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영웅이 형과 탁이 형, 많은 형님과 무대에 설 수 있어서, 최종 7명에 들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드리고, 고향 대구·경북에서 어려움을 겪는 분들 많은데, 또 의료진분들 고생하시는데 힘내시고 희망 되찾길 바랍니다.”
무명의 대학생이 보여준 신선한 반란. 3월 14일, 3개월간의 대단원의 막을 내린 TV조선 ‘내일은 미스터트롯(이하 미스터트롯)’에서 ‘미’의 타이틀을 안은 이찬원(24)은 이날 찬란하게 원 없이 빛났다. ‘아름다움’을 뜻하는 ‘미’를 보여주듯, 짧은 소감에도 진중함과 배려미를 듬뿍 갖추고 있었다. 시청자를 향해 큰절을 올린 뒤, 서로 얼싸안으며 눈물로 함께 기뻐하는 뭉클함을 연출했던 이찬원. 결승 우승자를 가려야 할 3월 12일 773만 표가 넘는 국민 투표 집계 문제로 결승 발표가 미뤄진 당시 상황을 지혜롭게 대처하며 ‘신의 진행’이란 찬사를 들었던 김성주 MC를 향해 “결승전 생방송 때 김성주 선배님을 왜 ‘명MC’라 부르는지를 새삼 알게 됐다. 김성주 선배님께 힘찬 박수 부탁드린다”고 시청자의 박수를 끌어내기도 했다.
언뜻 평범해 보였기에 더 빛났다. TV조선 ‘미스터트롯’이 거둔 수확은 단지 트로트를 좋아하는 대학생 이찬원이 수많은 경쟁자 속에 그 난관을 헤치고 굳건하게 살아남아 최종 결승에서 ‘미’라는 타이틀을 따냈다는 데 그치지 않는다. 누가 알아주든 말든 자신이 좋아하는 걸 끝까지 밀어붙이며 주어진 기회를 잡아서, 결국은 자신에게 의구심을 보냈던 이들마저도 그의 편으로 만들어 냈다는 데 있다. 35.7%의 경이적인 시청률을 기록하며 매번 신기록을 경신할 수 있었던 건, 기존 트로트 판에서 보기 힘들었던 1030세대 유입이 한몫했다. 그 중심에 이찬원이 있다. 보들보들 순둥순둥 동글동글 만두상에 ‘꽃받침’ 애교를 즐기는 ‘귀염 뽀짝’ 1996년생이지만, 트로트 얘기를 읊으며 ‘음홧홧’을 내뿜을 땐 ‘어르신’이 빙의한 듯하다. 붓대 잡고 쓸 거 같은 궁서체 글씨에 ‘킬포(킬링 포인트)’ 같은 유행어는 모르면서 ‘지도 편달’ ‘해방둥이’ ‘번창’ 같은 용어를 구사해 가끔은 구한말에 태어난 ‘선비’ 같은 느낌도 자아낸다. 귀여운 외모든 애교 많은 어투든 대충 입는 차림새든 그 모든 것을 뛰어넘는 목소리가 있다. 그는 소화 불가능해 보이는 의상마저도 노래의 도구 삼아 실력으로 승화시켰다. 어쩌면 그간 완벽하게 정돈된 짜인 모습들에 피로를 느꼈던 이들이라면 더 동의할 수 있을 것 같다. 왜 이찬원, 그의 ‘보통의 모습’에 우리가 빠질 수밖에 없는지를.
최근 만난 이찬원은 “25년 트로트 외길 인생”이라고 그가 꾸준히 말했던 것처럼 트로트에 살고 트로트에 죽는 사내였다. 트로트 이야기에 흥이 난 그는 “제가 말이 너무 많은가요?”라며 그 특유의 ‘누누슴(눈웃음)’으로 인터뷰 시간이 줄어드는 걸 안타깝게 할 지경이었다. “그냥 저에게 트로트는 삶이었어요. 강렬한 제 첫 기억은 제가 일고여덟 살 때쯤 굉장히 유행했던 노래가 송대관 선생님의 ‘유행가(‘찬또위키’ 아니랄까 봐 유행가 발표 연도는 2003년이다)’였어요. 그다음이 아버지와 신나게 불렀던 나훈아 선생님의 ‘18세 순이’였어요. 결승전 때 인생곡으로 선택한 노래인데요, 트로트의 뭐가 좋기 때문이 아니라, 그냥 사랑에 빠지듯 자연스럽게 삶에 녹아들었어요.”
