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 의사 전미경. 현재 굿모닝정신의학과 원장으로 천안에서 대학생과 직장인 환자를 주로 본다. 자존감 문제를 과거 상처를 다루는 오류에서 벗어나 살면서 키워야 할 능력으로 접근했다. 사진 박상훈 조선일보 기자
정신과 의사 전미경. 현재 굿모닝정신의학과 원장으로 천안에서 대학생과 직장인 환자를 주로 본다. 자존감 문제를 과거 상처를 다루는 오류에서 벗어나 살면서 키워야 할 능력으로 접근했다. 사진 박상훈 조선일보 기자

세상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과 자존감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깨어있는 시간 대부분을 타인과 과거에 몰두한다. 스스로에게 가장 가혹한 타자가 되어 “너는 왜 그 모양이니?”라고 마음의 채찍을 휘두른다. 타인의 칭찬은 일회용 반창고일 뿐이며 오히려 불안의 내성을 키우는 항생제가 된다.

정신과 의사 전미경은 하루빨리 그 낮은 자존감의 수레바퀴에서 빠져나오라고 조언한다. 그건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지성의 문제라고. 그가 쓴 책 ‘나를 아프게 하지 않는다’는 ‘가짜 자존감과 진짜 자존감’이라는 카피로 눈길을 사로잡는다. 진짜 자존감은 인생이라는 광야에 자율성과 연대감이라는 두 날개를 펼쳐, 지성과 도덕성의 연료를 태워 날아간다. 조종석엔 자기 효능과 자기 가치라는 두 개의 핸들이 있다.

트라우마와 대인 관계를 파고들었던 기존의 정적인 자존감과는 사뭇 다르다. 그는 자존감이 낮은 사람보다 자존감이 낮았다 높아진 사람에게 주목했다. 스스로 이룬 성취 경험이 있고 그 과정에서 좋은 사람을 만나 긍정적인 인간관계를 경험하면 자존감은 자연스럽게 올라간다.

과거의 상처, 타인의 비난을 묵상하다 ‘낮은 자존감의 도돌이표’를 겪은 사람이라면 전미경의 말에 귀를 기울일 만하다. ‘나는 괜찮다’는 자기 위로는 ‘나는 잘못되지 않았다’는 자기 판단으로 대체돼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무엇이 자존감의 높낮이를 결정하나.
“사실 자존감을 검색해 보면 나오는 논문이 없다. 자존감은 측정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자존감은 일종의 문화적인 용어다. 다만 분명한 건 자존감이 높으면 행복하고 자존감이 낮으면 덜 행복하다는 거다.”

합의된 실체가 없다는 말인가.
“아니다. 심리학자인 너새니얼 브랜든은 자존감의 실체를 두 가지로 규명했다. ‘나는 능력 있다’라는 자기 효능감과 ‘나는 괜찮은 사람이다’라는 자기 가치감. ‘나는 쓸 만하고, 나는 좋은 사람’이라는 셀프 개념. 나의 효용과 나의 가치에 대한 자기 판단, 그게 자존감이다.”

측정은 셀프로군!
“맞다. 자기 평가다. 그래서 자존감을 그대로 뒤집으면 열등감이 된다. ‘나는 무능력하다’와 ‘나는 사랑받을 수 없다’. 이것을 찾아내고 교정하는 것이 인지행동치료다.”

낮은 자존감, ‘나는 무능력하다’와 ‘나는 사랑받을 수 없다’는 생각은 교정될 수 있나.
“여기서 중요하게 올라오는 게 자율성이다. 자기 효능감을 느끼려면 내가 주도적으로 살아야 한다. 삶의 컨트롤 타워는 내가 돼야 한다. 거기엔 경제적인 독립과 능력도 포함된다. 그래서 아버지가 강남에 집 사주고, 사사건건 간섭하면 자식의 자존감은 떨어진다. 시어머니가 부당한 요구로 컨트롤 키를 건드리면 며느리는 무기력해진다. 부모 자식, 부부, 연인 사이에서 컨트롤 프릭(control freak·통제광)이 상대방의 자존감 에너지를 뺏어간다. 낮은 자존감에서 빠져나오려면 자율성을 회복해야 한다.”

책에서 그는 자존감은 감정 상태가 아니라 생각하는 능력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자율적인 존재로 살아가기 위한 사고 능력에 가깝다는 것.

