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품과 식물이 함께 놓인 전시장 전경. 사진 김진영
미술품과 식물이 함께 놓인 전시장 전경. 사진 김진영

‘화이트 큐브(white cube)’는 미술관의 하얀 전시 공간을 상징하는 표현이다. 어떠한 장식물도 없이 절제된 밝고 하얀 육면체 공간 안에 예술작품을 둠으로써 예술작품을 돋보이게 하는 것은 오늘날 가장 일반적인 전시 방식이다.

예술 비평가 브라이언 오 도허티(Brian O’Doherty)는 ‘하얀 입방체 내부에서(Inside the White Cube·1976)’라는 글에서 이런 현대 미술의 주된 전시 방식을 개념화했는데, 그에 따르면 화이트 큐브는 그림자가 없는 하얗고 깨끗한 인공적인 공간이자 작품 자체에 대한 가치 평가를 방해하는 모든 요소를 제거한 공간이다. 교회의 신성성, 법정의 형식성, 실험실의 신비성이 시각화한 이 장소에서 예술작품은 우리 삶으로부터 떨어져나와 감히 손댈 수 없는 숭고함을 부여받는다.

하지만 미술관이 처음부터 이러한 전시 방식을 택한 것은 아니다. 미술의 역사가 있는 것처럼, 미술품 전시의 역사도 있다. 이 역사를 따라가 보면, 작품을 다닥다닥 붙이거나 때로는 천장에까지 비치하던 방식부터 그림을 방 크기에 맞춰 자르는, 지금으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방식도 존재했다.

네덜란드 작가 잉게 마이어(Inge Meijer)의 ‘식물 모음집(The Plant Collection)’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시립미술관(Stedelijk Museum)의 지금은 잊힌 전시 역사를 들춘다. 1874년에 개관한 시립미술관은 매해 70만 명이 넘는 방문객이 찾는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미술관 중 하나다.

암스테르담 시립미술관이 세계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한 것은 1945년 빌렘 샌드버그(Willem Sandberg)가 관장으로 취임하면서부터였다. 미술관 소장품을 대폭 늘리고 세계적인 미술가의 전시를 개최하면서 시립미술관은 명실공히 유럽의 주요 미술관으로 자리 잡게 됐다.

이뿐 아니라 빌렘 샌드버그는 미술관을 운영하는 데 있어 한 가지 놀라운 결정을 했다. 1946년 피터르 몬드리안(Pieter Mondrian) 전시를 개최하면서, 몬드리안의 회화 ‘부기우기(Boogie Woogie)’ 옆에 몬스테라 화분을 두기로 한 것이다. 이를 시작으로 샌드버그 관장은 그가 관장 자리에서 물러나던 1963년까지 미술관에 예술작품과 식물을 함께 배치하는 방침을 두고, 미술관을 운영했다. 그리고 이 관행은 1983년까지 계속됐다.

잉게 마이어는 현대 미술품 전시와 식물이 공존했던 시기의 시립미술관을 2년간 조사해 ‘식물 모음집’을 출간했다. 미술관의 자료 보관소에서 찾은 사진과 문서를 토대로 만든 이 책에는 마크 로스코, 프랜시스 베이컨, 파블로 피카소, 알렉산더 칼더 등 272개의 전시에서 작품과 함께 놓인 총 39종의 식물이 담겨 있고, 사진마다 전시 연도와 작가명이 함께 기재돼 있다. 책 후반부에는 작가 인터뷰, 관장 편지, 식물 담당 직원 모습 등이 수록돼 미술관이 어떤 방식으로 식물을 가져왔고 어떻게 사용하고 관리했는지에 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잉게 마이어의 책, ‘식물 모음집’의 표지. 사진 김진영
잉게 마이어의 책, ‘식물 모음집’의 표지. 사진 김진영
피터르 몬드리안 전시 풍경. 사진 김진영
피터르 몬드리안 전시 풍경. 사진 김진영
식물 담당 직원 미스터 반 더 햄. 사진 김진영
식물 담당 직원 미스터 반 더 햄. 사진 김진영

