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장필순이 3월 31일 공개한 9집 ‘Soony Reworks Vol.1’ 앨범 재킷. 사진 최소우주
가수 장필순이 3월 31일 공개한 9집 ‘Soony Reworks Vol.1’ 앨범 재킷. 사진 최소우주

이것은 차라리 한 폭의 수묵담채화다. 한 호흡에 그어 내린 선은 분명하고 물을 잔뜩 머금은 색들이 여백과 존재 사이를 채운다. 부드럽고 습윤하다. 빈 곳과 그렇지 않은 곳 사이에는 경계가 없다. 유와 무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모두가 힘든 시대에 흩뿌리는 위안의 목소리.

장필순의 신보 ‘Soony Reworks Vol.1’을 들으며 내내 드는 생각이다. 1989년 ‘어느새’로 데뷔한 이후 발표하고 참여한 노래 중 스스로 애정이 가고 다시 작업하고 싶었던 노래들을 추려 새로 불렀다. 데뷔 이래 늘 함께한 조동익이 전곡의 편곡을 맡았다. 총 13곡이 담겨 있지만, 그녀의 대표곡인 ‘나의 외로움이 널 부를 때’와 영화 ‘새드무비’ 수록곡인 ‘보헤미안’은 편곡을 달리해 몇 개의 버전으로 담았기에, 딱 10곡을 추린 셈이다.

1990년대와 2000년대 한국 대중음악사의 명반인 5집과 6집에서 각각 세 곡씩 담았다. 2015년 조동진의 ‘제비꽃’을 리메이크한 것을 시작으로 지난해 발표한 김민기의 ‘철망 앞에서’까지 디지털 싱글로 낸 곡들을 모았다(다만 이 앨범에는 ‘제비꽃’이 담기지 않아 아쉽다).

사진작가 강영호가 찍은 커버는 음악처럼 간결하되 강렬하다. 장필순을 수식하는 문장 중 가장 많이 나오는 건 ‘여 가수들의 여 가수’다. 2010년 장필순이 정말 오랜만에 서울에서 공연했을 때 많은 후배 여성 뮤지션들이 공연장을 찾았다. 그들은 마치 신을 영접한 것처럼 감격했고 이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여과 없이 올렸다.

아이유는 예능 프로그램 ‘효리네 민박’에서 장필순에 대한 존경심을 아끼지 않았고, 이효리가 제주도에 내려가 처음 터를 잡은 곳이 장필순과 같은 마을이었다. 대모라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런 존재가 되기 전부터, 아니 데뷔 전부터 장필순은 한국 음악계의 특별한 존재였다.

강남에 있는 서울스튜디오는 1980년대부터 한국 최고의 녹음실이었다. 조용필부터 들국화까지 이 녹음실을 거치지 않은 음악인이 없다. 데뷔 전 장필순은 이 녹음실에 상주하다시피 했다. 그녀의 얼굴을 몰랐던 가수들이 장필순을 서울스튜디오 직원으로 생각했다는 전설이 내려올 정도다. 주인공 격인 가수의 목소리를 돋보이게 하되, 그 목소리로는 다 채워지지 않는 공간을 장식하는 백 코러스로 장필순을 따라갈 사람이 없었다. 영화로 비유하자면, 최고의 미장센을 만들어내는 미술감독인 셈이다. ‘절창’이 당연했던 시대, 모든 감정을 과장되게 전달하는 게 미덕이었던 시대, 장필순은 시대의 불문율을 거스르는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이 목소리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는 역시 압도적인 재능으로 당대에 침투할 준비를 끝냈던 김현철이었다. 조동익, 함춘호, 손진태 등 역시 당시의 ‘선수’들은 뜻과 힘을 모아 1989년 장필순의 데뷔 앨범을 만들었다. ‘Soony Reworks Vol.1’의 첫 곡인 ‘어느새’가 담긴 앨범이다.

이 앨범에서 낯설기만 했던 보사노바 리듬과 ‘퓨전 재즈’적 사운드를 타고 장필순은 속삭이듯 노래한다. 요즘 말로 치면 ‘목소리 반 공기 반’으로 전달하는 정서는 1980년대의 과장법과는 아득히 멀다. 세밀하고 스산하다. 땀 한 방울,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도 몸과 마음의 움직임을 표현한다. 동시대에 등장한 박학기의 미성으로도 김현철의 세련미로도 그리지 못한 풍경이다.

