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어느 젊은 남성의 전부를 건 사랑 이야기다. 손닿을 수 없는 타인의 마음에 전부를 걸다니, 너무 숭고한 나머지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이 이야기는 아무리 좋게 보려 해도 시대착오적이란 생각이 떠나질 않는다. 하긴, 1700년대에 쓰인 소설을 읽으며 시대착오적이라는 말을 쓰는 것보다 더 착오적인 일도 없겠지. 전부를 건 사랑 이야기의 줄거리는 이렇다. 베르테르는 젊은 변호사다. 상속 사건을 처리하기 위해 한 마을에 들른 베르테르는 로테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로테에게 약혼자가 있다는 걸 알게 된 그는 마음을 접고 마을을 떠난다. 이후 여하한 이유로 파면당한 베르테르는 다시 마을로 돌아오는데, 그간의 시간이 무색할 정도로 로테를 향한 마음에 변화가 없다. 그러나 로테는 그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낙담한 베르테르는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전부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라는(all or nothing) 이 극단의 사랑 이야기를 좋아했던 적은 없는 것 같다. 나는 이 미친 사랑 노래가 정말로 좀 ‘미친’ 사랑 노래가 아닌가 하는 혐의에 무게를 두는 쪽이었다. 집착에 가까운 그의 사랑에 문제가 있다면 그건 그가 열렬히 사랑한 로테에게 약혼자가 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로테를 향한 그의 사랑이 실은 로테를 사랑하는 자기 자신을 향해 있었던 게 아닐까 생각하는 것이다. 일찍이 베르테르만큼 자기애가 넘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과하면 독이 된다는 말은 틀린 적이 없다. 베르테르의 슬픔과 베르테르의 죽음은 과도한 자기 사랑에서 비롯된 과도한 절망일지 모른다.

드라마 퀸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있다. 다른 사람들이면 이만저만하게 지나갈 일도 이들이 개입되면 극적인 감정의 돌풍이 일며 눈물과 분노의 대서사시가 펼쳐진다. “내가 이다지도 외곬으로 그녀만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는데, 어떻게 그녀가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지, 다른 사람을 사랑해도 되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고 말하는 베르테르야말로 정말 알 수가 없는 사람이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 게 더 믿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나 같은 범인에게는 더더욱 알 수 없는 일인데, 사실 베르테르의 이런 과도한 절망에는 진작부터 자라온 뿌리가 있다. 소설을 열면 독자들은 “이상할 정도로 명랑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다”고 말하는 그의 말을 보게 된다. 이어 그는 자신의 “어느 점이 사람들의 마음을 끄는지 잘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꽤 많은 사람이” 자신을 좋아한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베르테르를 좋아한다는 데에는 얼마간 사실이 있을 것이나, 그에게 이러한 자아도취는 로테로부터 자신이 거부당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근원적인 이유가 된다.


베르테르의 죽음에 응답한 건 권총 자살을 모방한 현실의 독자들뿐이었다.
베르테르의 죽음에 응답한 건 권총 자살을 모방한 현실의 독자들뿐이었다.

드라마 퀸이 주어진 상황에 극적으로 반응함으로써 누군가에겐 평범하게 지나갈 상황을 시끌벅적한 드라마, 그러니까 하나의 이야기로 만드는 경우라면 베르테르는 결코 드라마 퀸에 속하지 않는다. 드라마 퀸이라는 말보다는 나르시시스트란 말이 더 잘 어울리는 그의 기질은 인간이란 모두 어린이라는 유아론적 인간관에 기인한다. 그는 인간에 대해 말하기를 하느님의 눈으로 보면 “오직 나이 많은 어린애와 나이 적은 어린애가 있을 뿐” 다른 차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에 비춰 보면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꽤, 아니 매우 의미심장하다. 사랑받지 못한 자신을 스스로 파괴함으로써 거부당하는 자신을 소멸시킬망정 끝내 거부당할 수 있는 존재로서의 자신을 인정하지 않은 그의 행위가 스스로 생각한 것처럼 비극적이거나 숭고하게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황하고 슬퍼하는 사람들이야 있지만, 그들 역시 베르테르의 죽음을 기억하지 않을 것 같다. 어떤 성직자도 그의 죽음을 배웅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그의 열정과 그의 존재도 얼마 지나지 않아 자취를 감출 것이다. 그의 마음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처럼 그의 죽음 역시 누구에게도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란 사랑을 거부당한 데서 비롯되는 비참함이겠지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란 자신이 더는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는 자각에서 오는 박탈감이겠다. 나는 사랑의 열병에 대한 이야기로서의 이 소설은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세상의 중심이었던 한 인간이 중심에서 밀려나며 느끼는 고독과 외로움, 소외와 불안에 대한 이야기로서의 이 소설만큼은 좋아한다. ‘한낱’ 사랑 때문에 생의 불씨를 스스로 꺼 버린 ‘젊은’ 베르테르의 치기 어리고 맹목적인 사랑은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고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도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욕망인바, ‘늙은’ 베르테르였다면 절대 가능하지 않았을 미친 사랑 노래이자 자신을 받아주지 않는 세상을 향한 구애와 절망의 노래이기 때문이다.


▒ 박혜진
조선일보 신춘문예 평론 당선, 한국문학평론가협회 젊은평론가상


Plus Point

요한 볼프강 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암마인에서 태어났다. 라이프치히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으나 문학과 미술에 더 몰두했다. 1772년 법률사무소에서 수습 생활을 하던 중 약혼자가 있는 샤를로테 부프와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이때의 체험을 소설로 옮긴 것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으로 알려졌다. 이 소설은 당시 유럽 젊은이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어 주인공 베르테르의 옷차림이나 절망적인 사랑으로 인한 자살이 유행하기도 했다. 1775년엔 바이마르로 이주해 그곳을 문화의 중심지로 끌어올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행정가로서 국정에 참여하는가 하면 교육, 재정, 건설 등 많은 분야에서 재능을 발휘해 성과를 거두는 등 인간을 설명하는 모든 분야에 관심을 기울였다. 1786년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 고전주의 문학관을 확립했고, 1794년 독일 문학계의 또 다른 거장 실러를 만나 독일 바이마르 고전주의를 꽃피웠다.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 시대’ ‘색채론’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 시대’ ‘이탈리아 기행’ 등을 완성했다. 24세에 구상하기 시작해 생을 마감하기 한 해 전에 완성한 역작 ‘파우스트’를 마지막으로 1832년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