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이들에게 삶은 차라리 내려놓고 싶은 짐이다. “죽는 게 나아.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 집에서 엄마도 죽어 버리고 싶어.” 아버지의 죽음 이후에도 흔들리지 않았던 엄마는 가지고 있던 돈을 다 쓰고 정든 집을 떠나 자그마한 산장에서 지내야 하는 비참한 상황에 놓이자 딸 가즈코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고 만다. 무너지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같이 울던 가즈코는 훗날 이 시기를 이렇게 회상한다. “우리 인생은 니시카타초의 집을 나설 때, 이미 끝났다고 생각했다.” ‘사양’은 다자이 오사무가 1947년에 발표한 작품이다. ‘사양족’이라는 말이 유행할 만큼 패망한 일본의 청년들에게 깊이 각인됐던 이 작품은 다자이 오사무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많이 판매됐다. 그리고 알려진 바와 같이 이듬해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스무 살 때부터 수차례 시도했던 자살이 마침내 완수됐을 때 그의 나이는 만 39세였다.

패전 일본의 공기를 반영하듯 소설은 등장인물들의 삶 구석구석 배어든 죽음의 냄새로 시작한다. “죽는 얘기라면 질색”이라고 말하는 가즈코는 죽음 충동과 싸우는 인물들에게 둘러싸여 자주 휘청거린다. 아프고 불안정한 엄마에 대해 생각하던 가즈코는 “사랑이라 썼다가, 그다음은 쓰지 못했다.” 엄마를 향한 ‘사랑’은 차마 서술할 수 없는 단어다. 서술한다는 건 안다는 것이다. 안다는 건 연루된다는 것이며, 연루된다는 건 그의 상처와 고통을 모른 척할 수 없다는 뜻이다. 가즈코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사랑의 내용을 서술하는 순간 그 사랑에 책임져야 한다는 것을. 패배한 시대의 몰락한 귀족 계급에 책임이란 가당치 않은 소리다. ‘사양’하는 정신들과 함께 죽음만이 아름다워 보이던 시대. 때는 바야흐로 모든 것이 가라앉고 있던 1948년이었다.  

가즈코가 엄마의 죽음 이후 아이를 낳는 일에 집착하는 모습은 별로 놀랄 만한 일도 아니다. 스물아홉살의 가즈코는 가진 것도 없고 가질 것도 없는 처지다. 엄마의 죽음 이후 그에게 남은 거라곤 약물에 중독된 채 스스로를 방치하는 남동생뿐이다. 죽음 충동이 지배하는 시대에서 남동생 나오지의 마음은 이미 생의 너머에 가 있는 것 같다. “내겐 희망의 지반이 없습니다. 안녕.” 누나의 삶을 축내기만 하던 나오지이지만 한 가지 쓸모 있는 일도 한다. 그와 친교를 맺고 있던 소설가 우에하라를 소개받은 가즈코가 그에게 사랑을 느꼈던 것이다. 우에하라는 부인도 있고 자식도 있고 급기야 자신보다 훨씬 어린 여자 친구도 있는 눈치지만 가즈코는 개의치 않는다. 가즈코에게 그런 ‘낡은 도덕’ 따위는 조금도 걸림돌이 아니다.

단 한 번의 만남 이후 6년 동안 그를 그리워한 가즈코는 자신의 사랑을 이루기 위해 전력을 다한다. 당신은 나만을 사랑하게 될 거라고, 나오지가 없을 때 자신의 집으로 오라고, 자신의 소망은 “당신의 애첩이 되어 당신 아이의 엄마가 되는 것”이라고 말하며 자신의 사랑을 밀어붙이는, 그야말로 ‘난처한 여자’인 가즈코는 “성난 파도를 향해 뛰어내리는 심정으로” 답장 없는 그를 향해 세 통의 편지를 보낸다. 그러나 가즈코의 사랑은 우에하라의 마음을 얻는 데만 목적이 있지 않았다. 그는 황혼으로 물든 세상에서 새 생명이라는 아침을 맞이하고 싶었다. 모두 절망하고 죽어가는 세상에서 시작하는 생명을 통해 희망의 역사를 쓰는 것을 두고 ‘혁명’이라 말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아닌 게 아니라 가즈코는 내내 ‘사랑과 혁명’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에게 혁명이란 사랑을 확신할 수 있는 사람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는 것이다. 죽었거나 죽어 가고 있거나 죽고 싶어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덩달아 죽음과 투쟁했던 가즈코는 오직 삶이 화두인 존재와의 만남을 통해 죽음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한다. 우에하라를 향한 가즈코의 열정은 쉽게 이해하기 어려워도 아이를 통해 의지할 수 있는 관계를 꿈꾸는 열정엔 공감할 수 있다.  


서술하는 순간 사랑을 책임져야 한다는 것

인간은 의지한 채 살아간다. 의지하는 건 기대는 것이고 기댄다는 건 서로가 서로의 무게를 견딘다는 것이다. 서로의 무게를 견디다 보면 자세는 계속해서 바뀌고 바뀐 자세에 끊임없이 적응해 나가야 한다. 적응하는 과정은 불편하지만, 그러한 불편이 삶이라는 데에 토를 달긴 힘들다. 요컨대 기대는 것은 함께 살아가는 인간이 주저앉지 않고 서 있을 수 있는 최소한의 자세다. 가즈코는 이 또한 알았던 것 같다. 사라져 가는 엄마를 향해서는 차마 서술할 수 없었던 사랑. 가즈코는 이제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다. 낡은 도덕과 ‘싸우고’ 태양처럼 ‘살아갈’ 작정이라고 말하는 가즈코가 말한 사랑의 모험은 서로에게 기대어 어둠 밖으로 나오는 것이다. 최선을 다해서 자신의 사랑을 쟁취하는 과정에 이름 붙이자면 단연 희망의 엔딩이다. 해는 그렇게 쉽게 지지 않는다.


▒ 박혜진
조선일보 신춘문예 평론 당선, 한국문학평론가협회 젊은평론가상


Plus Point

다자이 오사무(太宰治)

1909년 아오모리현 쓰가루에서 부유한 집안의 십일 남매 중 열째로 태어났다. 본명은 쓰시마 슈지. 자신의 집안이 고리대금업으로 부자가 된 신흥 졸부라는 사실에 평생 부끄러움을 느꼈던 다자이는 도쿄제국대학 불문과에 입학한 후 한동안 좌익 운동에 가담하기도 했다. 1930년 연인 다나베 아쓰미와 투신 자살을 시도했으나 홀로 살아남아 자살 방조죄 혐의를 받고 기소 유예 처분됐다. 1935년 맹장 수술을 받은 후 복막염에 걸린 다자이는 진통제로 사용하던 파비날에 중독된다. 같은 해 소설 ‘역행’을 아쿠타가와상에 응모했으나 차석에 그친다. 이듬해 파비날 중독을 치료하기 위해 병원에 입원하는데, 자신의 예상과 달리 정신병원에 수용돼 심적 충격을 받는다. 1945년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후 정신적 공황 상태에 빠진 일본의 젊은이들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은 그는 ‘데카당스 문학’ ‘무뢰파 문학’의 대표 작가로 불리게 된다. 1947년에 ‘사양’을 비롯해 1948년, ‘퇴폐의 미’ 혹은 파멸의 미가 두드러지는 ‘인간실격’이 출간된다. 1948년 연인 야마자키 도미에와 함께 다마강 수원지에 투신해 생애 다섯 번째 자살 기도에서 서른아홉 살의 나이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