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덕에서 내려다본 항구도시 통영의 전경. 사진 이우석
언덕에서 내려다본 항구도시 통영의 전경. 사진 이우석

세월이 하 수상하니 계절도 요원하다. 삼한사온이 춘삼월에 왔다. 정말 이제나저제나. 이제 4월이라지만 육지의 봄은 라틴댄스라도 추는지 발을 디뎠다 뗐다 하염없이 망설이고 있다. 하지만 계절의 미로, 그 끝은 남쪽 바다를 향해 있다. 옥빛 바닷물 속에는 이미 봄이 한창이란 소식이다.

연둣빛 화장을 한 봄 바다 열길 아래엔 뼈 무른 도다리가 돌아다니고 퉁퉁한 봄 조개가 빼꼼히 고개를 내밀어 보고 있다. 봄 바다 향기가 물씬 풍기는 곳 경남 통영(統營). 맛과 멋, 예술혼으로 가득 찬 항구도시 통영이다. 청라언덕 같은 미륵산에 올라 하루바삐 봄을 만끽하고파 통영으로 달려간다.

“통영과 한산도 일대의 자연미를 나는 문필로 묘사할 능력이 없다.” 정지용 시인이다. 그 말처럼 ‘만중운산 속의 천고절미한 호수’를 빼닮은 통영의 봄 바다가 기다리고 있다.

멀지 않다. 서울로부터 출발, 쉬지 않고 달리면 4시간, 슬슬 쉬면서 가도 5시간이면 통영에 닿는다. 통영 사람들은 경북 포항이나 광주에 가는 것보다 오히려 서울이 가장 가깝다 한다. 아득한 봄날을 먼저 즐기는 데 필요한 시간은 반나절이면 충분하다는 얘기.

충무김밥도 마다한 채 먼저 미륵산(461m)에 올랐다. 금강산은 어떨지 몰라도 통영만큼은 경후식(景後食)이다. 한려수도의 시발점(여수를 시작으로 보면 종점)을 전부 내려다볼 수 있는 미륵산이기에 통영을 찾는 이라면 필수코스다.

미래사 뒤편 편백 숲을 통해 오를 수도 있지만, 케이블카를 타면 노인도 어린아이도 모두 정상까지 쉽게 오를 수 있다. 봄 바다를 뒤로하고 느릿느릿 움직이는 케이블카 안에는 평일임에도 상춘객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3.3㎡(한 평) 남짓한 공간에 이렇게 한가득 행복을 싣고 봄 하늘 밑으로 오른다.

상부 역에서 나무 데크를 따라 걸어서 이것저것 구경한대도 20여 분이면 미륵산 정상에 오른다. 그저 정상으로 죽 뻗어 있는 게 아니라 토끼굴처럼 길이 갈려, 여러 방향에서 다도해의 절경을 만끽할 수 있다.

통영 상륙작전이 이뤄진 원문고개 앞 장평리를 바라보는 전망대, 날이 맑으면 일본 쓰시마섬까지 보인다는 전망대, 미항 통영 시내를 가르는 운하가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대 등 사방팔방 360도 조망이 가능하다.

각도에 따라 저마다 다른 곡선 바다를 정상 오르는 길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향긋한 바다 향기를 머금은 봄바람도 불어와, 겨우내 체내에 묵혀놓았던 스트레스 섞인 땀을 단숨에 증발시켜 버린다.

통영 바다는 온통 둥글둥글한 섬으로 가득하다. 동그란 섬들이 첩첩 겹치며 멀어지는 풍경이 한 폭의 동양화를 닮았다. 수묵이 아니라 연두와 노랑을 칠한 채색화에 가깝다. 굽이치는 해안도로도 죄다 곡선이다. 직선, 특히 수직으로 빼곡한 도시에서 온 여행자는 이 근사한 풍경만 눈에 넣어도 당장 숨통이 트인다.

