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니 멘델스존
파니 멘델스존

인간의 창의적 감성은 그 어떤 상황에도 굴복하지 않는 것 같다. 오히려 힘든 상황이 때론 우리의 감성과 영감을 살찌우는 자양분이 되기도 한다. 요즘 코로나19 시대의 예술인들을 보며 더욱 느끼는 바다. 비록 공연장이 문을 닫았지만, 예술가들은 지금의 어려움을 자신들의 영감으로 승화시켜 새로운 창작을 해나가고 있고, 또 온라인 공간에서 이역만리 넘어 시청자들과 음악을 교류할 수 있는 플랫폼도 여럿 만들어지고 있으니 말이다. 힘들지만 또 새 삶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현재의 삶에 관해 고민하던 중 지금으로부터 약 200여 년 전 베를린에서 살다 간 한 여인의 생애가 문득 떠올랐다. 그의 이름은 파니 멘델스존.

파니 멘델스존은 우리에게 ‘결혼 행진곡’으로 잘 알려진 펠릭스 멘델스존의 누이다. 이렇게 소개하면 그가 무척 섭섭해할지도 모르겠다. 그는 당시의 수많은 음악인이 극찬을 아끼지 않았던 천재적인 재능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였다. 모차르트의 재림이라는 평을 받은 남동생 펠릭스 멘델스존도 그를 무척이나 존경해 그의 조언에 평생 의지했다. 또 그는 남동생의 음악적 능력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없을 연주 실력과 음악 창작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필자에게 파니 멘델스존은 저항과 인내의 아이콘이다. 그는 ‘여성’이라는 굴레와 싸우며 이를 자양분 삼아 아름다운 450여 작품을 남겼다.

파니 멘델스존은 1805년 독일 함부르크에서 출생했다. 여섯 살이 되던 1811년에 부모를 따라 프로이센 제국의 수도 베를린으로 이사했다. 그는 마흔두 살의 이른 나이에 사망할 때까지 베를린 라이프치거 거리 3번가에 자리한 멘델스존 하우스에 기거했다.

부유한 은행가였던 아버지는 교육에 대단히 열성적이었다. 그는 남매를 교육하기 위해 당시 유럽 최고의 음악인들을 교사로 초빙했다. 때로는 좋은 수업을 받게 하기 위해 프랑스 파리까지 이들을 보냈다. 남매는 당대 독일어권 최고의 음악가라 불리던 카를 프리드리히 첼터에게 작곡 수업을, 또 가장 존경받던 피아니스트로 여겨지던 이그나츠 모셸레스에게 피아노 수업을 받았다.

하지만 파니에는 거기까지였다. 남동생은 창작의 영감을 얻어야 한다며 거금을 들여 이탈리아까지 여행을 보냈던 아버지는 파니에게 다음의 글을 남겼다.

“딸아, 어쩌면 펠릭스에게 음악은 직업이 될 수 있겠지. 하지만 너의 삶에 있어서는 그저 아름다운 장식품에 불과할 것이야. 삶의 중심이 될 순 없다.”

요즘 시대에는 가당치도 않은 이야기겠지만, 당시 그는 아버지의 말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이 밖에서 돈을 버는 행위는 양갓집 여성의 품위를 해치는 불미스러운 행동이었고 이는 가족에게 불명예스러운 일로 여겨졌다.

그는 가족의 반대로 상업 연주회에서 연주하지 못했으며, 대다수의 작품 역시 출판하지 못했다. 그는 유럽에서 스타로 도약한 남동생이 여러 나라를 종횡무진하며 보낸 편지 속 무용담을 보며 대신 만족해야 했다. 펠릭스는 누나에게 음악적 조언을 받으면서도 그의 출판은 결사반대했다.

그는 이 참담한 마음을 한 친구에게 “이번 겨울에는 아무것도 작곡할 수 없었어. 가곡을 작곡하려면 많은 노력을 해야겠지만, 그럴 필요가 있을까. 어차피 지나가던 닭마저도 그 음악에 맞춰 울지 않을 텐데 말이지”라고 편지에 적어 보내기도 했다.


파니 멘델스존의 작품 ‘한 해(das Jahr)’ 중 4월 곡 머리 부분에 남편 빌헬름 헨젤이 그린 삽화. 사진 위키피디아
파니 멘델스존의 작품 ‘한 해(das Jahr)’ 중 4월 곡 머리 부분에 남편 빌헬름 헨젤이 그린 삽화. 사진 위키피디아
베를린 라이프치거 거리 3번가에 있는 멘델스존 하우스 안 파니 멘델스존의 음악실. 사진 위키피디아
베를린 라이프치거 거리 3번가에 있는 멘델스존 하우스 안 파니 멘델스존의 음악실. 사진 위키피디아

불평등 속 꽃피운 위대한 작품…뒤늦게 빛 발해

파니 멘델스존은 공개 연주와 출판이 금지된 상황에서도 부단한 노력과 끈기로 450여 작품을 남겼다. 오로지 지인만 초대하는 하우스 음악회를 위해 작곡했다기에는 그가 남긴 작품 중 상당수가 무게감 있는 오케스트라 작품 및 칸타타, 현악 4중주다. 이렇게 잊힌 작품들은 1980년이 넘어서야 재조명되기 시작했고 아직도 재발굴 및 재평가는 현재 진행 중이다.

필자도 재작년부터 그의 작품을 종종 독주회 프로그램에 올리곤 한다. 남동생 펠릭스 멘델스존의 작품과 비교해도 결코 손색이 없는 작곡 기법, 아름다운 멜로디와 더불어 상당한 기교를 요구하는 비르투오시티까지, 훌륭한 작품들이 가득하다.

특히 그가 말년에 남긴 작품 ‘한 해(Das Jahr)’를 즐겨 연주하곤 하는데, 1월부터 12월까지 그녀가 생각하는 인생이 피아노 소리 예술로 투영돼 있는 작품이다. 그의 남편인 프로이센 궁정화가 빌헬름 헨젤이 각 월에 맞는 시를 고르고 또 그에 맞는 형형색색의 오선지를 골라 그 위에 삽화를 넣어 시각과 청각을 어우르는 종합 예술 작품이라는 평을 받는다.

필자는 그의 작품이 아름다운 이유가 넘치는 천재의 재기 가운데 체념과 관조가 재빠르게 교차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같은 시대 동료 작곡가 작품에서는 도통 느낄 수 없는 독특한 감정선은 아마 그녀의 인생이 고스란히 투영됐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음악을 향한 그녀의 사랑과 의지는 작품을 통해 170년이 지난 지금 다시 빛을 발하고 있다.


▒ 안종도
독일 함부르크 국립음대 연주학 박사, 함부르크 국립음대 기악과 강사


Plus Point

함께 감상하면 좋은 음반

한 해
포르테피아노, 엘스 비세만스

1월부터 12월 그리고 마지막 코랄 곡을 포함해 총 13곡의 작품이 커다란 한 작품을 이루고 있다. 1841년 작곡된 것으로 전해지며 이후로도 계속해서 작곡가에 의해 수정됐다고 한다. 그가 개인 작업실에서 가까운 친구들을 초대해 종종 열었던 살롱 음악회에서 연주했다고 하지만 그러기에는 시대를 앞선 진보적인 화성의 진행 및 전조, 급작스러운 감정의 즉흥성 그리고 본인 및 남동생 펠릭스 멘델스존이 즐겨 작곡한 ‘무언가(songs without words)’의 가곡 형식이 대담하게 어우러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