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립 탐정 기티스(잭 니콜슨·왼쪽)는 진실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코를 베이는 테러를 당하는 등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긴다. 기티스는 숨겨졌던 음모가 드러나는 과정에서 자신을 믿고 의지했던 에벌린(페이 더너웨이)을 위험에 빠뜨리기도 한다. 오랜 세월 묻어뒀던 비밀이 모습을 드러내며 영화는 최악의 결말로 치닫는다. 사진 IMDB
사립 탐정 기티스(잭 니콜슨·왼쪽)는 진실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코를 베이는 테러를 당하는 등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긴다. 기티스는 숨겨졌던 음모가 드러나는 과정에서 자신을 믿고 의지했던 에벌린(페이 더너웨이)을 위험에 빠뜨리기도 한다. 오랜 세월 묻어뒀던 비밀이 모습을 드러내며 영화는 최악의 결말로 치닫는다. 사진 IMDB

“모든 사건에는 여자가 있지요.” 영화 ‘차이나타운(1974)’의 여주인공 에벌린의 유명한 대사다. 그러나 큰 사건일수록, 실체가 드러나지 않는 복잡한 사건일수록 파고들어가 보면 그 뿌리는 돈이다. 낭만적이지는 않더라도 인간의 본질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말한다. “모든 사건에는 돈이 있지요.”

전직 경찰 기티스는 말이 좋아 사립 탐정이지 불륜 현장 포착을 전문으로 하는 흥신소 소장이다. 그는 남편의 외도를 의심하는 멀레이 부인의 방문을 받고 홀리스 멀레이의 뒷조사를 시작한다. 메마른 강바닥만 지루하게 조사하고 다니던 홀리스는 마침내 젊은 여자를 만나고, 기티스는 그들의 다정한 모습이 찍힌 사진을 의뢰인에게 보내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한다. 그런데 다음 날 ‘수자원관리국 국장의 추문’이란 기사가 사진과 함께 신문에 크게 실린다. 게다가 멀레이의 진짜 아내라며 미모의 에벌린이 사무실에 찾아와 항의한다. 얼마 뒤 홀리스는 익사체로 발견된다.

기티스는 정체 모를 음모에 자신이 이용당했다는 걸 알고 화가 난다. 질투심 때문에 남편을 죽인 것 아닌가 의심도 해보지만, 에벌린은 진상을 밝혀달라며 정식으로 사건을 의뢰한다. 로스앤젤레스(LA)의 거물이자 에벌린의 아버지, 노아 크로스도 홀리스가 만난 젊은 여자를 찾아달라며 많은 돈을 제시한다. 에벌린이 앙심을 품고 그 여자를 해칠지도 모르니 찾아서 보호해야 한다는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를 댄다.

에벌린과 크로스, 두 부녀가 각각 중요한 정보를 숨기고 있다고 생각한 기티스는 전직 경찰이었던 실력을 발휘, 사건의 진실을 파헤쳐간다. 바닥을 드러낸 강에서 익사체가 발견되는 이상한 사건이 또 발생하고 가짜 멀레이 부인도 살해당한다. 기티스는 의문의 사건들이 최근 진행되고 있는 댐 건설 사업과 관련돼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댐 사업 계획은 사기극이었다. 사업자들은 농지로 흘러가야 할 물을 엉뚱한 곳에 계속 방류해 버림으로써 그렇잖아도 가뭄으로 메말라 가던 농지들을 완전히 쓸모없게 만들어버렸다. 피눈물을 흘리는 농민들에게서 헐값에 땅을 사들인 다음 물을 다시 흐르게 한 뒤 비싼 값에 되팔아 이익을 남기려는 게 목적이었던 것. LA의 지반이 약해서 수압을 견딜 수 없다는 이유로 댐 건설을 반대해온 홀리스가 사기극의 전모마저 알게 되자 살해당한 것이다. 사기와 협박 그리고 살인의 배후에는 LA의 정·재계를 쥐락펴락하는 크로스가 있었다.

진실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기티스도 코를 베이는 테러를 당하는 등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긴다. 나쁜 일과 좋은 일은 늘 같이 온다고 했던가. 쫓고 쫓기는 위기를 함께 겪은 기티스와 에벌린은 사랑을 나누는 관계로 발전한다. 하지만 홀리스가 만났던 어린 여자를 에벌린이 숨겨두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기티스는 그녀를 다시 의심하게 된다. 그 결과 기티스는 자신을 믿고 의지했던 에벌린을 위험에 빠뜨리게 되고 오랜 세월 묻어뒀던 비밀이 모습을 드러내며 영화는 최악의 결말로 치닫는다.

