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넓은 논에 서있는 전대경 미듬 영농조합법인 대표. 사진 전대경
드넓은 논에 서있는 전대경 미듬 영농조합법인 대표. 사진 전대경

좋은술 양조장
주종 탁주, 약주, 청주, 증류주
주소 경기 평택시 오성면 숙성뜰길 108
연락처 031-681-8929
전화로 체험 예약 후 술을 빚고 마셔볼 수 있음.


낙엽이 피어난다. 작은 간이역 앞에 섰다. 가을의 푸른 진경(眞景)이 눈동자를 메운다. 라디오 같은 풍경을 한참이나 흘려보내다 꿈을 꾸었다. 바람에 몸을 맡기고 누군가에게 마음을 맡기며 지속적으로 흔적을 남기며 나아가고 나아갔다. 눈을 뜬 세상은 가을의 터널 속으로 치닫고 치달았다. 이윽고 열차는 멈추고 평야에 닿았다.

평택(平澤). 이렇다 할 산맥조차 없는 곳. 다가오다 멀어지는 물결 끝에 수평선만 갈망하다 기복 없는 지평선을 마주하니 마음에 평온함이 물든다. 누렇게 익은 벼들이 서걱서걱 흔들린다. 바람은 소리를 싣는다. 가을이 온전히 내려앉은 황금색 쟁반, 그 위로 하얀 술 한잔 건네는 사람을 만났다. 볕에 흠뻑 그은 피부에 스트라이프 티셔츠와 찢어진 청바지, 하얀 스니커즈 차림. 반백 넘은 반 백발의 농부의 웅숭깊은 눈빛에서 이삭 같은 젊음이 느껴진다. 바로 전대경 미듬 영농조합법인 대표다.

55년간 오로지 쌀농사만 지은 아버지의 업적을 이어받아, 한평생 오로지 쌀을 공부하고 쌀농사만 지어온 쌀 박사 농부. 스타벅스에 라이스칩, 라이스바, 쌀 카스텔라 등을 직접 기획, 제조, 납품하는 스타 쌀 가공품 디자이너. 평택평야와 지역의 역사를 수집하고 알리는 데 골몰하는 로컬문화 기획자. 평택의 작은 양조장에서 그를 만나 잔을 부딪쳤다.

태생부터 익어갈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벼가 익고 술이 익는 평택 오성 ‘숙성’리에 위치한 ‘좋은술 양조장’. 이곳에서 양조장 주인 이예령 사장이 아리따운 색과 결로 상을 차렸다. 이곳에서 청와대 행사 단골 술로 이름난 ‘천비향’이 빚어진다. 이 양조장은 광활한 논 한가운데 있다. 이곳이 외딴 섬이라면 나는 결단코 배 한 척 띄우지 않으리라. 해가 뜨면 해와 놀고 달이 뜨면 달과 놀 테니 주둥이만 남겨두고 사지 결박을 희망하노라니.

상이 펼쳐진다. 쑥 잎을 납작하게 지져 그릇 위에 수놓았다. 계란은 흰자와 노른자를 분리해 꽃처럼 말아 가을 대추를 꽃 암술처럼 모양내 고명으로 얹었다. 돼지고기를 노릇노릇 구워 사과와 함께 버무린 미나리 무침을 곁에 냈다. 마치 빨간 치마에 초록 저고리를 차려입은 새댁의 음식을 보는 것 같다. 무엇 하나 솜씨를 부리지 않은 것이 없는데 음식이 나오는 속도와 맛이 노련함을 말한다.

“푸른 바람이 불었어요.” 6월 중순께 여름 볕이 쏟아지는 어느 날, 전대경 대표의 나이 열아홉 즈음 부친을 따라 ‘중간낙수(약 일주일 동안 벼를 건조시켜 양분을 흡수하게 하는 것)’를 하던 날이었다. 삽으로 논에 골을 내주는데 그날따라 논이 태평양처럼 느껴졌다. 일은 끝날 줄 몰랐다. 마디마디가 끊어질 것 같아 허리를 세우고 섰는데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은 그의 이마에 맺힌 땀을 사뿐히 훔쳐 갔다. 얼음냉수보다 시원했던 한 모금의 바람. ‘농사가 천직이구나.’ 장래를 일구던 어린 여름날의 청년, 그 청년은 어느새 만석꾼 중년이 되어 그날을 회상하며 허허실실 탁주 한 잔을 비운다. 그의 표정은 완만하고 머뭇거림이 없다. 마치 바람을 향해 바람이 된 바람처럼.


