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보름 박사. 사진 김하늘
이한보름 박사. 사진 김하늘

비스트로 파포
메뉴 메뉴 수시 변경, 재래돼지 라구 및 스테이크 예약 필수
주소 경북 포항시 북구 장량주택로14번길 11
영업 시간 17:30~01:00 (무정기 휴무. 휴무 공지는
인스타그램 계정 @bistro_papo로 공지)


한 농부의 이야기다. 패션 디자이너를 꿈꾸다 축산을 연구하고 양돈업에 뛰어들어, 국내 유일의 재래돼지 농장을 운영하는 농부의 이야기다. 일제 강점기 때 사라진 한국 재래돼지를 되살린 육종가이자 농학박사의 이야기다. 해외를 오가며 쌓은 경험치와 안목으로 다음 세대를 위한 미래 농업 모델을 직접 만드는 한 농업 디자이너의 이야기다. 그의 이름은 이한보름(이하 이 박사). 정월 대보름에 태어나 지어진 이름대로, 만월의 기운이 충만하다.

초록빛 소나기가 내린 뒤 아기 모시옷 같은 산뜻한 밤바람이 불어오는 7월의 어느 여름밤, 경북 포항의 작은 양식당에서 이 박사를 만났다. 우연한 계기로 그가 키우는 재래돼지를 선물 받아 구워 먹고 쪄 먹어 보고 난 뒤, 그 호화로운 맛에 합리적인 호기심이 생겨 만남을 청한 결과다.

털이 검고 광이 나며, 함몰된 얼굴에 큰 눈과 곧추선 귀를 가졌다. 또한 둥근 어깨와 넓은 가슴, 좁은 배가 특징이며 긴 엉덩이에 다리는 짧지만, 균형이 알맞다. 그가 키우는 재래돼지 말이다. 한낮 땡볕에 그을려 피부가 검고, 오랜 시간 근육을 다스린 듯 체격이 다부지며, 코가 잘 뻗었고, 귀는 둥글고 윤기가 돌며, 눈빛이 깊고 미소는 천진하다. 그의 모습 말이다. 진정 좋아하면 응당 닮기 마련인가. 사진으로나마 확인한 탄탄한 재래돼지의 모습과 마주하고 있는 그의 다부진 모습을 보니, 홍어를 닮은 안양의 어느 흑산도 홍어집 사장님의 얼굴이 스친다.

비스트로 ‘파포’. 오너셰프가 창업을 준비하며 운영했던 푸드트럭 ‘파스타 포차’ 앞자를 따 붙여 만든 이름이다. 고등학교 때 뷔페식당 주방에서 아르바이트하며 깨달은 적성으로 자신만의 식당을 열리라 꿈꿨다. 전국 각지를 다니며 음식을 먹고, 배우고 싶은 식당이 있으면 당장 주방에 들어가 일을 배웠다. 그 당찬 객기는 일본 도쿄로까지 이어졌다. 그렇게 포항에 안착해 1인 식당을 운영한 지 올해로 3년째다.

이 식당은 이 박사가 키우는 재래돼지를 취급한다. 전국에서 유일하다. 100g당 8000원, 그러니까 1㎏당 8만원으로 웬만한 한우 갈비 못지않은 가격이다. 비싼 만큼 상시 내놓을 수 없는 모험적 재료지만, 송아지 안심만큼 부드럽고 치즈보다 풍미가 좋다는 평을 얻을 정도로 고객의 반응은 폭발적이다.

이 박사가 직접 염장한 프로슈토(생고기를 소금에 절여 발효시킨 이탈리아 전통 생햄)가 레드 와인과 함께 테이블 위로 오른다. 얼마 전 문을 연 드라이에이징(일정 온도, 습도, 통풍이 유지되는 곳에서 고기를 공기 중에 2~4주간 노출시켜 숙성시키는 건식 숙성 방법)을 연구하는 ‘에이징랩’에서 갖가지 책을 참고하고 셰프들의 조언을 얻어 직접 숙성을 시킨 결과다. 얇게 저며진 햄 한 꺼풀을 포크의 골에 끼워 돌려 한 입 넣는 순간, 침이 울컥 솟는다. 침샘에 마치 젖줄이라도 달린 듯 그 침 또한 달다. 붉은 와인 한 모금을 넘기니, 허리가 굽으며 코끝에서 부여잡던 한숨이 새어 나온다.

“아버지에게서 나는 소똥 냄새가 정말 싫었어요. 저는 농사 말고 옷을 짓고 싶었죠.”

