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토네프 뒤 파프 와인을 숙성시키는 큰 오크통들. 사진 김상미
샤토네프 뒤 파프 와인을 숙성시키는 큰 오크통들. 사진 김상미

유럽의 와인 역사는 3000년이 넘는다. 이렇게 긴 세월을 인간과 함께한 와인 중에는 흥미진진한 시대적 배경을 담은 것들이 꽤 있다. 프랑스 남부에서 생산되는 샤토네프 뒤 파프(Chateauneuf du Pape)도 그런 와인이다. 샤토네프 뒤 파프는 마을 이름이자 와인 이름이다. 이 와인은 중세가 끝나가고 근세가 태동하던 시점에 탄생했다.

14세기 초 ‘교황의 아비뇽 유수’라는 사건이 벌어졌다. 십자군 전쟁의 패배로 교황의 권위가 무너지자 군주의 세력이 점점 커졌다. 특히 프랑스 왕 필리프 4세의 힘이 막강했는데, 그는 전쟁 준비와 왕권 강화를 위해 더 많은 세금이 필요했다. 그가 주목한 곳은 교회였다. 영주나 백성으로부터는 더 나올 돈이 없었지만, 교회는 헌금이 쌓여 상당한 부를 축적했고 세금 한 푼 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필리프 4세가 교회 과세를 시도하자 교황 보니파시오 8세는 격노해 그를 파문하려 했다. 하지만 필리프 4세는 오히려 선수를 쳐 교황을 납치 감금했다. 노쇠한 교황이 충격으로 얼마 못 가 사망하자 필리프 4세는 프랑스 출신 클레멘스 5세를 교황으로 추대했고 1309년에는 교황청까지 아비뇽으로 옮기도록 했다. 이것이 이후 70년간 이어진 아비뇽 유수의 시작이었다.

1378년에야 교황청은 로마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곧이어 교황이 사망하자 로마는 기다렸다는 듯 새 교황을 이탈리아인 중에서 뽑았고, 이에 반발한 프랑스는 프랑스 출신 교황을 다시 뽑아 아비뇽에 앉혔다. 교황이 두 명이 된 것이다. 백년전쟁, 흑사병, 오스만 제국의 침략 등으로 혼란스러운 시대에 정신적으로 기댈 교회마저 갈라지니 민생은 참혹 그 자체였다.

1449년 콘클라베에서 교황을 선출하기로 하면서 분열은 봉합됐지만, 대중의 신앙심은 예전 같지 않았다. 교황은 돈을 쏟아부어 거대한 성당과 멋진 예술품으로 권위를 과시하려 했지만 역부족이었고, 오히려 르네상스가 꽃을 피웠다. 1453년 결국 오스만에 의해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백년전쟁이 끝나면서 유럽은 중세를 마감하고 근세로 접어들었다.


아비뇽의 옛 교황청. 사진 김상미
아비뇽의 옛 교황청. 사진 김상미

돌과 바람과 그르나슈가 만든 예술

아비뇽 유수 동안 교황은 일곱 번 바뀌었다. 모두 프랑스인이었고 와인 애호가였다. 그중에서도 요한 22세는 포도 재배에까지 관여할 정도로 와인을 좋아했다. 그는 아비뇽에서 북쪽으로 약 20㎞ 떨어진 작은 마을에 여름 궁전을 짓고 포도나무를 심었는데, 이곳이 바로 샤토네프 뒤 파프(불어로 ‘교황의 새로운 성’이라는 뜻)다.

샤토네프 뒤 파프의 땅은 돌투성이다. 흙 한 점 보이지 않을 정도로 크고 작은 돌이 가득하다. 이런 땅에서 곡물을 생산하기란 불가능에 가깝지만, 포도만은 예외다. 돌은 포도 재배에 큰 도움을 준다. 한낮의 태양열을 머금었다 기온이 떨어지는 밤에는 온기를 내뿜어 완숙을 돕는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돌이 과연 어디서 온 걸까. 현지 와인 생산자에게 물으니 빙하기 때 알프스에서 빙하가 내려오며 실어 왔다고 한다.