자존감은 감정이 아닌가.
“감정은 자동 반응이다. 수시로 고양되고 무너진다. 아무리 ‘마음을 내려놓으라’고 해도 안 내려진다.(웃음) 자존감에서 감정과 이성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간다. 왜 불안하지? 왜 슬프지?라고 묻고 솔루션을 찾아야 한다. 자존감이 낮은 분들은 대개 지성이 떨어진다. 지성은 지능이 아니라 합리적인 판단, 적극적 사고의 힘이다. 실직했다고 인생이 끝장났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다. 자기 콘텐츠를 기준 삼아야 하는데 없으니, 사회가 내린 편견에 의존하는 거다. 엄마 아빠가 ‘너 이혼했으니 큰일 났다’고 해도, ‘나는 잘못되지 않았다’라고 나를 설득시킬 힘이 있으면 된다. 그게 지성이고 자아의 힘이다. 사실 내적 갈등만 조절해도 세상이 얼마나 살 만한가?”

‘나는 잘못되지 않았다’는 지적 각성이 나를 지키는 견고한 방패막이라는 건가.
“맞다. 모욕을 당했을 때 ‘나는 괜찮다’가 아니라 ‘나는 잘못되지 않았다’는 말로 바꿔야 한다. 자기 위로를 자기 판단으로 바꿔야 한다. 승진에 밀렸어도 누군가 무례를 범해도 ‘나는 잘못되지 않았다’는 각성이 나를 보호한다. 집이 가난해도, 과거에 힘든 일(부모의 학대 등)을 당했어도 내가 잘못된 게 아니다. 억지로 ‘괜찮다’는 것은 감정의 부정일 뿐. 행복해지려면 나만의 가치로 내 삶을 방어해야 한다.”

정당한 비판에 귀를 닫으라는 말이 아니라고 했다. 비난과 편견에 대항하는 힘을 기르라는 말.


“행복해지려면 ‘나는 잘못되지 않았다’는 자존감으로 내 삶을 방어해야 한다.” 사진 박상훈 조선일보 기자
“행복해지려면 ‘나는 잘못되지 않았다’는 자존감으로 내 삶을 방어해야 한다.” 사진 박상훈 조선일보 기자

트라우마 이야기를 해보자. 어떤 사람은 낮은 자존감 상태를 원하기 때문에 과거의 트라우마를 이용하고 있다고. 무슨 말인가.
“아들러가 한 말이다. 트라우마에 집착하면 모든 에너지를 ‘내가 문제 있다’는 결론을 내리는 데 쓴다. 지금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 과거를 핑계 대는 거다. 일종의 방어 기제다. 누가 봐도 이혼이 해결책인데도 개과천선이 안 되는 배우자와 그냥 산다. 과거 부모의 이혼 트라우마를 대면서. 자존감이 낮다고 여기는 분들은 자꾸 트라우마 뒤로 숨는데, 아니다. 근본적으로 자율성이 부족하다. 나이가 들어서도 무책임한 사람은 대개 10대 수준의 자율성과 연대감에 머물러 있다. 이럴 때 자존감을 높이려면 용기를 내서 ‘일단 해!’가 답이다.”

일단 가짜 자존감과 진짜 자존감을 구분하라는 말이 귀에 박힌다.
“인터넷에서 이런 댓글을 읽었다. ‘요즘은 개나 소나 자존감 팔아먹네. 진짜 자존감은 벤츠에서 나온다!’ 이게 전형적인 가짜 자존감이다. 열심히 살다 보면 벤츠를 탈 수도 있다. 하지만 벤츠에 기대는 건 가짜다. 자존감의 기준이 ‘타인’과 ‘환경’과 ‘과거’에 있다면 그건 가짜다. 잘난 사람과 끝없이 비교하고 과거에서 한 발자국도 못 나간 채 산다면, 가짜 자존감의 세상에 사는 거다. 대인관계와 트라우마만 파고 있으면, 심리학 책 백날 읽어도 자존감은 도돌이표다. 원인 분석은 그만하고, 지금 있는 현실에서 자존감을 끌어올리는 전략을 취해야 한다.”

방법은.
“바꿀 수 없는 과거와 타인에게 집착하지 말고, 현재 상태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찾아야 한다.”

진짜 자존감의 세상엔 무엇이 있나.
“자존감이 낮았다가 높아진 사람을 분석했더니 4가지가 있었다. 첫째로 지성, 합리적인 정보로 쌓은 분별력이다. 둘째는 도덕성, 남이 보기에도 괜찮고 자신도 정직하다고 생각한다. 셋째가 긍정 정서, 의식적으로 네거티브를 덮을 수 있는 좋은 기억을 많이 쌓는다. 넷째 자기 조절력, 인내와 몰입으로 작은 성취를 끌어낸다. 이 4가지는 내가 노력하면 기를 수 있는 것들이다.”

