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시 애월읍 봉성리에 있는 새별오름. 사진 이우석
제주시 애월읍 봉성리에 있는 새별오름. 사진 이우석

아직 그나마 낫다. 추위에 몸서리치는 이들에게 겨울이야말로 질곡이다. 어디 한 곳 나다니기도 버겁다. 제주는 평균기온이 전국 평균보다 3도 이상 높은 우리 대한민국의 온실이다. 겨울이 오기 전 마지막 지나는 가을을 배웅하기에도 딱 맞다.

멋진 숲과 옥색 바다에, 남한에서 가장 웅장한 산까지. 겨울이지만 훈훈한 날씨, 제법 따가운 볕, 유럽풍 목장에다 올록볼록한 수많은 오름과 사람이 만드는 근사한 리조트, 맛난 음식도 많다. 제주도는 삼다도(三多島)가 아니라 백다도(百多島)쯤은 된다.

특히 제주의 가을은 어느 곳보다 탐스럽다. 단풍이 늦다지만 가을 바다의 향기는 도시의 홍엽 사이를 스치는 그것보다 더욱더 향기롭기 때문이다. 특별한 것을 하지 않고 이 향기가 섞여 있을 공기만 호흡하다 와도 손해될 것이 없는 것이 바로 가을 제주 여행이다.

게다가 지금 유일하게 허락된 해외여행이나 다름없다. 팬데믹 시대 일중독 한국인에게 단비 같은 곳이 바로 제주도다. 오름도 좋고 곶자왈도 좋다. 해안도로를 빙 두르는 드라이브 역시 근사하다.

우선 바다는 바라볼 뿐 들어가지 않는 게 좋겠다. 바다를 보기 좋은 곳은 수두룩하지만 역시 성산 앞바다가 좋다. 성산일출봉처럼 생긴 지형은 세계적으로도 드물다. 거대한 화산 봉우리가 옥색 바다에 떡하니 박혀 있다. 가을 어장을 노리는 고깃배와 낚싯배도 두둥실 떠 있다. 주변에 ‘시닉 포인트(전망 좋은 곳)’도 많다.

제주는 섬이다. 바다는 어느 방향이나 다 있다. 협재, 중문, 김녕 등 색이 고운 바다는 제주까지 온 수고를 단번에 잊게 한다. 바다는 같지만 느낌은 저마다 다르다. 때에 따라서도 달리 보인다. 뜨거운 가을 노염이 물을 뚫고 들어가 비취색을 발하는 한낮, 석양이 드리울 무렵, 아니 아예 밤바다까지 모두 육지에선 보기 힘든 근사한 풍경이다.

썰물처럼 피서객이 빠져나간 제주 바닷가에 외로운 자전거 라이더, 똑같은 옷을 입은 커플, 드레스를 같이 차려입은 친구들이 함께 바다를 구경한다. 자연은 어떤 예술 작품보다 더 깊은 감동을 선사한다.

땀이 차지 않는 가을, 오름에 간다면 억새가 있는 곳이 좋다. 단풍 이전에 벌써 은발을 성성 휘날리는 억새와 수크령(볏과의 여러해살이풀)은 제주 가을의 상징이다. 산굼부리엔 억새가 ‘억수로’ 많다. 언덕에서 눈앞에 펼쳐지는 은색 억새밭. 그사이를 거닐면 누구보다 가을 속으로 뛰어든 셈이다. 키만큼 껑충한 억새가 샛바람에 몸을 척척 감는다. 갑자기 몸이 샤프심만큼 작아져 코커스패니얼의 등이라도 지나는 기분이다.

새별오름은 그중에서도 억새의 천국이다. 익숙지 않게 제주의 해는 새파랗게 저문다. 저녁 무렵 새별오름에 오르면 은빛 억새가 잔뜩 피어나 기다리고 있다. 볼록 솟아난 오름을 뒤덮은 억새밭은 백발 성성한 은빛 가을의 정취를 뽐내고 있다. 단풍이 가을의 관능미를 자랑한다면 억새는 그윽한 원숙미를 내는 장식이다. 석양 뒤편에 잔뜩 금물이 들 대로 든 억새는 바람을 따라 춤춘다. 노랫말처럼 제주도의 밤은 푸르다. 정말이다.

해 질 녘 들판에는 달이 뜨고 말이 섰다. 제주도의 푸른 밤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사그라드는 붉은 태양과 억새는 오랜 친구처럼 잘 어울린다. 멀리 바라보이는 제주 앞바다와 이국적인 말 농원은 제주의 억새밭에서만 볼 수 있는 ‘황송한 배경’이다.