샤토네프 뒤 파프에는 바람도 많이 분다. 사흘에 한 번꼴로 미스트랄(mistral)이라는 바람이 부는데 평균 시속 100㎞에 이르는 강풍이다. 이 바람이 습기를 말려주니 곰팡이성 질병에 대한 걱정이 적어 유기농으로 포도를 기르기에 무척 유리하다.

샤토네프 뒤 파프에서 가장 많이 재배하는 품종은 그르나슈(Grenache)다. 그르나슈는 향이 풍부하고 질감이 부드러운 레드 와인을 생산하지만 익는 데 많은 열기가 필요하다. 햇볕이 강렬하고 돌이 많은 샤토네프 뒤 파프는 그르나슈를 기르기에 더없이 좋은 환경이다. 그래서 이곳의 그르나슈는 장수를 누린다. 어떤 것은 수령이 100년이 넘는다. 고목은 나무당 포도 생산량이 극히 적지만 향미의 응축도는 탁월하다. 어린나무는 결코 따라갈 수 없는 수준이다.

그르나슈는 고목의 자태도 예술이다. 유난히 뒤틀린 모양새를 하고 있는데, 이는 강풍에 꺾이지 않도록 키를 최대한 낮춰 땅에 가깝게 기르기 때문이다. 잎이 다 떨어진 한겨울에 포도밭을 보면 그르나슈가 마치 군무를 추는 것처럼 보인다. 명화 속 풍경처럼 아름다운 곳에서 돌과 바람과 그르나슈가 만든 명품 와인이 샤토네프 뒤 파프다.


13개 품종 섞인 다양한 맛

샤토네프 뒤 파프는 주 품종인 그르나슈를 포함해 최대 13가지 품종을 섞어 만든다. 그르나슈가 풍부한 과일 향과 부드러운 질감을 책임진다면, 시라(Syrah)와 무르베드르(Mourvedre)는 강한 타닌으로 구조감을 부여한다. 다른 품종들도 와인에 향신료와 꽃 등 복합미를 더한다. 품종별 비율이 정해진 바 없어 와인 메이커마다 자유롭게 블렌딩해 만드니 샤토네프 뒤 파프야말로 다양한 스타일의 극치를 보여주는 와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애호가들이 새로운 샤토네프 뒤 파프를 만날 때마다 마음이 설레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다.

그렇다면 꼭 마셔봐야 할 샤토네프 뒤 파프는 어떤 것이 있을까? 블렌딩의 진수를 맛보고 싶다면 샤토 드 보카스텔(Chateau de Beaucastel)과 샤토 라 네르트(Chateau La Nerthe)가 있다. 샤토 드 보카스텔은 13가지 품종을 모두 섞어 와인을 만든다. 그르나슈 못지않게 무르베드르가 많이 섞이는데, 무르베드르는 타닌이 많아 보카스텔의 참맛을 맛보려면 10년 이상 병 숙성이 필요하다. 만약 일찍 열어야 한다면 마시기 2~3시간 전에 디캔터(와인의 맛을 살리기 위해 따라 옮기는 아래로 퍼진 호리병 모양의 용기)로 옮겨 향이 충분히 피어오르게 하는 것이 좋다. 샤토 라 네르트는 샤토네프 뒤 파프에서 가장 오래된 와이너리(와인 양조장) 중 하나로 역사가 무려 156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와인에는 그르나슈가 약 55%, 시라와 무르베드르가 30%, 기타 품종이 15% 섞여 있다. 그르나슈의 비율이 높아 보카스텔보다는 어릴 때 즐길 수 있지만 1~2시간 정도 디캔팅해서 마시면 더욱 풍성한 향미를 즐길 수 있다. 그르나슈 비율이 80~90%로 높은 샤토네프 뒤 파프는 복합미는 덜할 수 있지만 병 숙성 없이 어릴 때 즐길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돌투성이 땅, 강렬한 햇볕, 거센 바람을 이겨낸 샤토네프 뒤 파프는 근세로 들어서며 인간이 겪어야 했던 고난과 시련을 닮았다. 특별한 날 소중한 사람과 함께할 때 샤토네프 뒤 파프를 나눠 보면 어떨까. 와인의 역사적 의미와 풍부한 아로마가 자리를 더욱더 향기롭게 해줄 것이다.

김상미 와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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