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디지털 콘서트홀 서비스 구축을 위해 도이체방크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았다. 사진 도이체방크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디지털 콘서트홀 서비스 구축을 위해 도이체방크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았다. 사진 도이체방크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지역을 가리지 않고 오프라인 클래식 공연이 중단됐다. 세계적 오페라하우스와 오케스트라가 기존 유료 영상 콘텐츠를 온라인에서 무료 서비스한다. 뉴욕 메트 오페라는 영화관에서 유료 상영한 콘텐츠를 ‘나이틀리 메트 오페라 스트림스’로 개방했고, 빈 슈타츠오퍼, 바이에른 슈타츠오퍼도 아티스트와 제작진 허가 과정을 거쳐 웹에 공연 영상물을 무료 노출한다. DVD나 블루레이 디스크로 이미 출시된 작품이나 시판 예정작들이 스트리밍 서비스에 대거 포함돼 고가의 디스크 구매를 망설이던 애호가나 장르 초심자들이 손쉽게 고급 콘텐츠에 접근할 수 있게 됐다. 평상시에는 보완재 성격의 공연 영상물이 팬데믹(pandemic·감염증 대유행) 시대를 맞아 완전한 대체재가 됐다.

국제적 공연 기관의 스트리밍 서비스 붐은 베를린 필하모닉(베를린 필)이 이끌었다. 지난 3월 독일 정부의 공연장 폐쇄 조치에 따라 베를린 필은 유료 온라인 플랫폼인 ‘디지털 콘서트홀’을 무료 개방했다. 평소 디지털 콘서트홀을 보려면 1년 이용권 149유로(약 20만원)를 내야 했다. 프로모션 코드를 입력하면, 한정된 기간에 테오도르 쿠렌치스의 2019년 11월 베를린 필 데뷔를 비롯해, 2019-2020시즌 베를린 필 정기 연주회 전부를 역주행할 수 있다. 또한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클라우디오 아바도, 사이먼 래틀 같은 베를린 필 역대 음악감독이 남긴 영상과 희귀 다큐멘터리도 볼 수 있다. 베를린 필은 3월 12일 래틀이 지휘하는 ‘버르토크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 무관중 공연을 디지털 콘서트홀에서 생중계했다.

‘디지털 콘서트홀의 아버지’는 리버풀 태생의 래틀 감독이다. 그는 버밍엄 심포니 감독 기간(1980~98)에 무명 악단을 국제적 오케스트라로 성장시켰다. 래틀은 베를린 필 감독 기간(2002~2018)에 생중계 플랫폼의 구축과 안정화에 심혈을 기울였다. ‘양질의 콘텐츠를 값싸게 보급한다’는 감독의 철학에 단원들이 동조했다.


베를린 필하모닉 파나소닉 스튜디오. 사진 파나소닉
베를린 필하모닉 파나소닉 스튜디오. 사진 파나소닉
조성진의 베를린 필하모닉 협연 실황도 디지털 콘서트홀로 감상할 수 있다. 사진 베를린 필하모닉 미디어
조성진의 베를린 필하모닉 협연 실황도 디지털 콘서트홀로 감상할 수 있다. 사진 베를린 필하모닉 미디어

생중계 고급화 위해 한국 다섯 번 찾은 베를린 필

카메라와 편집, 전송 기기만 갖추면 겉보기엔 쉬워 보이는 생중계 구조지만, 베를린 필은 서비스가 일정 수준에 도달하기까지 필요한 재원을 도이체방크를 비롯한 독일 금융권 펀딩과 잦은 해외 투어로 마련했다. 그 결과 베를린 필은 1984년 카라얀 감독 재임 시절 단 한 차례 서울을 찾았지만 래틀 감독 재임 기간엔 무려 다섯 번이나 한국을 방문했다.

베를린 필은 서비스 안정화를 위해 세계적 전자 회사와 접촉했다. 카라얀 감독 재임 시절 베를린 필 레이블 판매권을 입수했던 소니는 콘서트홀 내부의 영상 장비 구축에 관심을 보였고, 삼성전자는 2010년대 초반 스마트TV에 탑재되는 애플리케이션 확보 차원에서 베를린 필과 접촉했다. 삼성에서 나온 초기 스마트TV에 베를린 필 앱이 깔린 연유다.

베를린 필은 메트 오페라 형태의 영화관 송출 방식 대신, 개인용 컴퓨터와 가정용 AV 기기와 연동이 수월한 스트리밍 방식을 택했다. 스마트폰이 본격화하기 전인 2008년에 디지털 콘서트홀 서비스를 준비하면서, 2010년대 영상 재생 시장이 스마트폰·인터넷과 연동되는 TV로 번질 것이라고 정확히 꿰뚫었던 것이다.

결국 베를린 필은 파나소닉과 손잡았다. 파나소닉은 전송 영상 화질의 진화에 민첩하게 대응했다. 720p에서 1080p를 거쳐 4K로 촬영·편집하는 장비 운용에서 이미 일관된 체계를 갖췄다. 인코딩·디코딩 기술과 데이터 압축 기술까지, 파나소닉은 서비스 장애가 발생할 때마다 발 빠르게 대응했다.

또한 베를린 필 콘서트홀의 실황 음향에 최적화한 고해상도 오디오 서비스 제공에서 타사를 압도했다. 파나소닉은 4K/HDR 영상과 96kHz/24비트, 2ch 고해상도 오디오가 동시에 가능하다. ‘공연장에 갈 필요 없이 자택에서 연주회를 즐기는 서비스’라는 래틀 감독의 철학에 파나소닉은 가장 근접한 기술력을 보유했다. 75인치 화면에 4K 영상을 띄우면 단원이 보고 있는 악보까지도 확인할 수 있다. 단원들이 무대로 나오는 발소리와 소리가 모였다가 사라지는 잔영과 여운까지, 오디오 기기가 좋으면 공연장 관객도 듣지 못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파나소닉의 사운드바 SC-HTB900에는 기술진이 장기간 공연장에 상주해서 내놓은 ‘베를린 필하모닉’ 모드를 택할 수 있다.

현재 디지털 콘서트홀은 베를린 필의 미디어 자회사인 베를린 필 미디어가 경영을 담당하고 베를린 필 첼리스트 올라프 마이닝거가 대표를 맡고 있다. 2019년 말 기준 디지털 콘서트홀 등록자는 100만 명, 유료 회원은 약 3만5000명이다. 국가별 유료 회원은 독일이 대부분이고 미국과 일본을 합쳐 20% 정도 차지한다. 디지털 콘서트홀에서 발생하는 수익은 콘텐츠 제작에 재투입한다.

베를린 필은 1940년대부터 콘서트의 테이프 녹음에도 선구적인 업적을 남겼고 카라얀 시대의 영상화 수준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베를린은 전후 고도 성장기의 기술 발전과 예술감독의 첨단 감각이 뉴미디어에서 일체감을 이룬 도시다. 코로나19를 거친 이후, 공연이 재개되면 영상의 무료 전송은 본 상품을 파는 미끼로 쓰일 것이다. 궁극적으로 공연 영상화는 ‘돈을 주고 볼만한 콘텐츠인가’의 질문에, 자신 있게 답할 수 있는 세계 1위 조직만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