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양에 붉게 물든 경남 진주 진양호의 자태. 사진 이우석
석양에 붉게 물든 경남 진주 진양호의 자태. 사진 이우석

만춘(晩春)의 고도(古都), 그 언젠가 나는 5월의 이른 뙤약볕이 쪼아대는 남강 변에 서서, 때 타지 않은 자연 속 화려한 역사 문화를 간직한 옛 도시의 영화(榮華)를 상상하고 있었다. 촉석루 아래 바위에선 맑은 물에 비치는 봄의 수많은 색과 마주칠 수 있었다. 흐르는 꽃잎이 이 도시의 역사를 말해주는 듯했다.

경상도 천년 고도로 단호한 기품이 서린 진주(晉州). 왜란의 전화 속 의연한 승리를 이끈 민초의 꼿꼿한 정신이 서려 있는 곳. 유유히 흐르는 남강 물에 비친 과거 화려했던 양반 문화. 이마저도 부족하다. 이름조차 보배 같은 진주에선 값진 볼거리와 즐길 거리를 금세 찾을 수 있었다.

진주는 산과 강, 호수가 아름다운 천혜의 자연 문화 도시다. ‘진주난봉가’로 유명한 남강이 ‘에스(S)’ 자를 그리며 도심을 지난다. 일교차가 커 물안개 피어난 아름다운 자연 풍경을 자랑하는 곳이다. 진양호의 호젓한 매력 역시 전원 풍경과 어우러져 감동을 선사한다.

진주는 지리산의 동쪽 베이스캠프 격이라 많은 이가 이곳을 거쳐 산청 중산리를 간다. 분지를 이루는 망진산, 비봉산 등 다른 산도 많아 지세가 좋기로 소문났다. 사방이 왕관처럼 늠름한 산세를 자랑한다. 진주의 지형을 자세히 보기 위해선 시내 한복판 선학산에 오르면 좋다. 등반로도 좋고 전망대가 따로 마련돼 있어 진주 시내 전경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 멀리 첩첩 산이 병풍처럼 막아서고 한복판을 꿰뚫고 굽이치는 남강의 수려한 기세가 보기에도 흐뭇하다. 최신식 건물로 지어놓은 전망대. 270도 정도 펼쳐지는 풍경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화장실도 깨끗하다. 그리 많이 걸을 필요도 없다. 지리산 동쪽 끝 관문 도시 진주는 호반 도시 진양군과 합쳐진 덕에 대자연과 함께 호흡하는 도시가 됐다. 곳곳에 짙어가는 신록을 만끽할 만한 곳이 많다.

남강을 막아 만든 진양호 전망대에선 북유럽 산수처럼 이국적 풍광을 맛볼 수 있다. 진양호 전망대는 기능보다 풍경을 위해 세운 듯하다. 이곳 전망대는 층층마다 테라스가 있어 각에 따라 달라지는 호반의 정취를 맛보며 시원한 봄바람을 즐길 수 있다. 노고단(이하 해발고도 1507m), 반야봉(1732m), 삼신봉(1289m), 제석봉(1806m), 천왕봉(1915m) 등 불쑥불쑥 솟아난 지리산의 주봉들이 잔잔한 진양호 위로 솟아 나와 한데 어우러진다. 저녁 무렵이면 산 너머 호수 아래로 지는 석양까지 볼 수 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남쪽 반성면에 있는 강주연못을 갔다. 진주의 옛 이름이 강주(康州)다. 또 무슨 지(池), 무슨 연(淵)이 아니라 ‘연못’이라 이름도 친근하다.

한여름 강주연못은 물을 가릴 만큼 연꽃이 가득하지만, 지금은 개구리밥이며 수초 등 생태의 활발한 움직임을 데크 위에서 만질 듯 볼 수 있다. 때맞춰 차례로 피어나는 주변의 봄꽃들은 강주연못을 동화 속 꼭꼭 숨겨둔 신비의 샘으로 변신시켜주는 무대장치다. 게다가 머리가 저릴 정도로 발바닥을 아프게 하도록 고안된(?) 발 지압 길이 있다. 땅에 둥글고 모진 차돌과 뾰족한 돌을 박아넣어 발바닥을 지압하는 원리인데, 체중이 무거울수록 이게 무슨 중세시대 마녀 고문 비슷하게 느껴진다.

한 발을 떼어 디딜라치면 신음이 절로 새어 나온다. 직접 도전하는 것이 좋지만, 사람들이 지나는 것을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다. 온 가족이 신발을 벗어 던진 다음 지압 길을 걷다가 미간을 찌푸리며 불에 덴 듯 뛰는 것을 편히 앉아서 관람할 수 있다.