숲은 또 어떤가. 보기엔 좋았지만 끈끈하고 후덥지근했던 여름 숲이 아니다. 죽죽 뻗어 하늘을 가린 숲길엔 맑은 공기 덩어리가 있다. 사이다를 채운 풀에서 수영하는 기분이랄까. 그 공기의 덩어리를 부수고 들어선 숲이 청량하기도 하다. 이 맛에 제주에 온다.


제주시 성산읍에서 바라본 성산일출봉. 사진 이우석
제주시 성산읍에서 바라본 성산일출봉. 사진 이우석

푸른 가을밤 도보로 오름 여행

가을 중산간 바람은 참 맛있다. 차창과 입을 활짝 열고 숲 내음을 한껏 들이켜며 달렸다. 지나다 목장에서 놓아 기르는 말을 봤다. 즉답 반응으로 차를 멈춰 세우고 셔터를 눌러댄다. 늠름한 갈색 말 한 마리가 이 정도 반응은 처음이 아니라는 듯 당당하게 포즈를 취한다.

그동안 나온 제주도를 여행하는 방법 수십 가지 중 가장 꾸준히 사랑받는 방법은 오름 트레킹이다. 특히 요즘 같은 거리 두기 시대에 딱이다.

중문관광단지와 가까운 군산오름(335m)은 멀리서 보면 그저 나지막한 언덕처럼 생겼다. 봉긋하지 않고 펑퍼짐한 데다 인근에 워낙 특이한 산방산이 있어 그에 가린다. 하지만 정작 군산오름에 오르면 바다와 산, 마을 등이 함께 어우러진 멋진 풍광을 볼 수 있다.

특히 밤에 오르면 수평선 멀리 등불을 밝힌 어선들로 신도시가 있는 듯 눈부신 야경이 펼쳐진다.

군산오름은 그냥 처음부터 한두 시간 꼭대기만 보고 올라갈 수도 있지만, 8부 능선에 있는 체력단련장까지 차로 오를 수 있는 길도 있다. 산행이 버거운 이들에게 딱 맞다. 많이 걷지 않는다. 사자암을 지나 코너를 돌면 바로 정상이다. 마치 극장에서 영화를 기다리듯 두근두근 가슴 설레며 오르는 야간 오름 트레킹이다.

과연 블록버스터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360도 펼쳐지는 아름다운 제주 밤바다의 풍경. 매끈한 바다는 환상의 런웨이,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별빛과 불 밝힌 어선의 등불은 근사한 조명이다. 산방산과 중문, 대정 등 도시의 불빛이 깜빡이며 주연배우의 화려한 등장을 기다린다. 뺨에 부딪히는 청량한 제주 바람은 생애 최고의 고객 서비스이며, 뒤편에 커튼처럼 드리운 한라산은 세상에서 가장 경이로운 무대 장식임이 틀림없다.


▒ 이우석
놀고먹기 연구소 소장, 성균관대 미술교육학과, 전 여행기자협회 회장


여행수첩

오름 정보 제주시에 210개, 서귀포시에 158개 등 총 368개의 오름이 있다. 서귀포시 홈페이지에는 해당 오름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담겨 있다. 오름의 이름과 소재지, 표고, 비고, 면적, 형태, 지목 등 기본 현황과 함께 이름의 유래 등이 있다. 또한 오름에 조성된 탐방로의 종류와 길이, 화장실과 주차장 등 편의시설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으며, 주변 관광지와 숙박시설, 음식점 등도 간단히 소개하고 있다.

먹거리 표선에는 춘자멸치국수집이 유명하다. 양은 냄비에 끓여 나오는 멜(멸치)국수는 소면이 아닌 중면을 사용해 쫄깃한 맛도 좋고 멸치의 고소한 맛이 담긴 육수도 시원하다. 시원하게 담근 깍두기도 맛깔나다. 또한 제주도 토종 흑돼지로도 유명한 지역이다. 성읍 ‘교래리 손칼국수’는 토종닭으로 육수를 낸 손칼국수가 맛있기로 소문났다. 다소 기름기는 많지만 의외로 고소한 맛이 일품이다. 제주시에는 ‘관광지 제주’가 아닌 제주 사람의 토속 음식을 맛볼 수 있는 김지순 명인의 ‘낭푼밥상’이 있다. 제주 음식의 정통 계보를 양용진 대표가 이어 나가며 꾸준히 연구한 ‘유산’을 맛볼 수 있다. 제주에서 ‘제주다운’ ‘제주의’ ‘제주를 위한’ 최고의 한 끼를 즐길 수 있는 곳으로, 내장고기를 함께 삶은 몸국 등 색다르면서도 이야기가 있는 밥상을 받아들 수 있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