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문장으로 기억되는 많은 작품과 달리 ‘거미여인의 키스’는 마지막 문장으로 회자되는 몇 안 되는 소설에 속한다. “이 꿈은 짧지만 행복하니까요.” 이 안에 어떤 맥락이 담겨 있을지 우리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이 말에 공감하는 데 그토록 자세하고 특수한 맥락은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 우리의 행복한 꿈은 대체로 짧고, 짧은 꿈만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 주기 때문이다. 그것은 꿈과 현실이 대비되는 이유이기도 할 테다. 꿈을 따르는 인간과 현실을 따르는 인간은 언제나 가장 멀리 자리 잡고 있으니까.

‘거미여인의 키스’는 두 사람의 대화를 중심으로 구성된 소설이다. 주된 공간은 감옥이고 주인공은 한방에 갇힌 죄수 두 명이다. 말리나는 미성년자 보호법 위반으로 구속된 동성애자고 발렌틴은 마르크스주의를 신봉하는 정치범이다. 한 줄짜리 소개로도 짐작할 수 있는 바, 두 사람의 기질과 가치관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게릴라 활동을 하다 검거된 발렌틴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사회 혁명이다. 말리나에게 가장 중요한 감각의 기쁨이 발렌틴에겐 부차적일 뿐 아니라 바람직하지 않다. 말리나가 금지된 욕망을 상징한다면 발렌틴은 좌절된 혁명에의 의지를 상징한다. 끝과 끝이 만나듯 바깥의 존재라는 점에서 두 사람은 닮았다.

두 사람의 대화를 매개하는 것은 말리나가 발렌틴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다. 발렌틴은 그의 시각대로, 그러니까 마르크시즘의 시선으로 영화에 대해 평한다. 이야기하는 말리나와 듣고 평하는 발렌틴 사이에는 선명한 시각 차가 존재한다. 말리나가 극 중 인물을 “남편과 자식을 행복하게 해 주는 완전무결한” 여자이자 매력적인 여자로, 그러니까 “진지해 보이면서도 조금은 애교를 떨 줄 아는 멋진 여자”라고 말하면 발렌틴은 그 여자가 “식모를 부리면서 돈 몇 푼 때문에 할 수 없이 일하는” 이들을 착취하는 사람일 거라고 빈정거린다.

그런데 말리나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말리나의 각색에 의존한 것으로, 말리나는 이야기의 전달자가 아니라 변형자로 더 선명하게 존재한다. 따라서 영화를 거쳐 이뤄지는 두 사람의 대화는 점점 더 영화에 빗댄 그들의 이야기가 되고 영화 ‘이야기’는 말리나의 욕망을 반영하는 숨겨진 고백으로 기능을 한다.

요컨대 ‘거미여인의 키스’는 완전히 다른 두 사람이 여섯 편의 영화와 한 곡의 유행가에 대해 대화하며 두 사람 사이에 그어진 선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과정을 다룬 작품으로, 자리한 곳마다 경계선이 그어지는 오늘날의 시점으로 보자면 불가능에 가까운 소통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금지된 욕망을 상징하는 말리나는 영화의 예술성을 내용의 정치성과 구분하는 입장을 보여 준다. 발렌틴에게는 아름다운 것만 생각하는 말리나의 예술관이 위험하고 위태로워 보인다. 그러나 미쳐 버릴 것 같은 현실에서 탈출할 수 있도록 자신을 내버려 두라는 말리나의 태도는 예술만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만이 그를 승인해 주는 세계라고 말하는 것 같다.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탈출하는 것이다. 한편 발렌틴에게 혁명은 곧 자신의 감정에 수치를 느끼는 일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에게 감정을 허락하지 못한다. 그러나 금지된 욕망과 좌절된 혁명 의지는 모두 다 좁은 감옥에 갇혀 있다. 서로 다른 두 질서가 만나는 지점에서 경계가 사라져도 그들이 속한 세계는 좁고 어두운 사각형을 벗어나지 못한다. 여전히 감옥이고 출구는 없다.

이 절망의 스토리에서 도대체 어떤 끝을 상상해야 할까. 가석방된 이후 극좌파들에게 구타당한 말리나는 응급실에서 모르핀을 맞고 의식이 점멸해 가는 와중에 꿈속에서 발렌틴을 만난다. 꿈속에서 두 사람은 자유롭다. 매개하는 이야기에 기대야만 가능했던 두 사람의 대화는 이제 거침없이 느끼고 욕망하고 눈물 흘린다. 자신들을 에워싸고 있던 거미줄에 갇혀 있길 거부하는 그들은 비로소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이토록 아름다운 곳에 영원히 있고 싶지 않아요?” 말리나의 질문에 발렌틴은 동지들이 기다리는 투쟁의 세계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하지만, 자신의 현실을 자각하는 와중에 그는 말리나에 대한 사랑을 고백한다. 함께할 때 사랑을 고백할 수 없었던 자신의 두려움까지도 고백한다.

그러니까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연인으로부터 거절당한 자의 읊조림이다. 그러나 말리나는 이 꿈을 긍정한다. 짧은 순간 두 사람이 주고받은 것이 영원 같은 진실이기 때문이다. 깨어나면 감옥 같은 현실이 기다리고 있겠지만, 지금 이 짧은 꿈은 행복하다. 꿈속에서 이들은 가면을 쓰고 있지 않다.


▒ 박혜진
조선일보 신춘문예 평론 당선, 한국문학평론가협회 젊은평론가상


plus point

마누엘 푸익(Manuel Puig)

1932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북서쪽 헤네랄 비예가스에서 태어났다. 부에노스아이레스대학에서 건축을 공부하다 철학으로 전공을 바꿨고, 이후 이탈리아 협회 장학금을 받아 로마 치네치타 실험영화센터에서 영화를 공부했다. 시나리오를 썼지만 크게 주목받지 못하다가 소설을 쓰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영화와 문학을 연결하는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다. 1965년 뉴욕에서 발표한 첫 소설 ‘리타 헤이워스의 배반’을 출간하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됐고 ‘르 몽드’ 최고의 소설로 선정됐다. 이후 발표한 두 번째 소설 ‘색칠한 입술’은 고국에서 판매금지됐으나, 외국 비평가들에게 극찬을 받았다. 에바 페론을 패러디한 소설 ‘부에노스아이레스 사건’ 때문에 에바 페론의 암살 리스트에 오르기도 했다. 1976년에 발표한 ‘거미여인의 키스’는 그의 작품 중 가장 대중적이고 대표적인 작품으로, 할리우드에서 영화화되는 등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 외 작품으로 ‘천사의 음부’ ‘이 책을 읽는 자에게 영원한 저주를’ ‘보답 받은 사랑의 피’ ‘열대의 밤이 질 때’ 등이 있다. 1990년 아홉 번째 소설 ‘상대적인 습기’를 완성하지 못한 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박혜진

  • 목록
  • 인쇄
  • 스크랩
  • PDF 다운
ⓒ 조선경제아이 & economy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