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록이 무르익은 합천호. 사진 이우석
신록이 무르익은 합천호. 사진 이우석

합천(陜川), 오묘한 지역이다. 경남이면서도 부산보다는 대구와 가까운 생활권. 가야산, 황매산, 오도산 등 쟁쟁한 산봉우리 아래 법보사찰(法寶寺刹) 해인사를 품고, 청정 황강이 흘러 합천호와 합류하는 물 맑고 산 좋은 곳이다. 이곳에 신록이 무르익었다.

산수야 워낙 좋지만 역사도 깊은 땅이다. 대가야부터 고려 건국 시기까지 천하제일의 난공불락 요새로 꼽혔던 곳이 대야성인데, 바로 지금 합천 땅(합천읍)이다. 이사부에 의해 함락된 이후 줄곧 신라의 성이었는데, 신라와 백제(후백제) 간의 전투가 여러 번 벌어졌다. 이곳은 백제의 호남 땅에서 서라벌이 있는 영남으로 진격하기 좋은 목이라 대야성을 점령하기 위해 치열하게 다퉜다.

대야성이 있던 곳을 합천군 합천읍 지역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지역의 북서 방향은 높은 산이 막아서고 있고, 남쪽으로 황강이 물굽이 치는 물돌이 지형이라 육상 공격로가 협소하다. 이 때문에 백제로부터의 공격을 막아내는 천연 요새 역할을 했다.

결국 고려가 후삼국의 통일을 이루게 되자 대야성은 내륙 요충지로서의 많은 전화(戰火)를 역사 속으로 묻어둔 채 평온한 산골 마을 합주(陜州)로 남게 된다. 다만 정유재란 당시 북진하는 왜군을 막기 위한 조선 육군 사령부를 합주에 설치했는데, 이때 충무공 이순신이 백의종군 신분으로 약 백여 일간 이곳에 머물렀다고 한다. 이후 세월이 흘러 합주는 합천이 됐다.

법보사찰 해인사는 한국을 대표하는 명찰(名刹)이다. 아니, 세계적으로도 칭송받는 불교계 보물을 간직한 도량이다. 신라 애장왕 때 순응과 이정이 창건한 해인사는 의상의 화엄 10찰 중 하나다. 조계종 종합 수도도량으로서 엄격한 규율을 지켜오는 곳이다.

해인사가 다시 주목을 받은 것은 공교롭게도 숭유억불책을 쓴 조선이 건국하면서다. 태조 7년(1398년) 강화도 선원사(禪源寺)에 있던 ‘팔만대장경’ 판을 지천사(支天寺)로 옮겼다가 이듬해 해인사로 옮겨오면서부터다. 세조는 장경각(藏經閣)을 지어주고 인수왕비와 인혜왕비가 대장경판당을 중건했다.

고려 고종 23∼38년(1236∼51)에 간행된 ‘팔만대장경’은 대반야경에서부터 마지막 화엄경 탐현기까지 총 1514종 불경을 새겼다. 일반적으로 8만 자라고 알고 있는데 이는 틀렸다. ‘팔만대장경’은 8만4000 법문을 실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며, 실은 경판만 해도 8만 개가 넘는다. 경판에 새겨진 글자는 5272만9000자다. 종교를 떠나 실로 어마어마한 국가 유산이자 보물이 아닐 수 없다.

애초에 ‘팔만대장경’ 보관 전용 건물로 지었다지만, 자체 건축미가 아름답다. 화려한 장식은 없지만 볕이 들면 바닥에 연꽃 모양의 그림자를 남기도록 하는 등 간결하면서도 곡선과 직선이 조화롭게 녹아들었다. 조선 초기 목조 건축물로, 건축사적 가치도 중하다.


1970년대 서울 도심을 재현한 합천영상테마파크. 사진 이우석
1970년대 서울 도심을 재현한 합천영상테마파크. 사진 이우석
한국을 대표하는 명찰로 알려진 해인사. 사진 이우석
한국을 대표하는 명찰로 알려진 해인사. 사진 이우석

해인사의 보배 ‘소리길’…아름다운 경치

해인사에 또 하나의 보배가 있다. 바로 해인사 소리길이다. 경내로 오르는 신록 어린 푸른 길이다. 계속 따라다니는 물소리와 새소리, 묵묵히 걷는 이들의 심장 고동처럼 아주 정확히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자연의 노래가 함께한다.

총 8개 코스의 합천활로 중 하나인 해인사 소리길은 씩씩한 기상의 가야산과 천년고찰, 그림 같은 계곡을 모두 꿰는 가히 ‘관광의 왕도’라 할 수 있다. 잠시 걷는 것만으로도 도시의 때를 한 꺼풀 벗어던질 수 있을 듯하다.

