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의 영감을 가진 모차르트가 얼마나 눈부신 존재인지를 알아본 이는 살리에리였다. “최고가 되고 싶은 욕망을 주었다면 최고가 될 수 있는 재능도 주었어야 했지 않은가!” 살리에리는 분노한다. 신이 그에게 허락한 것이라고는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알아보는 능력뿐이었다. 사진 IMDB
1%의 영감을 가진 모차르트가 얼마나 눈부신 존재인지를 알아본 이는 살리에리였다. “최고가 되고 싶은 욕망을 주었다면 최고가 될 수 있는 재능도 주었어야 했지 않은가!” 살리에리는 분노한다. 신이 그에게 허락한 것이라고는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알아보는 능력뿐이었다. 사진 IMDB

‘1%의 영감과 99%의 노력이 천재를 만든다’는 말은 노력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타고난 재능이 없으면 아무리 애를 써도 평범함을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이다. 98과 99의 차이는 크지 않다. 하지만 99와 영감 하나가 더해진 100의 거리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멀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 차이를 모른다. 나머지 하나의 가치를 발견하고 그것의 부재에 괴로워하는 건 99에 도달한 사람들이다.

1788년 이후 오스트리아 황실의 궁정 작곡가로 명성을 굳힌 안토니오 살리에리는 신이 자신에게 모든 것을 주었다고 믿었다. 어린 시절부터 음악가가 되기를 꿈꾸었고 소원대로 빈에서 공부할 수 있었으며 성실하게 노력한 끝에 황제의 총애까지 받고 있다. 부족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더 바랄 것이 있는 줄도 몰랐다. 하지만 4세에 협주곡을, 7세에 교향곡을, 12세에 오페라를 작곡했다는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를 만나는 순간, 태양 앞에 선 달처럼 그는 초라해진다.

왜 하필 저 녀석인가! 살리에리는 세상 어디에서도 그토록 방탕하고 경박하고 무례하고 교만한 인간을 본 적이 없다. 하지만 그는 모차르트의 악보에서 신의 음성을 듣는다. 아름답고 역동적이고 독창적인 완벽함을, 꿈에서라도 상상한 적 없기에 소망할 수도 없었던 천상의 선율을 느끼며 전율한다. 반 발자국 정도 앞서야 세상은 뛰어난 천재가 나타났다고 환호한다. 한 발이나 두 발을 앞서가면 보통 사람의 이해 영역을 벗어나기 때문에 바보나 미치광이로 취급받는다. 당시 음악의 권위자들에게도 모차르트는 전통을 무시하고 규칙을 지키지 않는 이단아였다. 1%의 영감을 가진 모차르트가 얼마나 눈부신 존재인지를 알아본 것은 살리에리였다. 

“최고가 되고 싶은 욕망을 주었다면 최고가 될 수 있는 재능도 주어야 했지 않은가!” 살리에리는 분노한다. 신이 그에게 허락한 것이라고는 저토록 모자란 인간,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알아보는 능력뿐이었다. 비참해지고 옹졸해진 살리에리는 모차르트의 영혼과 생명을 파괴할 방법을 찾는다. ‘모차르트가 사라지면 나는 다시 빛날 거야’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신이 준 재능을 부숴버리고 그것을 가진 천재를 묻어버리는 것, 자신에게 재능을 주지 않은 신에 대한 최고의 복수였다.

사람들은 작품이 뛰어나면 작가도 굉장한 인격을 가졌으리라 착각한다. 그러나 작품과 인격은 대체로 무관하다.

모차르트 또한 그랬다고 한다. 아무리 타고난 능력이 있다 한들, 아무리 음악을 좋아했다 한들 높은 사람들 앞에서 재주를 뽐내기 위해 여섯 살부터 아버지 손에 이끌려 연주 여행을 다녀야 했다면, 정상적으로 성장할 기회가 있었을까. 최고라는 말만 들어온 천재는 예절이나 겸손을 몸에 익힐 기회가 없었고 타고난 능력과 그것을 파고드는 열정적 노력 말고는 세상 살아가는 법을 배운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 결과 어른이 되어서도 절제할 줄 모르고 타인을 이해하고 사랑할 줄 모른다.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낳았어도 아버지의 칭찬을 듣기 위해서만 전전긍긍할 뿐, 생활인으로서는 한없이 무능하고 철없는 아이였다. 살리에리는 그런 모차르트의 심리를 극한으로 몰아간다. 정말 그의 계획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모차르트는 아버지의 사후, 죽음의 무게에 짓눌릴 수밖에 없는 진혼곡을 정체불명의 누군가에게 실제로 의뢰받았고 끝내 완성하지 못한 채 피로와 영양 실조로 쓰러져 생을 마친다. 그의 나이 불과 서른 여섯. 