경상남도 수목원도 가볼 만하다. 녹음이 우거질수록 자연과 함께한다는 즐거움과 자부심을 느낄 수 있다. 도 단위 수목원답게 다양한 식물류가 살고 있는데 연구적 가치가 좋은 것도 있지만 그저 예쁜 식물이 많아 좋다.


진주 강주연못. 사진 이우석
진주 강주연못. 사진 이우석
진주 촉석루. 사진 이우석
진주 촉석루. 사진 이우석

이름처럼 많은 보배 품은 진주

이처럼 진주는 이름처럼 보배를 많이 품었다. 말이 나온 김에 한글 지명으로 치면 진주는 전국에서 으뜸이다. 몸에 좋을 것 같기로는 경북 영양이 있고, 오래 살 것 같은 전북 장수, 왠지 넉넉할 것 같은 충남 예산도 있겠지만 진주는 자체가 보배 이름이다. 경주와 상주로 경상도란 이름이 이뤄졌다지만, 결코 경상도에서 진주를 빼놓을 수 없다. 진주는 명실상부한 경상도의 중심 도시다.

통일신라의 9주 5소경 중 하나였고, 도청 격인 치소가 강주에 있었다. 고려 시대 경상도 최고 행정단위는 경주였고 2개의 목(牧)은 상주와 진주가 차지했다. 1596년 대구에 경상감영이 들어서기 전까지, 진주는 영남의 중남부를 관할하는 중요 도시였다. 일제강점기 초반까지도 경남도청 소재지였으나 1925년 개항한 부산으로 옮긴 이래, 그 위세가 많이 내려왔다.

하지만 그 자존감은 보통이 아니다. 예로부터 양반 문화의 상징이던 음식과 기생 하면 강경, 평양, 진주를 꼽았다. 기생집 선주후면(先酒後麵)의 핵심인 냉면 역시 평양과 진주가 유명하다. 서울에서 생활하다 보면 진주 사람을 유독 많이 만날 수 있는데 그 절반은 함양, 산청, 의령, 창녕 출신이다. 고향은 다를지라도 교육도시인 진주에서 학교에 다닌 사람이 많아서 그렇다. 교통도 좋다. 도로를 1시간만 달려도 창원, 사천 등 바다가 나오고 산 아래 길을 돌아나가면 바로 호남 땅 광양, 순천에 이른다.

진주에서의 봄날 밤은 낮에 둘러본 자연, 역사, 문화의 답사가 있어 즐거운 추억으로 새길 수 있다. 조선 3대 누각(평양 부벽루, 밀양 영남루, 진주 촉석루)인 촉석루를 밝힌 조명이 있어 더욱 아름다운 밤이 된다.

결연한 의지와 기개로 수많은 외침을 물리친 군사 읍성 진주성의 위풍당당한 모습과 그 수려한 곡선미는 단호하고 강인한 절제 속에 화려한 계절 미를 뽐내고 있는 2020년의 봄과 딱 닮았다.


▒ 이우석
놀고먹기 연구소 대표, 성균관대 미술교육학과, 전 여행기자협회 회장


여행수첩

진주에는 먹는 보배가 가득하다. 전국적으로 높은 음식 문화를 뽐내는 곳이다. 진주비빔밥이나 진주냉면 등은 전국구 명성을 얻었다. 해물 육수에 메밀면을 말고 육전을 올린 진주냉면은 하연옥, 수정식당, 평화식당, 은하식당 등이 유명하고 천황식당, 제일식당 등은 육회를 올리고 선짓국을 곁들인 진주비빔밥으로 이름났다. 진주비빔밥은 전주비빔밥보다 나물 가짓수는 적은 대신 육회 양이 많고 간이 진하지 않아 깔끔한 맛을 낸다. 이 두 대표 음식만 봐도 과거 진주목의 영화를 가늠할 수 있다. 육전과 지단 등 손이 많이 가는 고명을 얹은 것으로 보아 과연 기세등등한 양반이 기생집에서 먹던 별미였음을 알 수 있다.

요즘은 진주에 ‘실비집’이라는 술 문화가 있다. 통영의 다찌집(선술집)과 마산 통술집, 전주 막걸릿집처럼 술을 주문하면 안주는 그냥 내오는 방식으로 저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는데 모두 마음에 드는 것은 매한가지다. 진주의 실비집은 그날 장 본 재료로 반찬도 하고 요리도 해서 한 접시씩 내주는 스타일이다. 요리도 요리지만 특히 안줏거리 반찬류가 많다. 멸치조림, 삶은 땅콩, 묵채, 고구마 줄기 무침 등을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