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은 어느 날 아침 징그러운 벌레로 변한 한 남자의 초라하고 눈물겨운 사투를 그린 소설이다. 남자는 형용할 수 없는 모습으로 변한 자신을 혐오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가족들 앞에 나타나지 않기 위해 애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이 그저 그런 벌레가 아니라 당신들의 가족이었음을 인정받기 위해 모습을 드러내야 하는 모순적인 상황에 직면해 있다. 주인공이 처한 거짓말 같은 상황은 비극이라기보다 차라리 희극에 어울릴 법한 풍자적이고 우화적인 동화 같다. 그러나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이 작품을 20세기에 쓰인 다른 어떤 작품보다 더 비극적인 자리에 위치시킨다. 마지막 문장을 다시 한번 읽어 보자. “가족은 지금 새로운 희망과 기대에 벅차 있다. 모든 것이 다 잘될 것만 같은 긍정적인 기분이 이들에게 모종의 확신을 품게 한다. 가족, 그러니까 딸과 그들의 부모에게서 퍼져 나오는 밝은 기운 가운데 그레고르 잠자와 관련된 일의 그림자 따윈 조금도 섞여 있지 않다.”

‘변신’이 주인공의 여동생인 그레테에게 초점이 맞춰진 채 끝나는 건 이유가 있다. 소설은 벌레로 변한 그레고르 잠자의 몰락과 여동생 그레테의 상승이 교차하는 구조로 진행된다. 위기에 처한 주인공에게 가장 먼저 손 내미는 사람이 알고 보니 그를 이용하려던 적(敵)이었던 셈이다. 잠자의 적은 벌레로 변한 몸뚱어리가 아니다. 오빠를 생각해 주는 척하며 가족들과 잠자를 연결해 주는 역할을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 역할을 통해 오빠를 소외시키는 그레테다. 그러고 보면 이 소설은 처음부터 동생 그레테에 대한 잠자의 반응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곳곳에서 알려줬다. 잠자의 목소리가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가장 먼저 알아챈 그레테에 대해 잠자는 의문부터 가진다. “왜 누이동생은 다른 사람들한테로 가지 않는 걸까? 아마 인제야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입기 시작하지조차 않은 모양이다. 그런데 그 애는 도대체 왜 우는 걸까? 그가 일자리를 잃는 위험에 처해 있기 때문에, 그리고 그렇게 되면 사장이 다시 묵은 빚을 재촉하며 부모를 박해할 터이기 때문에?” 잠자는 신경과민과 피해망상 사이의 어디쯤에서 불안하고 의심에 찬 눈으로 여동생을 바라본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둘은 서로 적이 된다.

그레고르 잠자의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 여동생은 묘하게 그의 신경을 거스른다. 가령 잠자의 방에 있는 가구를 치워야 할지 그대로 둬야 할지 가족들이 논의하는 과정에서 엄마와 여동생의 의견이 엇갈린다. 엄마는 잠자가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면 바뀔 게 없다고 느낄 수 있도록, 그래서 그만큼 더 쉽게 그동안의 시간을 잊어버릴 수 있도록, 방을 이전과 똑같은 상태로 보존해 둬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동생은 가구들이 오빠가 기어 다니는 데 방해가 되고 있으며, 무엇보다 이 가구들이 지금은 전혀 쓸모가 없으므로 치워 버리는 게 낫다고 주장한다. 엄마와 여동생의 의견에 따라 잠자가 기거하는 공간은 방이 될 수도 있고 동굴이 될 수도 있다. 이는 곧 현재의 잠자를 잠깐 벌레 상태가 된 가족으로 보느냐, 그러니까 인간 그레고르 잠자로 보느냐, 혹은 영원히 바뀌지 않는 벌레로 보느냐를 구분 짓는 선택이기도 하다. 엄마에게 이 벌레는 여전히 자신의 아들 그레고르 잠자이지만 오빠에 관한 한, 특히 ‘부모 앞에서 특별한 전문가를 자처하고 나서는 데 익숙해 있는’ 동생에게 이 벌레는 한 마리 오갈 데 없는 생물이다. “이게 오빠라는 생각을 버리셔야 해요.” 동생의 의견에 따라 방이 비워진다. 장롱을 내어 갈 때만 해도 별다른 동요가 없던 잠자가 책상을 옮기는 모습을 보고 자신의 과거가 모조리 삭제되는 기분을 느끼는 장면에서는 애처롭다 못해 가엾기까지 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가정부의 외침 속에서 그의 죽음은 우주에서 가장 하찮은 존재의 무의미한 소멸로 명명된다. “여보세요, 이게 뒈졌어요, 저기 누워 있는데요, 아주 영 뒈졌다니까요!”

이제 이 우스꽝스러운 상황이 다른 어떤 비극보다 더 비극적인 이유에 대해 이야기할 차례인 것 같다. ‘변신’의 마무리는 오늘날 우리 마음에 뿌리박힌 공포의 근원을 정확하게 겨눈다. 가족 안에서 우리 자신은 적어도 누군가의 대체물이 아니다. 기능과 도구로 존재하며 쓰임을 입증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잠자는 가족에게 생계유지를 위한 기능이자 도구였다. 결국 그 쓰임의 시효가 다하자 누구도 그의 죽음을 막지 않았고, 그 자리는 새로운 도구로 대체된다. 바로 여동생이다. 다만 우리는 여동생의 미래가 잠자와 다를 바 없으리라는 걸 짐작할 수 있다. 안전한 대피소이자 회복할 수 있는 쉼터는 하늘 아래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이 “새로운 꿈과 좋은 계획의 확증처럼 비치는” 그레테의 젊은 몸을 창백한 빛으로 뒤덮는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으로 간단히 교체되며 끝나는 ‘변신’의 엔딩은 자리만이 영원하고 그 자리의 사람은 부속품이자 소모품으로 전락한 현재를 무섭게 예견한다.


▒ 박혜진
조선일보 신춘문예 평론 당선, 한국문학평론가협회 젊은평론가상


Plus Point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

1883년 체코의 프라하에서 유대인 부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독일어를 쓰는 프라하 유대인 사회에서 성장한 그는 프라하 대학에서 법률학을 공부하고 법학박사 학위를 받고서 보험회사에 취직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글을 쓰는 삶을 병행했던 그에게 유일하게 의미 있는 시간은 문학을 창작하는 순간이었다. 1901년에 쓴 단편소설 ‘어느 투쟁의 기록’은 두 인물의 대립을 통해 내면의 자아와 외형적 자아가 분열된 양상이 나타나는데, 이는 직장 생활과 창작 활동 사이에서의 딜레마를 잘 보여 준다.

카프카는 머릿속으로 구상한 작품을 이른 시간에 완성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사형선고’와 ‘변신’ 모두 몇 시간 만에 쓴 작품으로 알려졌으며, 1914년에 발표한 ‘유형지에서’는 그의 작품 중 형식적으로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 1917년에 이미 폐결핵 진단을 받았으나, 작품 활동을 지속해 1922년 ‘성’을 집필했다. 1922년 보험회사에서 퇴직, 1924년 오스트리아 빈 근교의 결핵요양소에서 사망했다. 사후 자신의 모든 서류를 소각하라는 것이 카프카의 유언이었으나 그의 친구 막스 브로트가 카프카의 유작, 일기, 편지 등을 출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