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버리의 올 블랙 턱시도를 입은 봉준호 감독. 해외 주요 패션 언론들이 선정한 제92회 아카데미 ‘베스트 드레스드 맨’의 한 명으로 갈채 받았다. 사진 연합뉴스
버버리의 올 블랙 턱시도를 입은 봉준호 감독. 해외 주요 패션 언론들이 선정한 제92회 아카데미 ‘베스트 드레스드 맨’의 한 명으로 갈채 받았다. 사진 연합뉴스

아카데미 시상식의 레드 카펫은 패션쇼의 런웨이와 같다. 아카데미에 초대된 셀러브리티(유명인)는 수개월 전부터 드레스와 슈트를 선별한다. 패션 브랜드는 톱스타와 셀러브리티들을 향해 치열하게 마케팅 전쟁을 펼친다. 레드 카펫에서 포즈를 취하는 여배우들은 한결같이 “오늘 어떤 드레스를 입었죠”라는 질문을 받는다. 배우들의 입에서 샤넬, 프라다, 펜디 등과 같은 패션 브랜드 이름이 흘러나올 때마다 각 브랜드는 천문학적 규모의 마케팅 효과를 누린다.

레드 카펫의 주인공이 여자 배우와 셀러브리티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남자 배우와 셀러브리티도 멋진 슈트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 주요 패션 매체들은 아카데미 시상식의 ‘베스트 드레스드 맨(Best Dressed Men)’을 앞다퉈 선정한다.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 ‘베스트 드레스드 맨’ 중에선 단연 영화 ‘기생충’의 봉준호 감독이 눈에 띈다. 봉 감독은 한국 남자 영화인 최초로 해외 주요 패션 언론이 선정한 ‘베스트 드레스드 맨’에 올랐다.

해외 패션 언론은 봉 감독의 영화만큼 그의 올 블랙 턱시도에 기립 박수를 보냈다. 봉 감독은 영국의 명품 패션 브랜드 버버리(Burberry)의 턱시도 슈트를 입었다. 버버리 코리아뿐 아니라 영국의 버버리 본사에서 봉 감독에게 열정적인 러브콜을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버버리는 공식 인스타그램에 봉 감독이 트로피를 들고 있는 사진을 재빠르게 올렸다. 버버리는 “봉 감독의 수상을 축하한다”며 “그가 버버리의 ‘잉글리시 핏 턱시도’와 ‘더비 슈즈(Derby Shoes·신발 끈을 꿰는 두 개의 탭이 날개처럼 디자인된 슈즈로 승마 경기에서 경주마가 출발하는 ‘더비 게이트’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를 착용했다”고 설명했다. 

봉 감독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입은 슈트는 그의 영화처럼 여러 장르가 혼합돼 있다. 반짝이는 실크 소재의 숄 칼라(shawl collar·둥글게 재단돼 턱시도 재킷에 많이 사용되는데, 숄을 두른 것 같다고 붙여진 이름)와 단추, 블랙 보타이는 클래식한 조합을 이룬다. 여기에 블랙 드레스 셔츠와 반짝이는 페이턴트 레더(patent leather·유광의 에나멜가죽) 구두를 더해 모던한 시상식 정장룩을 완성했다.

‘더 뉴요커’는 “봉준호의 모노크로마틱(monochromatic·패션에서 단색을 주로 칭하는 명칭) 블랙 턱시도는 매우 세련되고 군더더기 없이 심플하다”라고 평가했다. 유명 남성 패션지 ‘에스콰이어’는 “봉 감독은 모노크롬(monochrome·단색) 턱시도의 마스터”라고 찬사를 보냈다.

봉 감독과 함께 아카데미 수상의 영광을 누린 배우 이선균도 올 블랙 턱시도를 선택했다. 그는 명품 브랜드 벨루티(Berluti)의 가죽 숄 칼라 턱시도, 블랙 드레스 셔츠, 실크 보타이, 옥스퍼드 슈즈(oxford shoes·끈을 매어 신는 슈즈로 17세기 영국 옥스퍼드 대학생들이 처음 신어 붙여진 이름)를 입고 신었다. 이선균 역시 전체적으로 클래식하지만, 가죽 숄 칼라가 덧대어진 턱시도 재킷과 블랙 드레스 셔츠로 모던한 이미지를 한층 더했다. 