우물물을 길어 먹던 어릴 적, 이 박사의 집 앞마당에는 개도 닭도 아닌 돼지가 살았다. 과수원을 사서 그곳에 소와 돼지를 키우며, 토종 농산물 운동가로도 활동했던 아버지는 식량안보 등 당신이 지키던 업의 가치를 끼니처럼 말씀하시곤 했다. 아버지에게서 나는 분뇨 냄새가 싫어 농사는 짓지 않겠다고 했건만, 부친의 완고한 뜻으로 축산학과에 입학했다. 옷이 좋아 허구한 날 시내에 나가 쇼핑하느라 바빴던 멋쟁이 청춘이, 기성복이 마음에 들지 않아 기어이 제 손으로 옷을 만들어 입던 고집 있던 사내가 어느덧 2대째 업을 잇고 그 너머를 실현하고 있다.


비스트로 파포. 사진 김하늘
비스트로 파포. 사진 김하늘
재래돼지 라구 파스타. 사진 김하늘
재래돼지 라구 파스타. 사진 김하늘
재래돼지 프로슈토. 사진 김하늘
재래돼지 프로슈토. 사진 김하늘

재래돼지 길러 전통 ‘맛’ 지킨 박사

이 박사는 재래종에 가까운 외형의 돼지 300두를 모아 5세대에 걸쳐 교배, 유전자 감정을 거쳐 유전적으로 순수한 재래돼지 종돈을 확보하고, 현재는 재래돼지 200두를 포함한 총 3700여 두의 돼지를 기르고 있다.

가게 안에 가득 찬 이 황홀한 냄새. 황홀경을 싣고 오는 접시가 눈앞에 놓인다. 재래돼지로 만든 라구 그리고 스테이크. 라구는 파스타와 함께 제공되는 고기 소스를 말한다. 재래돼지 특유의 풍부한 지방의 맛이 토마토소스를 기필코 뚫는다. 마지막에 엑스트라 올리브 오일로 마무리하는 대신 재래돼지의 비계로 기름을 뽑아 너그럽게 얹어 한 수를 두었다. 이 신성한 풍미를 널따랗고 두꺼운 파스타가 아량 있게 받쳐준다. 후후 흩날리다 사뿐히 내려앉은 것 같은, 들꽃 같은 치즈가 녹진한 고상함을 더한다.

포크와 나이프를 양손에 쥐고 여유롭게 웃고 있지만, 이미 마음은 혓바닥으로 바닥을 쓸고 남았을 정도로 스테이크의 자태는 몹시 유혹적이다. 돼지고기 위에 감자 퓌레와 버터 소스를 차분히 얹어 입안에 넣으면, 애쓴 차분함을 무력하게 잃고야 만다. 치즈를 품은 듯한 고소한 스테이크에 설탕, 정종, 된장을 섞은 된장 버터가 맛의 목덜미를 감싸고 우유와 버터를 듬뿍 넣은 퓌레가 맛의 품을 감싼다.

“계속할 겁니다.” 재래돼지는 우리 토종 종자를 되살렸다는 신토불이 정신이 담겨 있는 데 그 의미가 있지만, 생산성이 낮아 값이 비싸다는 단점 또한 존재한다. 하지만 가격 장벽을 뛰어넘은 재구매율이 70%가 넘을 정도로,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압도적인 특유의 맛이 있기에 가능한 반응이다. ‘비스트로 파포’처럼 과감한 시도를 하는 식당들이 늘어나기 위해서 이 박사는 소비자들에게 재래돼지에 대한 경험을 다양한 경로로 알리기 위해 끊임없이 궁리한다. 셰프들과 많은 시도를 하며 설득 가능한 부가가치를 만들기 위해 다양한 드라이에이징 실험을 하고 있다.

경험을 통한 선택이 취향과 문화를 만든다. 음식만큼 유행에 민감하지 않은 게 없고, 토종과 전통만큼 공허하지 않은 게 없다. 하지만 유행을 문화로 안착시키기 위해 전통과 유행, 그 어느 쪽의 프레임에도 갇히지 않고 가장 전통적인 것으로 가장 트렌디한 맥락을 만들어낸다. ‘재래돼지와 드라이에이징’, 이것은 과거와 현재의 시제일치, 혹은 동기화가 아닐까.

‘사각’ 씹히는 비계의 맛과 혀를 적시던 육즙의 맛을 잊지 못한다. 백 돼지가 점을 찍고 나타나도 어림없다. 재래돼지의 유혹이다. 나는 지금도 침을 삼킨다.


▒ 김하늘
외식 컨설팅 회사 ‘라이스앤컴퍼니’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