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함부르크 시내 중심가. 하세, 브람스, 말러, 멘델스존, 텔레만, 바흐 등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음악가들이 함부르크에서 태어났거나, 함부르크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사진 안종도
독일 함부르크 시내 중심가. 하세, 브람스, 말러, 멘델스존, 텔레만, 바흐 등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음악가들이 함부르크에서 태어났거나, 함부르크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사진 안종도

요즘 가로수길 사이를 거닐 때면 노랗게 물든 잎들이 눈이 내리는 것처럼 떨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시간은 가을을 넘어 겨울로 가고 있다. 산속의 동물들은 동면을 준비하고 식물의 씨앗은 땅속에서 웅크릴 것이며, 우리 인간들도 창밖 너머 구름으로 뒤덮인 하늘을 보며 시간의 흐름을 다시 한번 체감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꿈을 꾸기 시작한다. 다음의 봄날을 기다리며.

북반구의 겨울은 지역에 따라 체감하는 정도는 다르지만 짧아지는 일조량과 낮아지는 기온 탓에 인간의 활동이 제약받기도 한다. 하지만 신체적 활동의 제약이 인간의 정신적 상상력을 제한하지 못한다. 어쩌면 더 활발히 꿈의 나래를 펼칠 수 있는 훌륭한 영감을 제공하기까지 한다.

필자가 사는 북독일의 함부르크는 한겨울 오후 3시면 어두운 밤이 된다. 또 살벌하게 불어대는 바람과 잦은 비로 독일에 사는 이들도 고개를 젓는 날씨로 유명하다. 하지만 음악가들에게는 1년에 반 이상 지속되는 겨울 날씨가 훌륭한 음악적 자양분이 된 모양이다. 독일 함부르크와 인연이 있는 작곡가만 해도 하세, 브람스, 말러, 멘델스존, 텔레만, 바흐 등이 있다.

이러한 북독일에서 크게 유행했던 음악 형식이 있었으니, 이 장르는 바로 ‘판타지(환상곡)’다. 1500년대 이탈리아를 포함한 남부 유럽에서 시작된 판타지 형식은 이후 1600년대 독일 북부로 전해지면서 바로크 음악 사조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하나의 독립적인 장르로 성장했다. 독일어 사전에서 판타지(Phantasie·Fantasie)를 ‘꿈과 실존 사이를 구별할 수 없는 기상천외한 상상’이라고 정의하고 있는 것처럼, 즉흥적이고 때로는 기괴한, 종잡을 수 없는 음악적 표현이 특징이다.

판타지 장르가 북독일에서 발전했던 이유가 단지 긴 겨울 날씨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프랑스의 부르봉 및 중부의 합스부르크 등 궁정 문화가 발달했던 지역에서는 춤곡과 궁정 사교 음악이 많이 유행했지만, 북부 독일은 궁정 문화에 한발 비켜서 있었다. 이에 북부 독일의 교회는 요즘 우리 시대의 콘서트홀과 같은 기능을 했다. 교회의 오르간 소리는 이미 그 자체로서도 판타지가 가득한 환상적인 소리를 제공했다. 실제로 바흐가 사랑했던 오르간이 남아 있는 함부르크의 성 야코비 교회에서 바흐 ‘코랄 판타지’를 감상해보면 교회 회랑에서 뒤섞이며 울리는 환상적인 오르간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춥고 어두운 하늘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당시 음악인들의 감성도 느낄 수 있다.

필자는 최근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반음계적 환상곡(판타지아)과 푸가 작품번호 903’을 종종 연주 프로그램에 넣고 있다. 이 곡 또한 난해한 표현이 가득하지만, 그 숭고한 예술성으로 인해 많은 연주가의 사랑을 받는 작품이다. 처음 이 작품을 공부하며 독일에 계신 필자의 하프시코드(피아노의 전신 악기) 선생님께 어려움을 토로한 적이 있다. 즉흥적이고 기괴한 표현이 극도로 엄격한 악곡의 틀에 담겨 있어 해석에 어려움을 더했기 때문이다. 선생님과의 긴 토론 끝에 우리가 도달한 해석은 이러했다. ‘파릇파릇한 새싹이 꽃잎을 맺고 어느새 물이 들어 낙엽이 되고 흙으로 돌아가듯 우리 인간의 육신도, 우리의 기괴한 판타지도 결국 신이 정의한 엄격한 시간 내에 귀결된다.’ 이는 종교개혁의 영향이 강하게 미친 바로크 시대의 북독일 지역에서는 일반적인 정서였기도 했다.

바흐의 ‘반음계적 환상곡(판타지아)과 푸가 작품번호 903’은 제목이 시사하듯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박자를 종잡을 수 없는 즉흥성이 가득한 판타지아 부분과 시계추가 움직이듯 정확한 박자의 푸가 부분이다. 하지만 판타지아 부분에서 푸가로 넘어갈 때쯤 갑자기 목을 옥죄는 듯한 느낌이 든다. 종소리처럼 요란히 제멋대로 울리던 선율이 꽉 짜인 박자 틀 안으로 억지로 들어갔다가 신이 지배하는 거부할 수 없는 시간의 틀 안(바로 이어지는 푸가 부분)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바르텔 베함의 ‘바니타스’.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운명을 다뤘다. 사진 함부르크 쿤스트할레 미술관
바르텔 베함의 ‘바니타스’.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운명을 다뤘다. 사진 함부르크 쿤스트할레 미술관

판타지에도 종교적 성격 반영

판타지에는 인간의 즉흥적 감성뿐 아니라 종교적 성격도 반영돼 있다. 바흐의 다른 작품들을 비롯해 후대의 작곡가들이 작곡한 판타지 작품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특히 20세기 초반 막스 레거와 같은 걸출한 오르간 작곡가도 많은 판타지 작품을 작곡했다. 그의 대표적 작품은 ‘코랄 판타지-Alle Menschen müssen sterben(우리는 모두 죽는다)’다. 바흐가 자신의 판타지 작품에서 사용했던 코랄 선율인데 이 또한 우리는 시간을 거스를 수 없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기도 하다.

아직도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우리 모두 외출 등 외부 활동을 줄이고 조심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활동의 제약이 우리의 상상력마저 제한할 수 있으랴. 바흐의 ‘반음계적 환상곡과 가 작품번호 903’을 통해 독자들의 상상력이 저 하늘의 구름을 넘어 저 상상의 세계로 훨훨 날아갈 수 있길 기대해본다.


▒ 안종도
독일 함부르크 국립음대 연주학 박사, 함부르크 국립음대 기악과 강사


Plus Point

함께 감상하면 좋은 음반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반음계적 환상곡(판타지아)과 푸가 작품번호 903’
하프시코드 구스타프 레온하르트
피아노 알프레드 브렌델

곡 제목이 시사하는 것처럼 반음계 선율이 주 모티브를 이루고 있다. 그의 자필 악보가 발견되지 못한 탓에 작곡 연도를 1717~23년 사이로 추정하고 있다. 곡에 담긴 즉흥성 그리고 거의 모든 조성이 출현하는 듯한 극한의 전조가 주는 환상적인 표현으로 인해 이미 바흐 생전에도 그의 최고의 작품 중 하나로 극찬받았다고 전해진다. 당시 바흐 시대의 원전 악기인 하프시코드의 구스타프 레온하르트 그리고 현대 모던 피아노의 알프레드 브렌델의 해석으로 감상을 추천해 본다.