전대경 대표가 지은 쌀로 이예령 사장이 양조한 술 ‘택이’. 사진 김하늘
전대경 대표가 지은 쌀로 이예령 사장이 양조한 술 ‘택이’. 사진 김하늘
전대경 대표가 쌀농사를 짓는 평택평야와 보리밭의 5월쯤 모습. 사진 김하늘
전대경 대표가 쌀농사를 짓는 평택평야와 보리밭의 5월쯤 모습. 사진 김하늘

직접 농사지은 쌀로 다섯 번 발효

오양주는 이예령 사장이 빚어내는 좋은술 양조장의 효자 상품이다. 장안에서 술깨나 마셨지만 오양주는 처음이다. 말 그대로 다섯 번 발효한 술이다. 우리가 흔히 마시는 일반 막걸리는 한 번 빚은 술인 단양주다. 발효 횟수에 따라 단양·이양·삼양·사양·오양주로 분류된다. 당연히 정성은 비례한다. 단양주는 고두밥에 물과 누룩을 섞어 며칠 두면 완성된다. 오양주는 고두밥에 물과 누룩을 섞어 발효하는 과정에서, 밥으로 만든 덧술을 네 번 추가해야 한다. 덧술은 누룩 속에 있는 미생물의 먹이인데, 오양주는 덧술을 네 번이나 더하는 만큼 미생물 활동이 극대화한다. 그만큼 만들기 어렵다.

덧술을 추가하는 과정을 ‘술밥을 준다’고 하는데, 삼양주를 담그면서 술밥을 추가할수록 술의 힘이 강해진다는 것을 느꼈다. 일 년이 지나도 술맛이 변하지 않고 오히려 맛은 더 부드러워졌다. 그리고 덧술의 횟수를 늘리면 누룩을 적게 써도 맛 좋은 술을 빚을 수 있겠다는 욕심이 생겼다. 하지만 삼양주에서 사양주로 넘어가면서 상해 버리는 술이 수십 통이 넘었다. 술밥을 주는 횟수가 잦으니 그만큼 고되다. 일주일 내내 술을 빚었다. 6일 동안 하루도 빼지 않고 술밥을 쪄서 섞어야 한다. 2년은 술맛이 죽을 맛이었다. 답은 숙성에 있었다. 오양주를 다 빚고 100일간의 발효 과정과 9개월간의 저온 숙성 과정을 거쳐서야 완성될 수 있었다.

오양주인 ‘천비향’은 이예령 사장이 양조한 술이다. 참드림 쌀 품종으로 빚는다. 명주라고 불리는 술이 많지만 이렇게 하나의 품종 국내산 쌀로 빚는 술은 드물다. 상품 가치가 전혀 없는 폐기물 쌀인 싸라기로 술을 빚는 경우가 적지 않다.

전 대표는 식탁에 올릴 수 없는 술이 지역의 이름을 달고 유통되는 것을 허용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예령 사장에게 천비향보다 생산 단가는 낮지만 옹골찬 쌀 품종의 고품질 쌀로 평택의 술을 빚어달라 청했다. 그 이름, ‘택이’. 천비향 탁주는 14도의 오양주인 데 비해 택이는 8도의 삼양주다. 더욱 많은 사람들이 편하게 즐기기 바라는 마음에서 기획했다. 쌀이 나고 자란 평택시 오성면 ‘신리’ 마을의 지도가 술병의 밑동을 감싸고 있다.

전 대표의 고향 사랑은 이게 다가 아니다. 올봄 전 대표가 기획한 책 ‘쌀을 닮다’가 미식 책 분야의 오스카상이라 평가받는 ‘구르망 월드 쿡북 어워드’에서 1등 상을 받았다. 평택시 오성면 신1리부터 신4리까지 4개 마을에 사는 250여 가구 농부들의 사연을 쌀을 매개로 풀어냈다. 그곳엔 쌀과 음식, 사람과 이야기가 있다. 그의 애향심을 거치면 평택의 자랑거리가 탄생한다. 그가 살아왔고, 살고 있고, 살아갈 곳. 그곳에서 그는 볍씨를 뿌리고 키우고 거둔다. 쌀의 생애를 일군다. 그 알곡의 시간을 수집하고 기록하며, 문화의 가치로 섬긴다.

술통을 모두 다 비웠다. 마시다 마시다 모자라 페트병에 술을 담아 마셨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듣고서야 양조장을 나왔다. 가을밤이 절절하다. 숨의 매듭마다 가을이 흥건하다. 이 밤을 또 복용해야 하는 날이 온다면, 나는 이 밤을 병에 담아 ‘평야’라 이름 지으리라.


▒ 김하늘
외식 컨설팅 회사 ‘라이스앤컴퍼니’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