그 후 오랜 세월이 지난 어느 겨울밤, 매섭게 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 “모차르트, 자넬 죽인 건 나야”라며 울부짖는 소리가 어둠을 찢는다. 자신의 음악과 이름이 퇴색해가는 반면 모차르트의 명성과 작품이 하루하루 되살아나 불멸의 영광을 누리는 걸 지켜봐야 했던 노년의 살리에리가 이승의 지옥을 끝내기 위해 스스로 목을 찌르며 내지른 비명이었다. 

영화의 비극적인 결말과 달리 현실의 살리에리는 일흔 다섯 살에 평화롭게 죽기 전까지 음악가로서 당대 최고의 자리를 확고히 지켰다. 후배들을 무료로 가르쳤고 베토벤의 존경을 받았다고 할 정도로 명망 높은 사람이기도 했다. 모차르트의 돌연한 죽음에 그가 관련되어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사실로 증명된 것은 없다.

그러나 같은 시대를 살았던 두 사람의 미묘한 관계와 죽음으로 이어진 의혹들은 작곡가 림스키코르사코프나 작가 푸시킨에게 영감을 주었고 오페라와 연극으로 만들어졌다. 영국의 극작가 피터 셰퍼도 1979년 희곡 ‘아마데우스’를 무대에 올렸는데 밀로시 포르만 감독이 영화로 각색, 재탄생시켰다.

‘아마데우스’는 1985년 제57회 아카데미 작품상, 감독상 등 8개 부문을 석권했다. 살리에리를 연기한 F. 머리 에이브러햄이 남우주연상을 받았지만 모차르트로 분한 톰 헐스의 연기와 웃음소리도 명불허전이다. 무엇보다 그 시대의 화려한 무대와 함께 모차르트 작품을 즐길 수 있는 것은 특별한 기억으로 남는다.       


천재가 아니어서 행운일지도 모른다

노력만 하면 다 이루어진다고 믿고 싶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누구나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를 수 있는 건 아닌 것처럼, 손에 금방 닿을 것 같지만 바라보기만 해야 한다는 걸 인정해야 할 때가 훨씬 더 많다. 하지만 간절히 바라면서도 한계를 인정하고 깨끗이 포기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비교할 수도 없이 뛰어난 사람을 진심으로 축복하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천재가 아니어서 행운일지도 모른다. 니체처럼 고흐처럼 모차르트처럼, 천재는 괴롭다. 가족도 친구도 동료도 그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조롱받고 배척받으며 가난과 질병과 빚에 쪼들리기 십상이다. 성공을 거머쥐더라도 잠자리 날개처럼 연약한 그들의 영혼은 작은 충격에도 쉽게 부서져 버린다. 세상의 벽에 부딪히는 아픔은 천재에게도 좌절과 절망을 안겨준다. 그들은 술과 약물에 중독되거나 자해하거나 요절한다. 그렇게 죽음과도 같은 상처로 신음할 때 잔인하게도 천재의 재능은 불꽃처럼 폭발한다.  

최소한 이 영화를 생각하는 동안은 천재가 아닌 것에, 그들을 질투할 정도의 재능도 갖고 있지 않은 것에 안도하게 된다. 대신 니체가 남긴 눈부신 문장들을 쓰다듬으며, 고흐의 손길이 닿았을 그림을 바라보며 그리고 공허하게 깔깔 웃던 모차르트의 고요한 ‘클라리넷 협주곡’을 들으며 ‘당신도 외로웠구나’ 하고 말을 건네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오래전 사라진 별이 오늘 밤에도 희망을 일깨우며 반짝이듯이, 저 먼 곳 어딘가에서 시공을 건너온 목소리가 낮게 속삭인다. “천재를 시기하느라 부질없이 고통받는 세상의 모든 살리에리여, 그대의 평범함을 나는 얼마나 사랑하는지.”


▒ 김규나
조선일보·부산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 소설 ‘트러스트미’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