아트페스티벌 공연은 취소됐다. 사진 지레인트 루이스
브리스톨 올드빅 시어터의 공연 모습. 홍콩 아트페스티벌 공연은 취소됐다. 사진 지레인트 루이스
워싱턴 내셔널 심포니와 음악감독 잔 안드레아 노세다는 중국에서 예정된 3월 공연을 취소했다. 사진 워싱턴 내셔널 심포니
워싱턴 내셔널 심포니와 음악감독 잔 안드레아 노세다는 중국에서 예정된 3월 공연을 취소했다. 사진 워싱턴 내셔널 심포니

국제 공연계, 전염병 대처법 만들어야

2011년 3월 동일본 대지진 이후 후쿠시마 원전 폭발사고가 발생해 방사능 유출 논란을 일으켰던 일을 생각해보자. 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 오케스트라는 그해 3월 말 통영에서 열릴 예정이던 음악제에는 참석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 오케스트라는 방사능을 이유로 불참했다. 주한 오스트리아 대사가 “한국은 방사능 위험에서 안전하다”고 권고했지만, 이마저 무시했다. 오히려 일본 공연계는 이를 계기로 자국에서 열리는 공연 계약서가 규정하는 천재지변에 방사능을 포함했다.

크로아티아 출신 피아니스트 이보 포고렐리치는 2월 초부터 일본, 한국, 중국으로 이어진 투어에 나섰다. 그는 2월 10일 현재 일본에서 공연 중이다. 이보 포고렐리치가 의지를 보이는 이상, 코로나19로 관객이 대폭 줄어든 한국에서도 공연이 열릴 예정이다. 이 경우 공연 주최 측의 손실은 불가피하다.

지금까지 국제 공연계는 전염병이 갖는 심각성을 간과했다. 하지만 코로나19를 계기로 공연 규약에 담긴 ‘불가항력 상황’을 다듬어 전염병에 대처해야 한다.

국내 보험사가 전염병 때문에 취소되는 공연 비용을 보장하는 상품을 내놓은 적은 없다. 야외 공연의 경우 기상 상태를 예측해 보험료를 산정하는 상품을 내놓은 것을 참고할 만하다.


▒ 한정호
에투알클래식&컨설팅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