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한계를 넘어설 때 가슴이 터질 것 같은 희열과 기쁨을 느껴본 사람에겐 최선을 다하는 것, 그 이상은 필요하지 않다. 사진은 주인공 해럴드 에이브라함(벤 크로스·가운데)이 결승선을 통과하는 장면. 사진 IMDB
자기 한계를 넘어설 때 가슴이 터질 것 같은 희열과 기쁨을 느껴본 사람에겐 최선을 다하는 것, 그 이상은 필요하지 않다. 사진은 주인공 해럴드 에이브라함(벤 크로스·가운데)이 결승선을 통과하는 장면. 사진 IMDB

왜 1등이 되고 싶을까. 왜 최고의 자리에 오르고 싶은 것일까. 만약 “1등만큼 교만하지 않고 3등만큼 게으르지 않은 것을 치하한다”며 2등의 목에 금메달을 걸어준다면 어떨까. 2등이야말로 재능과 겸손의 덕을 갖춘 재원이라며 월계관을 씌워준다면, 2등에게만 세간의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되고 출세와 성공이 보장되는 세상이 온다면 그때에도 기를 쓰고 1등이 되고 싶을까? 

해럴드 에이브라함은 1919년 영국의 최고 명문, 케임브리지대학에 입학한다. 그는 어떻게든 성공해서 유대인 고리대금업자의 아들이라고 손가락질하는 세상을 납작하게 밟아주겠다고 다짐한다. 우선 자신의 특기인 달리기 실력을 발휘, 아마추어 육상대회를 하나씩 섭렵해가며 실력과 명성을 쌓아간다. 그리고 마침내 파리 올림픽 출전권을 따낸다.

‘최고의 자리는 당연히 나의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던 해럴드 앞에 강적이 나타난다. 럭비 선수를 그만두고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던 스코틀랜드 출신의 에릭 리델이 대표팀에 합류한 것이다. 그는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투지도, 세상의 인정을 받고 싶은 욕망도 없다. 신이 달리는 능력을 주었으니 신의 뜻에 따라 기쁜 마음으로 달릴 뿐이다.

최고가 돼야 한다는 압박감을 등에 진 해럴드와 결과는 신의 영역이라며 바람처럼 몸을 내맡기는 에릭의 첫 대결 결과는 뻔했다. 해럴드는 재능에 대한 실망과 에릭을 향한 시기심으로 어찌할 줄 모른다. “이길 수 없다면 달리지 않아.” 그는 화가 나서 소리친다.

해럴드와 에릭은 파리로 향하는 배에 오른다. 그런데 100m 예선전이 일요일에 치러진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독실한 기독교 신앙을 가진 에릭에게 일요일은 오직 신을 찬양하는 날이어야만 했다. 아이들이 공놀이하는 것도 안 된다고 못 박았던 그는 결국 출전을 포기한다. 이기적인 신앙으로 국가에 대한 충성을 저버렸다는 비난이 쏟아지지만, 에릭은 뜻을 굽히지 않는다.

또 한 번 예정되었던 에릭과의 경쟁은 그렇게 해럴드를 피해간다. 영화는 일일이 설명하지 않지만, 해럴드는 이 순간부터 많은 생각을 하게 된 것 같다. 무엇을 위해 달리고 있었던 것일까. 패배를 보란 듯이 설욕하리라 다짐했는데 에릭이 뛰지 않겠다고 선언한 지금, 누구와 경쟁해야 하는 것일까. 그는 200m 경기에 나서지만, 은메달에 그친다. 연이은 패배는 그를 가장 깊고 어두운 심연으로 이끌어간다. 그리고 100m 결승선에 섰을 때, 그는 최고가 돼야 한다는 무거운 짐을 비로소 내려놓는다.

영화를 본 관객은 대부분 해럴드와 에릭에 관해서만 얘기한다. 그런데 늘 담배를 입에 물고 나오는 금발의 미남, 앤드루 린지는 이기겠다는 의지만 갖췄다면 해럴드와 에릭보다 빨리 달렸을 것 같은 능력의 소유자다. 그에겐 열등감도, 경쟁의식도, 성공에 대한 절박함도 없다. 해럴드가 700년 동안 기록이 깨진 적 없는 교내 달리기 대회에 도전할 때, 린지는 그가 더 빨리 달릴 수 있도록 페이스메이커가 돼 준다. 해럴드의 복잡한 내면을 가장 잘 이해하는 것도 그다.