제목이 ‘차이나타운’이지만 영화의 주 배경이 차이나타운은 아니다. 하지만 과거와 현재의 모든 비극은 차이나타운에서 벌어진다. 가난한 중국인이 모여 사는 거리, 거대한 권력과 자본이 뒤에서 움직이며 불법과 부패가 만연한 그곳에는 기티스조차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가 묻혀 있다. 그는 형사를 그만둬야 했던 사연을 묻는 에벌린에게 말한다.

“차이나타운이니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르지.”

기티스는 차이나타운에서 형사로 재직 중일 때 사랑하는 여자를 잃은 가슴 아픈 기억이 있다. 과거의 불행은 현실에서 다시 반복된다. 블랙홀처럼 모든 범죄를 빨아들이는 어둠의 거리, 선한 것은 살아남지 못하고 악은 더욱 강성해져서 과거의 추한 범행이 되풀이될 것을 암시하며 영화가 끝난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비극을 바라보며 또다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기티스에게 동료가 위로하듯 말한다.

“잊어버려, 여기는 차이나타운이잖아.”


코로나19로 다시 보는 필름 누아르의 걸작

영화 팬이라면 이름이 낯설지 않을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1974년 작품이다. 같은 해에 발표된 ‘대부 2’가 아카데미 6개 부문을 석권하면서 시나리오 작가인 로버트 타운에게 각본상 하나만을 안겨주었지만, 필름 누아르 최고의 작품 중 하나로 손꼽힌다. 젊은 시절의 잭 니콜슨과 페이 더너웨이의 매력만으로도 화면에서 시선을 떼기 싫어진다. 하지만 이 영화의 진짜 가치는 ‘시나리오 작법의 정석’이라 할 정도로 앞뒤 빈틈없는 플롯(구성)에 있다. 작가가 감춰둔 장치들을 찾아 연결해보는 재미는 이 영화가 관객에게 주는 색다른 선물이 될 것이다.

사실 영화보다 더 극적인 스토리를 가진 건 로만 폴란스키 감독이다. 폴란드 출신의 블라디슬로프 스필만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피아니스트’를 연출했던 그는 2003년 이 작품으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받았지만, 시상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13세 미성년자 성추행 혐의로 해외 도피 중이었기 때문이었다. 2009년에 체포됐다가 엄청난 보석금을 내고 풀려났지만, 이후에도 그에 대한 성추문은 끊이지 않았다. ‘차이나타운’의 주요 인물, 크로스와 묘하게도 매치되는 부분이다.

기티스의 코를 칼로 베는 역할로 잠깐 얼굴을 비치기도 했던 로만 폴란스키는 ‘차이나타운’의 결말을 두고 시나리오 작가와 갈등이 많았다고 한다. 악이 소멸하고 행복과 사랑을 암시하는 결론을 원했던 작가 의도와는 반대로 영화는 아무런 희망 없이 끝난다. 어린 시절 나치 치하를 경험한 데다 1969년, 악명 높았던 연쇄살인범 찰스 멘슨 일당에게 아내와 배속에 든 아기까지 잃는 끔찍한 참극을 겪은 그에게 해피엔딩을 바라는 건 무리였을 것이다.

1930년대의 차이나타운을 배경으로 인간의 추악한 욕망을 그려낸 이 영화는 미국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비판을 담은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러나 개봉 후 45여 년의 세월이 지나고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세계인의 시선이 중국으로 집중되고 있는 지금, 다시 보는 ‘차이나타운’은 조금 다르게 와 닿는다.

권력과 부를 거머쥐기 위해 자행되는 범죄들이 단지 미국과 자본주의, 물질문명 속에서만 존재해온 것이겠는가. 이념 불문, 국적 불문, 인종 불문, 시대 불문, 사람 사는 곳이라면 언제 어디서든 상상 이상의 사건들이 벌어졌을 것이다. 다만 모른 채 덮고 살아왔던 것 아닐까. 모든 사건의 뿌리에는 인간의 욕망이 뒤엉켜 있다는 것을. 기티스에게 들려준 동료의 말처럼, “잊어버려, 여기는 차이나타운이잖아” 하면서.


▒ 김규나
조선일보·부산일보 신춘문예a 단편소설 당선, 소설 ‘트러스트미’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