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락투
메뉴 닭곰탕, 닭칼국수
주소 서울 마포구 서교동 358-83
영업 시간 매일 09:00~21:00


텅 빈 홍대 거리, 간판 대신 임대 현수막을 두른 공실이 넘친다. 마스크로 가려진 표정 없는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흐르고 있는 걸까. 홍대 앞 거리는 사라진 것과 사라질 것들로 가득하다. 홍대입구역사거리에서 홍익대 정문에 이르는 오르막길은 마치 늙어버린 야생 짐승의 굽은 등을 보는 듯 애처롭기까지 하다. 문화의 꼬리만 남아버린 ‘홍대 앞(홍대 앞은 체험 관광지역을 의미하는 통용 이름으로 등록돼 있다)’은 기능이 부재한 용도 범벅의 간판들만 남아있다.

하지만 여전히 건재하게 남아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기능과 용도의 몫을 충실히 하는 식당이 하나 있다.

홍대 앞에는 일상식이 없다. 하지만 일상은 존재한다. 여전히 홍대생들과 예술인 지망생들은 이곳에서 반복되는 생활을 이어간다. 매일 기름진 라멘(일본식 라면)이나 차가운 편의점 도시락으로 연명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홍대 앞 ‘다락투’는 일상식의 사막과 같은 이 동네에서 부담 없는 가격으로 따뜻하고 든든한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는, 맛의 오아시스 같은 곳이다. 홍대 앞에서 잔뼈가 굵은 이들이라면 이곳에서 해장했던 기억이 한 번쯤은 있는 곳이기도 하다.

오래된 밥집이 으레 그러하듯 이곳의 메뉴는 간단하다 못해 단출하다. 닭곰탕과 닭칼국수, 끝이다. 이 단출한 메뉴는 오래전부터 갓 신입생이 된 홍대생들의 첫 번째 ‘해장템(해장에 탁월한 음식 아이템)’이었다.

홍대 앞을 배회했던 술꾼들은 이렇게 증언한다.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봄날, 캠퍼스의 낭만에 취해 선배들이 권하는 잔을 연신 비우다 보면 다음 날은 늘 고통에 취하곤 했다. 배를 부여잡고 있는 신출내기 주정뱅이들을 선배들은 가련하다는 듯 끌고 다락투로 향했다.”

진한 닭 육수에 얼큰한 다진 양념을 풀어, 국물에 풀어진 밥알과 함께 후루룩 들이켜면 태어나서 처음 겪는 해장이라는 신세계가 그들에게 여권을 발급했으리라. 해장을 알게 된 홍익대 새내기들에게 과음과 숙취는 따라서 더는 두려운 존재가 아니었으며, 이곳의 닭 육수는 죽을 때까지 마신 그들을 날마다 부활시키고 또 부활시켰던 것이다.

‘Since 1968’ 즐거움이 넘치는 곳이라는 뜻의 ‘다락(多樂)’은 올해로 53세다. 1979년 서교시장에서 홍대 놀이터 대로변으로 옮기고, 1993년 현재 위치로 한 번 더 이전하며 다락의 시즌2가 시작되었다. 현재는 원조 사장님의 아들이 2대째 운영하고 있다. 그는 아버지에게 배운 대로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경동시장이나 가락시장으로 직접 닭을 사러 간다. 식자재 유통업체에 맡기면 되는 일인데 닭의 신선도가 곰탕 맛을 좌지우지하는 터라 남의 손에 맡길 수가 없다. 그렇게 사 온 생닭을 직접 기름기를 제거하고 잘라내고 내장을 긁어낸다.

그렇게 손질한 닭을 한 번 삶아 살코기는 따로 찢는데, 이때 닭의 살결이 실처럼 한 올 한 올 부풀어 올라와야 신선한 닭이다. 남은 뼈는 대형 솥에 넣고 한 번 더 끓여 육수를 우려내는 데 쓰는데, 마늘과 찹쌀을 넣어 맛을 낸다. 뚝배기 안에 담을 국, 고기, 밥을 모두 준비하면 다진 양념을 만드는 일이 남았다. 고춧가루와 마늘 등 총 9가지 양념을 섞어 한 달간 숙성시킨다.

이렇게 공들여 끓인 닭곰탕은 홍대인들의 속을 달래고 채운다. 닭곰탕 한 그릇 7500원. 서울 평균 점심값에 못 미치는 가격이다. 늘 그래왔다. 다른 곳보다 저렴하게 배고픈 이들의 등허리까지 따뜻하게 데워주는 것이 1대 사장인 아버지에게 배운 경영 철학이다.