국립공원 100대 경관에도 꼽힌다는 절경인데, 사실 좋은 경치에 순위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흐린 날도 맑은 날도 그저 산정에 올라 봄 바다를 눈에 담는 것이 행복할 뿐. 미륵산에서 미래사 방향으로 걸어 내려오면 편백 숲의 싱그러운 기운까지 챙길 수 있다. 밥맛이 절로 난다. 눈물처럼 뚝뚝 떨어지는 꽃길을 걷고플 때면 장사도도 좋다.


동백꽃이 뚝뚝 떨어진 장사도의 꽃길. 사진 이우석
동백꽃이 뚝뚝 떨어진 장사도의 꽃길. 사진 이우석
통영의 명물 도다리쑥국. 사진 이우석
통영의 명물 도다리쑥국. 사진 이우석

꽃잎이 눈물처럼 뚝뚝 떨어지는 장사도

동백이 가득한 섬이다. 누에를 닮았대서 붙은 이름인 장사도는 해상공원으로 이름났다. 거제와 더 가깝지만, 통영 땅이다. 다시 돌아와야 한다면 통영항에서 출발하는 것이 낫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창궐 탓에 3월 말까지 휴장이지만 거제 외도처럼 수많은 이들이 찾는 곳이다. 외도가 잘 가꿔진 정원 등 다소 인공미가 강하다면, 천연 동백숲과 후박나무숲, 구실잣밤나무 등이 오롯이 남은 장사도는 자연미인에 가깝다.

그도 그럴 것이 한려수도 해상국립공원 내에 위치한 섬이라 원시림과 기존 숲길, 가옥, 폐교 등을 해치지 않고 그대로 살렸다. 폐교와 가옥은 그 자리에 복원해서 ‘분재원’과 ‘섬 아기집’으로 사용 중이고 탐방로는 나무 데크를 깔아 편의성만 보완했다. 섬을 한 바퀴 도는 코스는 약 두 시간 정도 걸린다. 무지개다리, 동백터널, 미로 정원 등 곳곳에 사진 찍기 좋은 포인트가 많아 서너 시간도 충분히 놀 수 있다.

섬을 가득 채운 동백숲은 붉은 함박웃음을 펑펑 터트린다. 가장 화려한 순간 고개를 뚝 떨구고 마는 동백은 길바닥에 있을 때 가장 곱다. 장사도 동백은 3월 하순부터 4월까지 가장 아름답다. 키가 껑충한 자연 동백숲 너머 넘실대는 옥색 바다가 보이는 바닥에는 아무도 찾지 않아 서러운 꽃송이가 레드카펫을 깔고 상춘객을 기다리고 있을 테다.

불확실성의 시대, 하루 앞을 미처 몰라 사는 것이 불안하고 두렵다. 하지만 이리도 고운 봄 통영을 어찌 외면할 수 있을까.


▒ 이우석
놀고먹기 연구소 대표, 성균관대 미술교육학과, 전 여행기자협회 회장


여행수첩

둘러볼 만한 곳 청마문학관, 박경리 기념관, 윤이상 기념관, 김춘수 유품전시관, 충렬사, 세병관, 제승당, 착량묘, 향토 역사관, 수산과학관, 이순신공원. 통영시티투어를 이용하면 ‘통영 토박이’ 박정욱 길라잡이가 들려주는 재미난 역사 이야기와 함께 통영 곳곳의 명승을 둘러볼 수 있다. 장사도해상공원은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한 휴장 권고로 4월부터 개장 예정. 통영항에서 유람선을 타고 입도할 수 있다. 입장료 1만500원(어른 기준). 통영항과 거제 근포항, 가배항, 대포항에서 출항한다.

먹거리 봄날 통영 땅에 가서 감칠맛 나는 도다리쑥국을 먹지 못한다면 그야말로 춘래불사춘이다. 4월 말까지 통영 곳곳에서 맛볼 수 있다. 항남동 밀물식당은 볼락 등 생선구이가 맛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