미술관의 엄숙주의 벗어나 대중에게 다가간다

빌렘 샌드버그가 미술관에 식물을 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단순한 장식을 위해서였을까? 오로지 미술품을 위해 표백한 듯한 화이트 큐브 공간은 미술품을 돋보이게 하는 기능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미술관에 들어서면 편안함보다는 엄숙함을 느끼고, 미술품에 대해 감히 가까이 다가서서는 안 되는 듯한 심리적 위압감을 느낀다. 마치 바깥 세계와 단절된 성전에 들어선 것처럼, 우리 삶의 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로 미술관을 받아들이고 미술관 내에서 행동한다. ‘하얀 입방체 내부에서’를 쓴 브라이언 오 도허티는 이처럼 예술이 오로지 예술을 위한 예술이 되고 미술관이 신성화하는 것을 ‘갤러리 공간의 이데올로기’라 칭했다.

빌렘 샌드버그는 미술관이 이와 다르게 작동하길 바랐다. 미술관이 엘리트를 위한 공간이 아니라, 대중에게 친화적이고 편안한 공간이 돼서 더욱더 많은 관람객이 현대 미술을 친숙하게 감상하길 원했던 것이다. 그는 살아있는 식물을 미술관 내부로 가져오는 것은 바깥세상, 그러니까 미술관이 배제해 온 삶의 영역을 미술관에 다시 가져오는 것이라 여겼다. 그에게 식물은 미술관 ‘내부와 외부를 연결’하는 것이었기에, 식물 배치에 세심함을 기울였다. 식물을 담당하는 정직원을 고용할 정도로 식물 관리에도 힘썼다.

잉게 마이어는 미술 작품과 식물이 함께 담긴 사진들을 보며 통상 미술관에서 느끼기 어려운 분위기를 발견했다.

“이 사진들에는 복잡한 아름다움이 있다. 한편으로 식물은 미술관에 편안하고 기분 좋은 분위기를 부여한다. 오늘날 미술관에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분위기 말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 사진들은 무언가 맞아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의식하게 한다. 다시 말해 모든 것이 디자인 혹은 계획을 따르고 있지 않다는 점을 보는 건 좋은 일이다. 식물 같은 어떤 사물들은 되는 대로 놓인 것같이 보이곤 한다. 물려받아서 함께 살아야만 하는 가구처럼 말이다. 오늘날 전시에서 모든 것은 굳은 채로 있다. 배치에 관한 어떤 것도 변경되지 않는다. 하지만 식물은 계속해서 자란다.”

식물이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지는 모르지만, 암스테르담 시립미술관에서는 2013년을 마지막으로 식물이 자취를 감췄다. 습기, 안전, 위생 등 혹시라도 모를 위험을 고려한 결정이었다. 그리고 근엄함 화이트 큐브로 돌아왔다.

물론 이러한 미술관의 방침 변화에는 그사이 현대 미술의 변모가 영향을 끼쳤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빌렘 샌드버그가 관장으로 부임하던 1945년은 지금으로부터 자그마치 75년 전이다. 그 이후 현대 미술에서 다양한 매체 및 설치 미술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커졌다. 작품 주변에 무엇을 둘지, 말지는 미술관보다 작가가 정하는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작가 잉게 마이어가 수집하고 정리해 만든 ‘식물 모음집’의 사진들은 이제 더는 볼 수 없는 미술관 풍경을 차분히 펼쳐 보인다. 미술관이라는 점을 모르고 사진을 본다면, 회사 로비나 큰 집의 한쪽으로 느껴질 만한 사진도 더러 있다. 식물의 존재는 이렇게 예술작품을 미술관이 아닌 삶 속에 있는 것으로 지각하게 한다. 당시 관람객들은 식물과 한 공간에서 호흡하며 작품을 바라봤을 것이다. 그들이 경험했을 기분을 이제는 그저 상상만 해보지만 말이다.


▒ 김진영
사진책방 ‘이라선’ 대표, 서울대 미학과 박사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