올 블랙의 턱시도 룩을 아카데미 룩으로 선택한 건, 봉 감독과 배우 이선균뿐만이 아니다. 수많은 할리우드 스타들이 올 블랙을 입거나 블랙 턱시도와 보타이, 화이트 드레스 셔츠의 전통적인 턱시도 룩을 입고 그들만의 매력적인 ‘블랙 턱시도 리그’를 펼쳤다. 에스콰이어, 보그 등 유명 패션지들이 “2020년 제92회 아카데미의 승자는 블랙 턱시도다”라고 평가할 정도다.


왼쪽 구찌가 디자인한 슈트에 나이키의 ‘코비 엘리트’ 슈즈를 신은 영화감독 스파이크 리. 코비 브라이언트를 추모하는 슈트 룩이다. 사진 연합뉴스 / 오른쪽 스텔라 매카트니의 턱시도를 입은 호아킨 피닉스. 5개의 시상식에서 같은 턱시도를 입어 ‘지속 가능한 패션’의 정신을 실천했다. 사진 연합뉴스
왼쪽 구찌가 디자인한 슈트에 나이키의 ‘코비 엘리트’ 슈즈를 신은 영화감독 스파이크 리. 코비 브라이언트를 추모하는 슈트 룩이다. 사진 연합뉴스
오른쪽 스텔라 매카트니의 턱시도를 입은 호아킨 피닉스. 5개의 시상식에서 같은 턱시도를 입어 ‘지속 가능한 패션’의 정신을 실천했다. 사진 연합뉴스

호아킨 피닉스, 블랙 턱시도에 신념 담다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은 배우 호아킨 피닉스의 턱시도 슈트는 특별했다. 그는 영국 디자이너 스텔라 매카트니가 만든 클래식한 블랙 턱시도를 입었다. 호아킨 피닉스는 골든 글로브, 크리틱스 초이스 어워드, SAG 어워드, 영국판 아카데미상인 BAFTAs에 이어 다섯 번이나 똑같은 슈트를 입었다.

호아킨 피닉스가 같은 슈트를 계속 입은 이유는 불필요한 낭비를 줄이는 ‘지속 가능한 패션(서스테이너블 패션·Sustainable Fashion)’의 지지자이기 때문이다. 지속 가능한 패션은 미래 세대를 위해 현존하는 자원을 낭비하거나 훼손시키지 않기 위해 패션 제품의 생산·사용·폐기 과정을 친환경적으로 변화시키는 운동이다.

그가 스텔라 매카트니의 의상을 선택한 이유 역시 지속 가능한 패션을 지지하기 위해서다. 전설의 록 밴드 비틀스의 멤버 폴 매카트니의 딸이기도 한 스텔라 매카트니는 호아킨 피닉스와 함께 대표적인 동물 보호주의자이자 채식주의자로 통한다.

호아킨 피닉스는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수상 후, 성대한 축하 파티에 참석하지 않았다. 대신 여배우인 아내 루나 마리와 함께 채식 버거 가게를 찾아 둘만의 소소한 축하 파티를 했다. 호아킨 피닉스가 스텔라 매카트니의 블랙 턱시도를 입고, 금빛 오스카 트로피를 옆에 둔 채 그의 소울 메이트 루나 마리와 채식 버거 가게 문 앞 바닥에 편하게 앉아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공개되기도 했다.

기존의 아카데미 슈트 룩의 공식을 깬 사람도 있다. 미국 영화감독 스파이크 리는 보라색에 골드 라인이 장식된 슈트에 보라색 뿔테 안경, 나이키 운동화를 신고 등장했다. 이는 얼마 전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NBA 전설 코비 브라이언트를 추모하기 위한 것이다. 스파이크 리가 입은 슈트에 붙은 숫자 24는 코비 브라이언트가 LA 레이커스에서 달고 뛴 등 번호이며, 슈트 색은 LA 레이커스의 유니폼 컬러와 동일한 것으로 구찌가 특별히 제작했다. 그가 신은 주황색의 신발 역시 코비 브라이언트와 나이키가 협업했던 제품이다.

제92회 아카데미는 국재 장편 영화가 감독상과 작품상을 최초로 수상한 역사적인 순간을 만들었다. 동시에 세상을 변화시키고 장벽을 허문 남자 배우와 감독을 통해, 시상식 슈트 룩도 새로운 역사의 문을 열었다.


▒ 김의향
패션&스타일 칼럼니스트, 케이 노트(K_note) 대표

김의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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