다락투의 대표 메뉴 닭곰탕. 밥을 말아서 나온다. 사진 김하늘
다락투의 대표 메뉴 닭곰탕. 밥을 말아서 나온다. 사진 김하늘
다락투의 메뉴판. 사진 김하늘
다락투의 메뉴판. 사진 김하늘

밥 먹고 가라는 말이 ‘백미’

창밖에 하염없이 내리는 눈은 넋을 놓게 했다. 아주 오랜만의 일이었다. 끊임없이 내리는 눈은 사라지다 쌓여 장면을 덮고 또 덮었다. 저 멀리서, 우산 없이 내리는 눈을 어서 오라 맞으며 한 남자가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재난구호 서비스 스타트업 ‘라이프라인’의 김동훈 대표다. 얼마 전 사무실을 홍대 근처로 옮겼다는 소식에 그와 함께 국밥 한 그릇을 약속했다.

나는 보통, 그는 특. 그는 어깨에 내린 눈이 채 다 녹기 전에 주문을 서둘렀다. 이리저리 불려 갈 회의와 교육이 많아 몹시 바쁘다고 했다. 그는 미국과 일본의 재난 대응 훈련 프로그램을 한국 상황에 맞게 변용해서 교육하는 소셜벤처를 운영하고 있다. 개인과 공동체가 재난 발생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전문적으로 교육하는 일이다. 나는 그가 재난을 다루는 비즈니스를 한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것이 왜 정부가 아닌 민간에서의 비즈니스가 되는지 늘 궁금했다.

“우리는 학교에서, 지진이 나면 책상 밑으로 숨으라고 배웠죠. 그런데 만약 주변에 책상이 없다면요?” 그는 내게 물었고 나는 머릿속이 하얘졌다. 나는 그렇게 재난을 맞이했다. 재난이란, 사전적으로 ‘뜻밖에 일어난 재앙과 고난’ 을 뜻한다. 우리는 뜻밖의 운명을 맞이하며 살아간다. 우리는 모두 잠재적인 재난의 희생자다. 하지만 우리는 미래를 치킨 주문하듯 비관 반, 낙관 반 누구보다 성실하게 살아간다. 한강이 보이는 브랜드 고층 아파트를 그리며 현재를 적금 붓듯 살아간다. 우리에게 재난이란 통장에 돈이 사라지는 것, 주가가 하락하는 것, 전셋값이 폭등하는 것이다. 몸을 싣고 있는 배가 침몰하거나 집 뒷산에 산불이 나는 재난을 앞에 둔 우리는 무력하기만 하다.

요즘 같은 바이러스 시대에 마스크와 손 세정제가 없다면 우리는 어쩌면 불신과 혐오를 차곡차곡 쌓으며 어딘가 격리돼 있을지 모른다. “재난은 평등하지 않아요.” 땀을 뻘뻘 흘리며 국밥을 마시기 바쁜 그는 다시 운을 띄웠다. ‘생각지도 못한 일’은 누구에게나 벌어질 수 있지만 이에 대한 대처 능력에도 격차가 있다고 했다. 재난에도 약자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실제 행정상 환자, 장애인, 임산부, 독거노인 등이 재난 취약계층으로 분류된다. 태풍이 온다면 중산층은 창문 정도 깨지겠지만 그렇지 못한 가구는 지붕이 날아가거나 벽이 부서지기도 하는데, 이런 재난 약자마저 챙길 수 있도록 그들을 교육하고 시스템에 반영하는 것이 목표라고 그는 열변을 토했다.

그에게 재난구호 서비스의 백미는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는 창밖을 보며 어느 날을 회상하는 듯했다. “2019년 4월 강원도 고성 산불 때, 이재민 한 분이 저를 밥상 앞에 끌어 앉혀 놓고 밥 먹고 가라고 구호 물품들까지 챙겨 주셨는데 그때가 생각나네요. ‘밥 먹고 가’라는 말, 그 말이 저한테는 이 일의 백미입니다.”

계절이 교차한다. 참았던 눈물 쏟듯 내린 봄눈은 만개의 티끌을 덮는다. 불현듯 찾아 든 열병의 시름도 차츰 잦아든다. 손목 위에 쌓인 눈도 기척 없이 사라진다. 겨울이 봄에 녹는다.


▒ 김하늘
외식 컨설팅 회사 ‘라이스앤컴퍼니’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