‘어느새’는 백예린도 리메이크했다. 지난해 두 장의 앨범을 연달아 발표했고, 두 장 모두 비평과 흥행 두 마리 토끼를 거머쥔 우리 시대의 아티스트인 백예린은 이 노래의 본질을 알아봤다. 안개같이 스산한 장필순의 보컬 톤을 받아 안았고 보사노바 리듬의 인트로와 손진태의 기타가 핀셋으로 집어낸 듯한 포인트를 건드리지 않았다. 존중 가득한 재해석이 담긴 헌사다.

장필순과 조동익은 이 곡을 다시 한번 부름으로써 백예린에게 화답한다. 1989년의 원곡은 물론이고, 백예린의 버전보다도 힘을 뺐다. 리듬이 만들어내는 분절과 타격감을 잔향으로 구성된 소리에 내어준다. 섣불리 장르의 프레임으로 이 노래를 덮어씌우고 싶지 않다. 조동익과 장필순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스산함을 담기에 하나의 장르는 그릇이 작다. 이는 ‘Soony Reworks Vol.1’을 관통하는 기조다.

장필순과 조동익은 2000년대 초반부터 줄곧 제주에 머물고 있다. 아름다운 섬의 자연과 계절이란, 이런 환경에서 만드는 음악이란 어떤 선입견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 어쿠스틱, 힐링 등의 단어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앨범은 아니 장필순이 섬에 내려간 이래 발표한 음악들은 이 선입견을 거부한다.

음파의 미세한 향연으로 가득한 조동익의 프로듀싱과 맞물려 장필순은 데뷔 이래 지켜왔던 자신의 목소리를 잃지 않되 환경에 매몰되지 않는 숙성의 숨결을 마시고 뱉는다. 외부의 균에 영향받지 않고 오직 오크통의 기운만으로 온전히 숙성된 와인의 향과 맛이랄까. 각각의 노래가 시차를 두고 발표됐음에도 이 앨범이 일관성 있는 이유다. 이 앨범은 통속에도, 트렌드에도 기대지 않는 장필순의 세계를 담고 있다.


제주도 애월읍에 살고 있는 장필순. 사진 최소우주
제주도 애월읍에 살고 있는 장필순. 사진 최소우주

앨범을 들으면 떠오르는 제주의 가을

이 앨범을 들으면 어쩔 수 없이 떠오르는 가을이 있다. 장필순이 살고 있는 제주도 애월읍 소길리다. 바다에서 한라산 쪽으로 올라가면 나오는 이 마을은 이효리가 터를 잡기 전에는 제주 사람들도 잘 몰랐던 곳이다. 멀리 바다가 보이고 가까이에는 숲이 아무렇게나 우거졌다. 한 시간에 한 번 농어촌 버스가 다니는 외진 곳이었다. 거기서 하루를 머물렀던 적이 있다.

장필순의 음악 동료이자 식구인 하나음악(기획사) 사람들이 그녀와 함께 제주문예회관에서 공연한 후 그 마을에서 1박 2일 동안 뒤풀이를 했다. 운 좋게 그 자리에 함께 있을 수 있었다. 그 많은 친구와 동생을 장필순은 살뜰히 보살폈다. 먹고 마실 걸 챙겨주고 말벗이 되어 이야기를 들어줬다. 조언해주기보다는 그들의 마음을 받아 안는 것 같았다.

잊고 싶지 않은 하루를 보낸 후 다음 날 저녁, 길을 나섰다. 버스가 다니는 애월읍의 큰 도로까지 한 시간을 걸어야 했다. 소길리에서 내려가는 길에 상가리, 하가리 같은 이름이 쓰인 이정표가 보였다. 눈앞에 숲이, 그 앞에는 바다가 들어왔다. 아름답게 푸르던 하늘이 더 아름답게 물들 무렵이었다. 말 그대로 한 줄기 바람이 바다에서 산 쪽으로 스쳐 지나갔다. 마음의 바닥으로부터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가을이구나.’ 계절의 스위치가 켜졌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나는 장필순의 새로운 음악을 들을 때마다 그 하루가, 그 풍경이, 그 순간이 자동 재생 버튼을 누른 것처럼 떠오르곤 한다. 그 기억과 함께 듣는 장필순의 목소리는 자장가이자 위로가이며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기도와 같은 존재다. 모두가 힘든 시대, 장필순이 있다. 그녀의 지난 노래들을 그녀의 지금 목소리로 들려주는 ‘Soony Reworks Vol.1’이 있다.


▒ 김작가
대중음악평론가. 한국 대중음악상 선정위원. MBC ‘나는 가수다’, EBS ‘스페이스 공감’ 기획 및 자문 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