야천리에서 해인사 입구까지 이어지는 6㎞ 중 농산정 초입에 겨우 들어섰을 뿐인데, 귀에는 청아한 홍류동 계곡 물소리가 좔좔 흘러든다. 늙은 소나무에서 삐져나온 칼칼한 산소가 주는 청량감은 걷기 여행자만이 느낄 수 있는 특혜다. 아스팔트 검은 길을 걷는 것도 아니다. 포근한 황톳길을 걸으면 발바닥도 신이 난다. 보기에도 즐거운 노란 황토 오솔길이다.

아래로부터 무릉교, 농산교, 명진교, 영산교 등 총 7개의 다리를 건너게 되는데 이리저리 징검다리를 건너며 양쪽 길을 오가도 좋다. 경치 좋은 곳이면 아니나 다를까 장소에 얽힌 고사와 경승에 관한 시조가 적혀 있어 심심치 않다. 쉬엄쉬엄 올라도 1시간이면 해인사 입구 성보박물관에 이른다. 여기서 다시 향긋한 전나무숲이 펼쳐진다.

만춘에 파릇파릇 돋아난 조막손 이파리로 일상에 지친 도시의 여행자를 부르는 지금, 만사의 괴로움을 살짝 내려놓고 문화 역사 속으로 향하는 대자연의 오솔길이 절실할 때다.

온통 다랑이 논밭이 지천인 합천은 강원도 못지않은 거친 산세를 품었다. 가야산과 이웃한 바위산 모산재 역시 장관이다. 순결바위, 돛대바위 등 울퉁불퉁 알통을 자랑하는 근육질 산세와 기암들은 삼라만상을 표현한 듯해서 합천팔경으로 꼽힌다. 내려오면 황계폭포가 나온다. 폭포 옆 절벽에 설치된 데크에 서서 2단으로 떨어지는 물을 가까이 볼 수 있다. 폭포는 약 20m 높이지만 바닥의 깊은 소(沼)까지 생각하면 30여 m에 이른다.

산이 좋으니 당연히 물도 좋다. 내륙의 바다처럼 펼쳐진 합천호에선 바나나보트와 웨이크보드 등 다양한 수상레저를 즐길 수 있다. 이도 저도 싫다면 그저 호수가 눈앞에 펼쳐진 카페에서 시원한 음료와 함께 물끄러미 관수(觀水)하기에도 좋다. 마침 늦봄의 물안개라도 활활 피어오른다면 그 몽환적인 풍경은 두고두고 뇌리에 남는다.

사진가들에게 물안개 포인트로 유명한 합천보조댐 나무데크 바로 앞에 있는 합천영상테마파크도 가볼 만하다. 타임머신에 가깝다. 입장하는 순간 과거로 향하게 되는 타임슬립이 시작된다. 일제 강점기와 1970~80년대 서울 도심을 그대로 재현했다. 중앙청 앞과 서울역 앞 옛 거리가 어찌나 똑같은지 혀를 내두를 정도로 ‘디테일(세밀 완성도)’이 좋다. 길거리 구인 벽보와 공중전화부스, 버스 정류장이 옛 추억 속 서울과 너무도 닮았다. 을지로의 건물 옥상에는 ‘크라운맥주’ 간판이 섰고, 종로 금성전자판매점에는 14인치 컬러텔레비전이 진열 중이다. 이곳에는 실제 커피나 식사를 할 수 있는 공간도 곳곳에 마련됐고 하룻밤 묵어갈 수도 있어 더욱 그 완성도에 매료된다.

대자연 속에서 역사와 문화, 비현실적 과거까지 상상하는 것을 두루 체험할 수 있는 합천 여행. 6월을 맞아 시작하는 새로운 계절의 활기를 얻어갈 수 있는 생활 급속충전기 역할을 할 듯하다.


▒ 이우석
놀고먹기 연구소 대표, 성균관대 미술교육학과, 전 여행기자협회 회장


여행수첩

먹거리 해인사 경내에는 향긋한 산채를 즐길 수 있는 식당이 많다. 삼일식당은 송이버섯국이 압권이다. 송이를 넣어 끓인 맑은국은 그 향기가 굳어버린 입맛을 단번에 되살린다. 상 위에 한 바닥 깔리는 산나물 반찬은 놀던 젓가락을 춤추게 한다.

합천읍 핫들식당은 유명한 합천 삼가한우를 파는 곳이다. 고기가 좋으면 직화로 굽지 않아도 맛있다. 단풍만큼 진한 선홍색 고기를 돌판에 올려 구워 먹고, 된장물을 부어 한소끔 끓여내면 당장 근사한 소고기된장이 된다.

대병면 대운숯불갈비는 다슬기탕이 맛있기로 입소문난 곳. 직접 잡은 다슬기를 듬뿍 넣고 아욱과 함께 팔팔 끓여낸다. 김치도 맛있고 멸치조림 등 반찬 면면도 좋다. 운 좋으면 반찬으로 메뚜기튀김도 얻어먹을 수 있다.

합천호관광지 인근 황태촌은 아귀와 황태를 함께 끓여내는 탕으로 유명한 곳. 칼칼한 양념에 황태와 생아귀 살을 뭉텅뭉텅 썰어 넣고 미더덕과 함께 시원하게 끓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