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비에 메시앙. 사진 위키미디어
올리비에 메시앙. 사진 위키미디어

1943년 5월 10일 프랑스 파리. 도시의 그림자가 거리를 천천히 뒤덮을 즈음 늦은 오후의 한 골목 어귀에 두어 사람씩 몰려들기 시작했다. 오는 모습도 제각각이었다. 말쑥한 정장 차림부터 방금 조깅이라도 한 듯한 운동복 차림 등등.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초저녁 낭만이 흘러넘치는 파리의 노천카페 거리 분위기와는 조금 달랐다. 모두 긴장되고 엄숙한 표정이었다.

그들은 좌우를 조심스럽게 살피곤 골목 한쪽에 있는 출입문 뒤로 황급히 사라졌다. 문을 지나면 철저한 신원 확인을 거쳐 건물 내부로 들어갔다. 마치 비밀 결사대 본부로 들어가는 것처럼. 건물 회랑 중심에는 피아노 두 대가 자리하고 있었고 그 옆으로 의자가 둘려 있었다. 사람들이 모이면서 조명은 더욱 어두워졌고 이윽고 젊은 두 남녀가 무대에 올라 연주를 시작했다.

이날은 프랑스가 배출한 20세기 최고의 작곡가 중 한 명인 올리비에 메시앙의 작품 ‘아멘에 의한 환상’이 초연되는 순간이었다. 그의 생전이나 사후나 현대 음악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미치는 그가 왜 이렇게 조심스럽게 자신의 작품을 초연해야만 했을까.

이 곡이 초연되던 1943년의 파리는 독일 나치 점령 아래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0년 파리의 중심 샹젤리제 거리를 행진하는 나치 군대의 행렬은 프랑스의 비극일 뿐 아니라 서방 세계의 자유·평등·박애 사상의 중심이 함락되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이후 1944년까지 지속된 나치 점령 아래 파리에는 모든 분야에 압박과 억압이 행해졌다. 예술 분야도 예외가 아니었다. 유대인은 물론이거니와 프랑스 예술인의 창작 활동도 금지됐으며 당연히 새로운 창작물의 출판 간행 및 공연도 엄격히 금지됐다.

하지만 이런 제재가 프랑스인의 정신세계까지 지배할 수는 없었던 터라 파리의 지식인을 중심으로 비밀 모임이 서서히 조심스럽게 이뤄졌다. 그중 한 곳이 바로 이날 메시앙이 자신의 곡을 부인과 함께 직접 초연한 ‘콘서트 드 라 플레야드(Concert de la Pléiade)’라는 연주 모임이었다. 이는 나치가 제정한 법령에 반하는 모임이기에 참석자들은 목숨을 걸고 자신들의 예술혼을 유지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기에 누구의 눈에 띄어서도 안 됐고, 초대받아 입장한 이들 가운데 변절자 혹은 스파이가 있을까 봐 노심초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메시앙은 자신의 인생에서 무엇보다도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을 거라 추측된다. 31세의 나이로 제2차 세계대전 참전 중 독일 나치군의 포로가 돼 현 폴란드 지방의 한 수용소에 9개월 동안 감금됐고 이후 풀려나 돌아온 파리는 자유가 사라진 커다란 감옥이 돼 있었으니 말이다. 그가 폴란드 수용소 생활 중 ‘세상의 종말을 위한 사중주’를 작곡하며 삶에 절망하는 가운데 하늘에서 내려오는 한 줄기 빛에 의지했다면, 이날 파리에서 초연한 ‘아멘에 의한 환상’을 통해서는 잔인한 고통을 지나 하늘의 눈 부신 빛 아래 모든 것이 화합하고 삶의 소망이 이뤄지기를 바랐다. 그가 평생 의지한 종교, 가톨릭의 의미를 넘어 본인 자신과 당시 자유 세계에 드리워진 죽음의 그림자로부터 부활을 꿈꿨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파리 샹젤리제 거리에 입성하는 독일 나치군.
파리 샹젤리제 거리에 입성하는 독일 나치군.

코로나19 고통이 찬란한 예술로 승화되길

필자도 이 곡을 몇 번 연주할 계기가 있었다. 거의 한 시간가량 지속되는 거대한 곡은 피아노가 낼 수 있는 가장 작은 음부터 가장 큰 음까지 극단적인 음향을 비롯해 모든 영혼이 담긴 깊은 감정을 요구한다. 연주가 끝나면 관객석의 박수 소리가 귀에 들어오지도 않고 넋이 나간 듯 피아노 앞에 털썩 주저앉을 정도니까. 하지만 이 곡에서 갈망하는 새 삶에 대한 간절한 소망은 듣는 이의 마음을 모두 뒤흔들 정도로 강력하다.

당시 파리 초연 공연에 자리한 이들도 이러한 감동과 희열에 연주가 끝난 후 터져 나오는 감정을 억누르며 마음속으로 열렬히 손뼉을 쳤을 것이다. 이는 이날 관객으로 자리한 프랑스의 문학가 폴 발레리, 장 콕토 그리고 동료 작곡가 프란시스 풀랑크를 비롯해 세계적 디자이너 크리스티안 디오르도 마찬가지였을 터.

현재 전 세계에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확산하여 모두가 큰 고통을 겪고 있다. 마치 날개 잃은 천사처럼 빛을 잃고 악기 앞에 앉아 있는 음악 하는 동료들의 모습을 보면 피아니스트인 필자의 마음마저 아프다. 메시앙의 작품이 말해주듯 지금의 어려움과 고통이 더 큰 세상의 빛으로 또 찬란한 예술의 영감으로 승화되기를 그의 ‘아멘에 의한 환상’ 음반을 소개하며 마무리한다.


▒ 안종도
독일 함부르크 국립음대 연주학 박사, 함부르크 국립음대 기악과 강사


Plus Point

함께 감상하면 좋은 음반

올리비에 메시앙(Olivier Messiaen)
‘아멘에 의한 환상(Visions de l’Amen)’

이 곡은 피아노 두 대를 위한 곡이며 고도의 음악적, 기술적 수준을 요구하는 작품이다. 한 시간 남짓한 연주 시간 내에 창조의 아멘, 행성과 별에 의한 아멘, 예수의 죽음의 고통을 위한 아멘, 간절한 소망의 아멘, 천사와 성인 그리고 새의 노래를 위한 아멘, 심판의 아멘 그리고 성취의 아멘 등 7개의 악장이 흘러나온다. 단순히 종교적 접근을 넘어 바로크 시대의 전통을 현대적 기법 및 메시앙 본인의 예술적 어법을 재료로 이성적인 토대 위에 건축물처럼 쌓아 올린 20세기 중반 탄생한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이 곡을 초연한 메시앙 본인과 그의 부인인 피아니스트 이본 로리오의 연주가 담긴 음반을 추천한다. 로리오는 쇤베르크와 버르토크, 졸리베 등의 현대음악을 비롯해 메시앙 작품의 전문가로 명성을 쌓았다. 이밖에도 바흐와 모차르트, 쇼팽에도 조예가 깊고, 드뷔시와 라벨의 피아노곡에 대해서도 일가견이 있다. 만년에도 세계적으로 활발한 연주 활동을 계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