우선순위가 있나.
“없다. 하지만 자기 조절력이 나머지 3가지를 받쳐주는 엔진 역할을 한다. 뭔가를 해내는 힘이니까. 자기 조절력이 강하면 타인이 함부로 대할 수 없다.”

한편 어린 시절을 가난과 결핍 속에 보내고도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 있다. 그 힘은 어디서 나온 걸까.
“빈민가에서 학대를 받았어도 잘된 사람이 있다. 연구 결과를 보면 공통점이 있다. 그 사람의 입장을 무조건 이해해 주고 사랑해 주는 어른이 적어도 그 아이 일생에 한 명은 있었다. 이모, 할머니든, 선생님이나 옆집 아줌마라도 말이다. 자신을 믿어주고 대가 없는 선의를 베풀어준 누군가가 자존의 등불이 된 거다. 촛불이 어둠을 밝히고 햇볕이 옷을 벗기듯 긍정이 오면 부정이 없어진다.”

반면 인생이 무난 평탄해도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왜 그런가.
“직업도 좋고 부부 관계도 나쁘지 않은데 자존감이 낮은 환자가 있었다. 알고 보니 삶의 컨트롤 타워가 내가 아니라 부모였다. 내가 결정해서 가치를 찾아가면 인생이 마냥 무난 평탄할 수는 없다. 굴곡도 있고 재미도 있다. 반면 부모가 알아서 과외시키고 대학에, 결혼까지 결정해버리면 자존감이 낮다. 자기 콘텐츠가 없으니 인생에 의미가 없는 거다.”

자존감은 일평생 높아졌다 낮아지기를 반복한다. 그럼에도 십대들은 아예 꿈이 없으며, 20~30대가 되면 자존감이 가장 추락한다는 사실은 충격적이었다.
“사실이다. 요즘 한국의 10대는 초등 6학년 때 이미 고3 미적분 수학을 푼다. 선행된 룰만 따라가기도 벅차다. 그렇게 20~30대가 되면 역사상 최초로 부모보다 가난한 세대라는 운명을 받아들여야 한다. 경쟁이 심해서 성장기에 자율성과 연대감을 발휘할 기회도 못 가졌다. 당장은 취직을 못 하니 기본이 흔들린다. 밥벌이를 못 하는 성인이 자존감이 높을 리 없다.”

해결책이 있을까.
“자존감 높은 사람 곁에는 반드시 자기 자존감의 내용을 채워주는 좋은 사람이 있다. 문제는 현재 20대 대부분이 멘토가 없다는 거다. 부모, 스승, 직장 선배… 누구도 멘토가 안 된다. 부모는 단점만 파고든다. 어떻게든 멘토를 찾아야 한다. 대단한 사람일 필요는 없다. 자기 삶을 존중하며 살아가는 사람이면 된다. 주변에 없으면 어릴 때 읽은 위인전에서라도 자존감 모델을 접해야 한다.”

부모는 어떻게 해야 하나.
“부모는 그 자신의 인품과 자식 존중밖에는 답이 없다. 좋은 대학 못 가느냐고 다그치면, ‘강남 아파트 한 채도 못 사주냐’는 말을 듣는다. 너무 칭찬만 퍼부어도 남의 눈치 보고 휘둘리는 삶을 산다. 어릴 때부터 자기 결정권을 주고 무언가를 해내면 그냥 함께 기뻐해 주라.”

현대 사회에서는 도덕성이 갈수록 자존감에 더 큰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맞다. 윤리가 약하면 자신을 후진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비윤리적인 사람과 있거나 사악한 기업에서 일해도 자존감이 떨어진다. 내가 부족해서 이 관계를 끝내지 못한다는 자괴감에 시달리기 때문이다. 반대로 윤리적인 조직은 역경을 이겨내는 힘도 강하다. 결정적으로 도덕성에 문제가 있으면 타인에게 인생의 고삐를 넘겨주게 된다. 바람피우거나 사기를 친 사람들은 발각될까 불안해 끊임없이 눈치를 보며 살지 않나?”

마지막으로 진정한 나로 살기 원하는 사람을 위해 조언을 부탁한다.
“과거에 사로잡히지 말라. ‘과거의 나’를 ‘불쌍한 나’로, ‘오늘의 나’를 ‘거짓된 나’로 설정하면 결코 ‘진정한 나’에 도달할 수 없다. 트라우마를 확대 해석하지 말고, 오히려 그 에너지로 작은 성취와 몰입을 경험해 보라. 책 많이 읽고 여행하라. 독서는 지적인 콘텐츠를, 여행은 타인의 환대 콘텐츠를 쌓을 수 있어 좋다. 나만의 콘텐츠를 만드는 일이 곧 지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