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로네 와인을 생산하는 이탈리아 베로나 베네토주의 발폴리첼라 산 조르지오 전망.
아마로네 와인을 생산하는 이탈리아 베로나 베네토주의 발폴리첼라 산 조르지오 전망.

로마네 콩티, 샤토 라피트, 페트뤼스는 요즘 우리가 꼽는 세계적인 명품 와인이다. 하지만 이 와인들의 역사는 아무리 길어도 800년을 넘지 못한다. 2000년 전 고대에는 어떤 와인이 명품이었을까? 당시 명품 와인에서는 어떤 맛이 났을까? 이번에는 그 해답을 찾아 떠나보자.

고대에는 지금보다 자연이 건강해서 와인에서도 더 신선한 맛이 났을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땐 야생 동물이 많아서 포도가 익을 즈음이면 낮에는 새가, 밤에는 산짐승이 내려와 열매를 따 먹기 일쑤였다. 1년 내내 지은 농사를 망치지 않으려면 포도가 덜 익어도 수확을 서둘러야 했다. 포도의 완숙을 기다릴 처지가 아니었던 것이다. 와인의 알코올은 포도의 당분이 발효라는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는 산물인데, 설익은 포도로 만들었으니 고대 와인은 알코올 도수가 낮고 향도 약했다.

과거에는 유리병도 무척 귀했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인과 로마인은 와인을 암포라(Amphora)라는 커다란 항아리에 담아두고 조금씩 덜어 마셨는데, 봄이 지나고 여름이 되면 날씨가 더워지면서 남은 와인이 공기와 활발히 접촉해 급속히 시어졌다.

그러다 와인의 보존성을 높일 방법으로 알아낸 것이 바로 말린 포도로 와인을 만드는 것이었다. 포도를 말리면 수분이 줄고 당도가 높아지기 때문에 와인의 알코올 도수가 높아 시어지는 속도가 한결 느렸다. 그뿐만 아니라 포도를 말리면 와인의 향도 더 풍부해졌다. 하지만 생산성이 문제였다. 그리스나 이탈리아처럼 비가 적고 햇볕이 강렬한 지역에서만 생산이 가능했다. 포도를 말려서 만들다 보니 싱싱한 포도로 만들 때보다 와인 생산량도 훨씬 적었다. 당연히 값이 매우 비싸 왕족이나 귀족 같은 부유층의 전유물이었지만, 그 인기는 18세기까지 이어졌다. 19세기에 들어와 유리병과 코르크가 대량 생산되면서 와인의 밀봉과 장기 보관이 가능해지자 말린 포도로 만든 와인은 명품의 자리를 서서히 내어주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북동부에 있는 발폴리첼라(Valpolicella) 지역은 로마인이 살기 전부터 그리스인이 정착해 와인을 생산하던 곳이다. 발폴리첼라라는 이름은 로마어와 그리스어가 섞인 것으로 ‘와인 저장고가 있는 언덕’이라는 뜻이다. 이곳에서는 지금도 말린 포도로 아마로네라는 와인을 만들고 있다.

발폴리첼라에서는 포도를 수확하면 3~4개월간 말린다. 이 기간에 포도는 수분을 조금씩 잃어가며 맛과 향을 응축시킨다. 과거에는 지푸라기로 짠 자리에 포도를 펼쳐 놓고 햇볕에 말렸지만 지금은 건조실에 설치한 건조대에 포도를 널어 위생적으로 말린다. 포도가 다 마르면 으깨서 즙으로 만들고 발효 단계로 들어간다. 말린 포도로 만든 즙은 당도가 높아 발효가 매우 더디다. 당분이 음식의 변화를 늦추기 때문이다. 우리가 오래 두고 먹기 위해 잼을 만드는 것과 같은 이치다. 아마로네용 포도즙은 발효하는 데만 1~2개월이 소요된다. 일반 와인의 발효가 10~14일 걸리는 것에 비하면 무척 긴 시간이다. 발효가 더디면 실패할 가능성도 커 여러모로 노력과 정성을 쏟아야 한다.


아마로네 와인을 만들기 위해 건조대에서 포도를 말리고 있다. 사진 마시 와이너리
아마로네 와인을 만들기 위해 건조대에서 포도를 말리고 있다. 사진 마시 와이너리

진하고 묵직한 고급 와인의 맛

아마로네 와인은 알코올 도수도 상당히 높다. 일반적인 레드 와인의 알코올 도수가 13~14%인 데 비해 아마로네는 15~16%나 된다. 하지만 맛을 보면 알코올이 그다지 느껴지지 않는다. 묵직한 보디감(입안에서 느껴지는 와인의 무게감), 진한 과일 향, 상큼한 산미 등이 알코올과 균형을 이루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다크초콜릿, 계피, 견과류 등 풍미의 복합성도 탁월하다. 이는 아마로네가 오랜 숙성을 거치기 때문이다.

아마로네는 진하고 묵직한 맛이 한국인 입맛에도 잘 맞아 국내에도 많은 팬을 확보하고 있다. 하지만 비싼 가격은 여전히 아마로네의 치명적인 단점이다.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데 반해 생산량이 적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대안이 있다. 바로 베이비 아마로네라고 불리는 리파소(Ripasso) 와인이다. 리파소는 아마로네를 만들고 남은 포도껍질에 신선한 와인을 부은 뒤 한 번 더 발효해 만든다. 긴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포도를 말렸는데 딱 한 번만 와인을 만들고 버리기란 아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아마로네를 만들고 남은 포도 찌꺼기에는 여전히 달콤한 향과 즙이 가득해 재활용의 여지도 충분하다. 물론 리파소가 아마로네만큼 향이 풍부하고 부드럽지는 않지만 웬만한 레드 와인 못지않게 풍미가 좋고 구조감이 탄탄하다. 물론 가격은 훨씬 저렴하다.

발폴리첼라에서는 싱싱한 포도로도 와인을 만든다. 이런 와인은 지역명과 동일하게 발폴리첼라라고 부른다. 리파소를 만들 때 사용하는 와인 바로 발폴리첼라다. 이 와인은 아마로네와 똑같이 코르비나(Corvina), 몰리나라(Molinara), 론디넬라(Rondinella)라는 적포도로 만든다. 발폴리첼라에는 체리나 자두처럼 신선한 과일 향이 많고, 여운에서는 쌉쌀한 아몬드 향이 느껴져 깔끔한 뒷맛을 선사한다.

다가오는 추석, 모처럼 가족과 둘러앉아 맛있는 음식을 나누는 자리를 위해 와인 한 병을 준비해 보는 것은 어떨까? 맛이 상큼한 발폴리첼라는 모든 추석 음식과 두루 잘 맞는다. 단 해산물은 피하는 것이 좋다. 해산물의 불포화 지방산이 레드 와인의 철 성분과 만나면 비린내가 날 수 있어서다. 리파소는 두툼한 고기산적이나 갈비찜과 즐겨보자. 리파소의 탄탄한 타닌이 지방의 느끼함을 해소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다. 아마로네에 곁들일 음식으로는 담백한 수육이나 육전을 추천한다. 음식의 양념이 강하지 않아야 아마로네의 탁월한 풍미를 제대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밝게 비추는 둥근 달 아래에서 건강을 기원하며 와인으로 축배를 들어보자. 와인의 향기가 한가위를 더욱 풍요롭게 장식해 줄 것이다.

김상미 와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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