거침없는 트로트 사랑, 결실을 보다
영남대 경제금융학부 15학번인 이찬원은 열두 살 때인 2008년 KBS ‘전국노래자랑’을 시작으로 그해 SBS ‘스타킹’에 신동으로 소개되면서 화제를 모았다. 그러다 2013년 ‘전국노래자랑’ 인기상에 이어 2019년 ‘전국노래자랑’ 최우수상을 거머쥐며 노래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았다는 걸 보여줬다. 그의 아버지도 한때 꿈꿨던 가수의 길, 험난한 걸 알기 때문에 반대할 수밖에 없었다.
“제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모르지만, 어떤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그 어떤 이벤트가 찾아오더라도 ‘미스터트롯’이 주는 것 더 이상의 의미는 없을 거예요. 제작진 예심 통과해서 ‘101팀 예선 합격하셨습니다. 연습 많이 해서 오세요’라는 말 듣자마자 휴학하고 바로 서울 올라왔습니다. 저희 담당 PD님께서 말씀하시더라고요. 정말 찬원씨 안 됐으면 어떡하려고 그랬냐고, 하하. 너무 무모했죠. 하지만 트로트가 정말 하고 싶었어요.”
모두가 최고의 기량을 선보이기 위해 완벽하게 준비한다지만 이찬원은 그 연습벌레들 속에서도 더 지독하게 자신을 단련했다. ‘진또배기’ 때는 ‘얼쑤’만 500번도 넘게 연습했다. 최고의 무대로 꼽는 ‘울긴 왜 울어’ 때는 그가 편곡한다는 심정으로 음절·리듬·전조 등 단 하나도 그냥 지나친 게 없었다. 결승전 부담이 제일 컸을 법한데 오히려 부담이 줄었다고 했다. 최고 회차까지 왔으니 하차라는 게 없기 때문이었단다. “떨어지는 게 두려운 게 아니라, 동료들과 헤어지는 게 너무 힘들었어요. 전 무대 주어지는 게 매우 황홀하고 행복한데, 그 무대가 마지막이 될 수 있다는 게 너무 슬펐어요. 동료들과 콘서트 활동도 같이할 것이지만요. 하지만 그 무대에선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너무 마음이 아팠지요.”
평소에 유튜브 보면서 흠모했던 선배님들을 좋아하는 형님·동생으로 만나 한 무대에 선 것만으로도 황홀한 시간이었다. “출연진분들은 제게 히어로지요. 임히어로(임영웅) 형님이랑 자주 밥도 먹고, 되게 소탈하고 소박한 분이에요. 제가 ‘찬또위키’란 별명 붙기 한참 전인데, 형 히트곡인 ‘계단 말고 엘리베이터’ 안무 변화를 말씀드리고, 예전 방송 리허설 장면까지 말씀드리니까 ‘뭐 그런 거까지 보냐’면서 엄청 잘해주시더라고요. 하하. 경연 중에 탁이 형 집에서 가장 많이 잤을 거예요. 탁이 형이 붙임성·사교성 좋으시고, 저처럼 회장·부회장 출신이시더라고요. 형이 ‘너는 우리 과다. 너는 역시 내 동생이다’라고 하셨지요. 탁이 형 것도 물론 다 외우고 있죠. 정말 모든 게 싹 다 기억에 남아요.” 그는 팬들 반응도 모두 기억한다고 했다. 심지어 마음에 드는 글은 휴대전화 스크린세이버로 저장하기도 한다. 기록이 취미라고 했다. 조곤조곤한 말투에 자꾸 어깨춤이 인다. 그는 무기력한 이들조차도 어깨춤을 추게 할 흥의 마력을 갖고 있었다. “정말 힘들고 지친 분들이 있을 때 언제든 이찬원식 흥으로 위로해 드리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