에릭이 일요일 선발전을 포기했을 때 린지는 그의 생각을 바꾸려 하는 대신 자신의 기회를 선뜻 양보한다. 장애물 경기에서 은메달을 딴 것으로 자기는 충분하다며 평일에 있을 400m 경기에 에릭이 대신 나가면 좋겠다고 제안한다.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자란 린지는 세상에 부러울 게 하나도 없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해하고 양보하고 배려하는 게 당연한 것은 아니다. 에릭이 그의 제안을 고맙게 받아들이고 세계신기록을 달성하며 금메달을 땄을 때 린지는 자기 일처럼 기뻐하며 진심으로 축하한다.

100m에서 금메달을 딴 해럴드는 겸허하게 상황을 끌어안을 뿐,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가 환하게 웃는 순간은 에릭이 우승 테이프를 끊고 들어왔을 때였다. 그에게 세상과 에릭은 더는 싸워 이겨야 할 적이 아니었다. 그는 친구들과 샴페인을 터뜨리는 대신 트레이너와 조용히 우승의 기쁨을 나눈다.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인정할 수 있게 된 해럴드에게 세상의 인정은 더는 의미가 없었다.  


1924년 파리 올림픽 영국 대표팀의 실화

‘불의 전차’는 1924년 제8회 파리 올림픽에 출전했던 영국 육상 대표팀의 실제 인물들을 그린 영화다. 휴 허드슨 감독의 데뷔작으로 1982년 아카데미 작품상, 각본상, 의상상을 받았고 음악가 반젤리스에게는 음악상을 안겨줬다.

영화 제목은 영화 말미에 소년 성가대가 부르는 노래, 윌리엄 블레이크 시에 곡을 붙인 ‘예루살렘’의 한 대목에서 따온 말이라고 한다. “불의 전차를 가져다주오, 정신의 싸움에서 지지 않으리니”라는 시구가 있는 이 노래는 지금도 영국 대표팀 선수들이 애국가처럼 부르는 곡이다.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는 개막식 곡으로 연주됐다.

이 영화는 분명히 명작으로 손꼽히지만, 에릭의 선택은 일반 관객의 입장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종교를 이유로 한 병역 거부의 문제까지 생각이 미치면 조금 더 당혹스러워진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포기할 수 없는 인생의 철학, 오랜 시간의 노력과 최고가 될 기회를 날려버려도 아깝지 않을 내 인생의 신념은 무엇일까, 돌아보게 한다.   

우리 대부분은 린지처럼 세상의 부귀영화를 다 가지지 못했다. 그의 배려와 여유도 흉내 내지 못한다. 에릭처럼 강인한 신념을 품고 살아가기보다는 상황에 따라 타협하며 자신을 변명하기 바쁘다. 어떤 면에서 우리는 모두 해럴드일지 모른다. 보이지도 않는 것과 싸워 이기겠다고 발버둥이치지만, 언젠가는 해럴드처럼 금메달을 목에 걸고 성숙의 지점에 다다르고 싶은 것 아닐까.

스포츠 세계신기록이 매번 깨지는 것처럼 최고의 자리란 언제나 바뀌고 변한다. 그걸 모르고 세상이 인정하는 최고만을 좇는다면 2등에게 금메달을 주는 사회에서는 꼭 2등이 되기 위해, 3등에게 월계관을 주는 시절에는 3등이 되기 위해 애를 쓰다 지쳐 쓰러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기 한계를 넘어설 때 가슴이 터질 것 같은 희열과 기쁨을 느껴본 사람에겐 최선을 다하는 것, 그 이상은 필요하지 않다. 최고의 명예란 자신의 모든 걸 다 바쳐 후회 없이 땀 흘린 뒤 바라보는 저녁 해변의 모래알, 한 줌 쥐고 남은 잠깐의 반짝임일 뿐.


▒ 김규나
조선일보·부산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 소설 ‘트러스트미’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